https://youtu.be/JefnEDWec9c?si=uNOj_gB5ZT2lOFuo
House Leadership School
Leadership : in Tubulent Times(도리스 컨스 굿윈)
□ 요약(제2-1부 역경과 성장 : 2. 에이브러햄 링컨_리더십의 위기)
①‘링컨’의 일리노이주를 확대하고자 하는 계획이 불경기로 인하여 주의회의 사업중단 결정으로 좌초되자 ‘링컨’은 임기가 끝나면 주의회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링컨’은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난 것을 무엇보다 괴로워 했는데, 그는 주하원의원에 처음 출마했을 때, 인구밀도가 낮고 가난한 지역도 번영할 수 있도록 편안한 도로와 항해할 수 있는 수로를 건설하겠다고 공약했었음(p182). 그는 그 공약이 자신의 명예와 명성 및 인격과 관련된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루어내지 못했으며, 게다가 그가 주민들에게 걷어주려던 부담이 오히려 늘어나고 말았고, 그 바람에 공적 청렴성에 대한 ‘링컨’의 의식은 크게 타격을 입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개인적인 명예심에도 타격이 가해졌으며, 그건 자초한 결과였음(p183). ②고민 끝에 ‘메리 토드’(Mary Todd)와 파혼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는데, ‘메리’는 켄터키주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닌 부유한 휘그당원의 딸로 고등 교육을 받은 똑똑한 여성이었으며, 그들은 시와 정치를 사랑하는 공통점으로 서로에게 끌렸는데, 게다가 ‘링컨’의 우상이던 휘그당 지도자 ‘헨리 클레이’(Henry Clay)는 ‘토드’ 가문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손님이었음(p183). ‘메리’는 자신을 열정적인 휘그당원이라 생각하며 정치에 대한 “여성답지 않은” 열정을 드러냈는데, 또 ‘링컨’의 운명에 대한 그녀의 굳은 신념은 ‘링컨’의 열망에 박차를 가했고, 그들을 하나로 맺어주었음(p183). ③하지만 교제가 결혼으로 진전되자, ‘링컨’은 하루는 애정이 넘치고 관대하지만 다음 날에는 우울증에 빠져 짜증을 내는 그 변덕스런 여성을 정말 사랑하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링컨’의 절친한 친구, ‘조슈아 스피드’(Joshua Speed)는 “1940~1941년 겨울에 ‘링컨’은 ‘메리’와의 약혼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지 않아 힘들어 했고, 누구도 그 자신만큼 알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회고함(p183). ‘링컨’은 ‘메리’를 두고 망설이기도 했지만, 한 친척의 지적에 따르면 “자신에게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뒷받침해줄 만한 능력과 여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떨쳐내지 못했으며, 주의원으로 활동하고 선거 유세를 하느라 갓 시작한 변호사 업무가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음(p183). ④실제로 ‘링컨’은 “나는 지독히 가난하다. 머리를 치켜들고 세상에 나갈 수도 없을 지경이다. 1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야 한 달을 겨우 쉴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한탄했으며, 그런데 어떻게 아내와 자식을 부양할 수 있겠는가? 가족을 부양하게 되면 지속적인 학습과 정치적 야망이 방해받지 않을까?(p184). ‘링컨’은 표본으로 삼을 만한 성공적인 가정을 알지 못했고, 자신의 가정을 시작할 만한 기반도 없었으며, 식탁에 함께 앉은 가족, 부양자 역할을 해야 하는 아버지 등 가정생활이 무엇인지 얼핏 본 적은 있지만 그런 삶을 산 적은 없었고, 이런 불안을 견뎌내지 못하고 ‘링컨’은 결국 약혼을 취소하기로 결정했음(p184). ⑤스프링필드는 작은 도시여서 파혼 소식이 알려지자 ‘메리’의 수치심은 깊어졌는데, ‘링컨’은 ‘메리’의 슬픔을 자신의 아픔인 양 격렬히 느끼며, ‘메리’의 불행이 자신의 책임이란 생각을 떨치지 못했고, “내 영혼이 죽는 기분”이었다고 말했음(p184). ‘스피드’에게 털어놓았듯이, 무엇보다 큰 충격은 “일단 결정하면 끝까지 밀고 가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것”이었고,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그 능력에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졌던가. 내 특징 중에서도 가장 큰 보석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 보석을 잃어버렸네. 그 보석을 되찾을 때까지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을 거네.”(p184). ⑥그해 겨울, ‘조슈아 스피드’는 켄터키에 있는 가족 농장으로 돌아가려고 스프링필드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혼자가 된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며, 그때까지 7년 동안, ‘스피드’의 잡화점은 스프링필드에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중심지였음(p184). ‘스피드’와 ‘링컨’은 잡화점 위에 자리한 커다란 방에서 함께 살았는데, 그들은 정치 행사, 무도회, 파티에 함께 다녔으며, ‘스피드’와의 예견된 이별은 ‘링컨’에게 단순히 한 친구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동료애가 절실히 필요하던 시기에 속내까지 털어놓던 유일한 사람을 잃게 된다는 뜻이었음(p185). ⑦‘윌리엄 헌던’의 생각에, ‘링컨’은 “죽은 사람이든 살아 있는 사람이든 세상의 어떤 존재보다” ‘스피드’를 사랑했으며, ‘링컨’은 ‘스피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네가 없다면 더욱더 외로울 거야. 이 세상은 정말 모든 게 엉망진창인 것 같아. 친구가 없다면 즐거움도 없겠지. 더구나 친구가 있어도 친구를 잃는다면 상실감에 두 배의 고통을 겪어야 하겠지.”라고 아쉬워했음(p185). ‘링컨’은 개인적인 삶에서 이런 고난을 겪던 시기에 그가 진심으로 지원했던 공공사업 프로젝트들까지 중단되고 붕괴되자,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할 정도의 우울증에 빠졌는데, ‘링컨’은 전에도 우울증 발작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음(p185). ⑧6년 전, 첫사랑 ‘앤 러틀리지’(Ann Rutledge)가 죽었을 때, ‘링컨’은 삶 자체에 무관심해졌고, 총을 소지한 채 숲속을 배회하곤 했는데, 친구들은 그가 신속히 균형감을 되찾지 않으면 이성을 상실할 것이라 걱정하기도 했지만, 촘촘히 짜인 뉴 세일럼 이웃들이 공개적으로 슬픔을 함께한 덕분에 ‘링컨’은 곧 주의원으로 복귀했고, 법학 공부도 다시 시작했음(p185). 32세에 맞이한 이런 좌절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위기였고, 그 후로도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링컨’은 당시 법률 회사 파트너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숨이 붙어 있는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모든 인간 가족에게 균등하게 분배된다면 이 땅에서 유쾌한 표정을 지을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겁니다. 내가 앞으로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영원히 낫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듭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사는 건 불가능합니다. 죽지 않으면 낫겠지요.”라고 썼는데, 그 편지는 “더는 못 쓰겠습니다.”라는 말로 갑자기 끝났음(p186). ⑨‘링컨’은 몸져누웠고, 식사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으며, 주의원으로서 의무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는데, ‘스피드’의 표현에 따르면 “링컨은 점점 미쳐갔다.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끔찍했다.” 일리노이 동료 변호사, ‘오빌 브라우닝’(Orville Browning)은 당시를 회상하며 “링컨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의식이 혼미했고,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고 말함(p186). 또 한 친구는 “그는 눈에 뛰게 위축되고 수척해졌다. 크게 말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듯했다. 그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고 말했음(p186). ⑩스프링필드의 의사들은 “평생 정신병자로 추락하기 직전”이란 진단을 내렸는데, 그 끔찍한 시기 동안 ‘조슈아 스피드’는 ‘링컨’의 곁을 지켰으며, 그때 나누었던 대화를 계기로 그들은 평생지기가 되었는데, ‘스피드’가 ‘링컨’에게 어떻게든 정신을 되찾아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질책하자, ‘링컨’은 기꺼이 죽고 싶지만 “자신이 이 땅에 살았다는 기억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만한 일을 아직 해내지 못했다.”고 말함(p186). ‘스피드’에게 솔직히 말했듯이, ‘링컨’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가장 큰 열망은 “미국인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업적을 자신의 이름으로 남기는 것”이었는데, 12년 전 “친구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해 평저선에서 일하는 무일푼의 청년”이 뉴 세일럼의 정착민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자신이 주의회에 진출해 그들을 대변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던 욕망, 즉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기본적인 욕망이, 그의 삶을 산산 조각 낸 최악의 늪에서 결국 그를 구해냈음(p187).
● 비평
필자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주의원으로 있을 당시 그에게 닥친 위기의 상황을 주변 인물들의 발언들을 통해 잘 보여주었는데, ‘링컨’의 첫 사랑 ‘앤 러틀리지’의 죽음과, ‘링컨’과 약혼한 ‘메리’와의 파혼 및 ‘링컨’이 공약한 일리노이주 사업의 중단 등으로 ‘링컨’은 나락으로 떨어졌으나 본래의 야망이 그를 회복시켰다고 함.
● 토의
‘링컨’이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고, 파혼을 경험하였고,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에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 야망이라면, 이 야망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 요약(제2-1부 역경과 성장 : 3. 에이브러햄 링컨_리더십 위기로부터 탈출)
①‘링컨’의 주의회 진출 시 공약 실패 및 파혼 등 위기의 상황 속에서 그가 다시 회복될 수 있었던 것과 관련하여서, 첫째로 ‘링컨’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며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바로잡아야 했는데, ‘링컨’은 10년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일차적인 목표를 세웠고, 주의회를 떠난 뒤, 그는 그 지역의 유력한 변호사였고 서부에서 “순수한 사법 정신의 본보기”로 꼽히던 ‘스티브 로건’(Stephen Logan)과 새로운 파트너십을 맺었음(p187). ‘로건’은 ‘링컨’이 법의 원리와 판례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명확히 말하는 능력과 유머 감각으로 배심원을 다루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그가 젊은 까닭에 열심히 일할 것으로 믿었는데, 새로운 파트너십은 결과적으로 둘 모두에게 유익했으며, ‘링컨’의 표현을 빌리면, ‘로건’은 그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음(p187). ②‘로건’은 ‘링컨’에게 사건을 준비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자수성가한 변호사인 ‘링컨’이 대학을 졸업한 동료들을 따라잡지 못해 희망을 잃으면 자신감을 북돋워주며,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결과를 결정짓지 않는다. 결과는 중년까지 얼마나 노력하고, 그 노력을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충고했고, ‘로건’과 ‘링컨’은 함께 일하며 돈독한 신뢰 관계를 구축했고, 마침내 ‘링컨’은 남부럽잖은 삶을 살기 시작함(p187). 가족을 부양할 능력에 대한 의혹이 줄어들자, ‘링컨’은 ‘메리’에게 다시 구혼했는데, ‘링컨’은 금전적 불안만이 아니라, ‘스피드’가 말했듯이 “세속적인 것을 훌쩍 넘어서는 몽상적인 엘리시움”, 즉 사랑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파혼했다는 걸 깨달았음(p188). ③‘링컨’은 자신이 깨뜨린 약혼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며 명예심도 회복해갔고, 그가 결심을 견지하는 “중대한 보석”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도 입증해 보였는데, ‘메리’와의 결혼 생활이 때로는 삐걱거렸지만, ‘링컨’은 좋은 남편과 자상하고 재미있는 아버지가 되려고 크게 노력하며, 정작 그 자신은 아버지와 맺지 못한 관계를 자식들과 만들어가려고 애썼음(p188). ‘링컨’은 “다행히 내 아이들은 자유롭다. 아버지의 폭압에 억눌리지 않아 행복한 아이들이다. 사랑은 자식을 부모에게 묶어두는 사슬”이라고 말했으며, 그가 영위한 삶은 흔하디흔한 것일 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금전적으로 안정된 가정의 기반을 구축하는 게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으며, ‘링컨’은 금전적 안정이 없다면 지극히 사소한 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음(p188). ④‘리더’의 미래에 우연이 주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링컨’의 사례에서 명확히 입증되었는데, 일리노이주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하자, 무력증에 빠졌던 ‘링컨’의 정치적 야망도 되살아났으며, 결혼한 직후, ‘링컨’은 한 휘그당 동료에게 “‘링컨’이 연방 의회에 진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자네가 내 친구 자격으로 그 사람에게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말해 주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더 멀리까지 가고 싶네.”라고 말했음(p189). ‘링컨’이 주의원으로 처음 당선된 때는 포부가 큰 사람들이 후보로 자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휘그당과 민주당은 공직에 출마할 후보자를 지명하기 위한 전당 대회 시스템을 개발했음(p189). ⑤상거먼 카운티가 포함된 제7선거구에는 휘그당원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는 ‘링컨’에게 좋은 징조였으며, 후보로 지명되면 승리는 확실했으며, 하지만 잠재적 경쟁자들 간의 불화를 차단하려고 휘그당은 제7선거구에서 순환 원칙을 채택하여, 모든 지명자가 단임을 약속하고 다음 출마권을 다른 후보에게 넘긴다는 원칙이었음(p189). 연방 상원의원 아들이던 ‘존 하딘’(John Hardin)이 1842년에 후보로 지명됐고, 1844년에는 주상원의원이던 ‘에드워드 베이커’(Edward Baker)가 지명되었으며, 순환 방식으로 각 후보는 자신의 차례를 기대하며 일치된 협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짧은 재임 기간으로 유능한 후보도 지속적인 인상을 남기기 어려웠음(p189). ⑥단임 시스템을 고려할 때 1840년대 의회는 ‘에이브러햄 링컨’처럼 야심찬 정치인이 꿈을 펼치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었으며, 당시 친구들의 평가에 따르면, ‘링컨’은 “그 시대의 여느 사람만큼이나 세속적인 명예를 바랐던 사람”, “세상에서 가장 야심찬 사람”이었음(p189). 워싱턴에 입성하고 보름이 지나지 않아, 초선 하원의원이던 ‘링컨’은 얼마 전에 끝난 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 :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멕시코와 미국이 텍사스를 차지하기 위하여 벌인 전쟁임. 미국이 승리하면서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국경에 인접한 광대한 영토를 할양받음)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결의안을 하원에 제출하여 주목을 받았는데, ‘링컨’은 ‘제임스 K. 포크’(James Knox Polk)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멕시코를 자극해 전쟁에 끌어들였고, “군사적 성공의 밝은 면을 부각해 철저한 조사를 회피”한다고 비판했으며, ‘포크’ 대통령의 전쟁 메시지를 “반쯤 미쳐 중얼거리는 아주 불쾌한 꿈”에 비유하며, “뜨겁게 달궈진 표면 위에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피조물처럼 이리저리 날뛰는 죄책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질책하기도 했음(p190).
● 비평
필자는 ‘링컨’이 여러 위기들 속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바로잡으려고 했는데, ‘스피드 로건’을 통하여 ‘링컨’이 변호사로 자리잡으며 개인적 삶의 회복과, 일리노이주 경제 회복에 따른 공적 삶의 회복을 잘 설명함.
● 토론
‘리더십’의 회복을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실천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 요약(제2-1부 역경과 성장 : 4. 에이브러햄 링컨_연방 하원의원 활동)
①워싱턴에 처음 입성한 ‘링컨’의 멕시코-미국 전쟁과 관련하여 ‘포크’ 대통령의 조사에 대한 회피를 지적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결의안 작성은 신중하고 착실한 분석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훗날 ‘링컨’의 이성적인 대중 연설과는 완전히 달랐으며, 폭넓게 인정받고 싶었던 ‘링컨’의 성급한 욕심은 민주당원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휘그당을 당혹감에 빠뜨렸으며, 게다가 승전으로 내국심이 활활 타오르던 일리노이에서도 지지층을 잃고 말았음(p190). 1848년 대통령 경선은 ‘링컨’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즉 자기만의 고유한 카리스마와 이야기를 꾸미는 재능을 십분 활용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는데, 휘그당 후보이던 전쟁 영웅,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를 위해 하원에서 연설한 ‘링컨’은 사려 깊으면서 유머러스한 연설로 휘그당 동료 의원들과 기자들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음(p190). ②한 기자가 보도했듯 ‘링컨’은 “유능하고 예리하며, 무례할 정도로 정직하고 올곧은 젊은 의원”이란 인식을 그들에게 심어주었는데, 일간지 ‘볼티모어 아메리칸’(Baltimore American)은 그 신선한 연설을 “그날의 최고 연설”로 평가하며 “링컨의 태도는 부드러웠고, 그의 어법은 무척 독특해서 하원에서는 유쾌한 웃음이 끊어지지 않았다.”라고 덧붙였음(p190). ‘링컨’은 연설하는 동안 통로를 오르내렸고 동료 의원들을 자극하고 즐겁게 해주려는 듯 끊임없이 말하며 손짓도 멈추지 않았는데, 훗날 ‘링컨’의 부통령이 된 ‘해니멀 햄린’(Hannibal Hamin)조차 ‘링컨’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하원에서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탄복했으며, 휘그당 실력자들도 ‘링컨’의 연설에 감탄했던지 그해 가을 뉴잉글랜드에서 열린 ‘테일러’ 선거 유세에 그를 초빙했음(p191). ③수년이 지난 뒤에도 ‘링컨’은 메사추세츠주를 처음 방문한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는데, “당시 나는 거친 서부 출신의 하원의원이었다. 머리카락에서 풀씨를 완전히 떼어내지 못한 채 미국에서 가장 문명화된 주, 메사추세츠에 갔다. 행동거지에서 많은 교훈을 얻으려고 말이다.”(p191). 자신의 빈정대는 어법을 제외하면 그는 동부의 유권자와 교감하는 법을 특별히 배울 필요가 없었는데, 동부인들은 ‘링컨’의 재미있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참신하고 즐겁고 독특하게 받아들였으며, 기자들은 그가 열두 곳의 도시에서 행한 연설은 “분별과 합리적 추론, 반박하기 힘든 논증으로 채워졌고, 몸짓과 언어 구사도 완벽해서 서부의 일반적인 웅변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고 보도했음(p191). ④‘링컨’이 휘그당원들로부터 얻은 인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예제도에 관련해 알게 된 전반적인 인식과 감성 및 정서적 이해였는데, 멕시코로부터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자, 노예제도가 다시 쟁점으로 뜨겁게 타올랐으며, 노예제도는 기존에 존재하는 주에서 연방 헌법으로 보호됐지만, 새로이 획득한 영토에는 적용되지 않았음(p191). 멕시코-미국 전쟁이 끝나기 전, 펜실베니아 출신의 연방 하원의원, ‘데이비드 월멋’(David Wilmot)은 전쟁 세출 법안에 “앞에서 언급된 영토의 어느 곳에서도 노예제도와 강제노동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 규정하는 수정안을 덧붙였는데, 이 월멋 조항(Wilmot Proviso)은 하원에서 거듭 통과됐지만, 남부가 주도한 상원에서는 재삼재사 막혔고, 훗날 ‘링컨’은 월멋 조항에 40번 이상 찬성투표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하원 연단에서는 노예제도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p192) ⑤일리노이에서와 달리 매사추세츠에서는 ‘링컨’이 유세를 위해 방문하는 곳마다 노예제도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약 10년 뒤에 미국을 찢어발긴 문제에 대한 ‘링컨’의 견해도 신속히 변해갔음(p192). 예컨대 ‘링컨’은 보스턴의 트리몬드 교회에서 ‘윌리엄 헨리수어드’(William Henry Seward)의 열정적인 기조연설을 들었으며, 당시 뉴욕 주지사를 지냈고, 훗날 상원의원이 된 ‘수어드’는 “의견을 명확히 정리하고 대담하게 발언할 때가 왔다.”고 역설했으며, 이튿날 ‘링컨’과 ‘수어드’는 자정을 넘겨 밤을 지새우며 노예제도에 대해 토론했고, 새벽쯤에 ‘링컨’은 ‘수어드’에게 “당신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노예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라고 말했음(p192). ⑥‘테일러’가 1848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뒤, ‘링컨’은 다시 의회로 복귀해 3개월 동안 진행되는 마지막 회기에 참석했는데, ‘링컨’은 노예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로 결심하고는, 서너 주 동안 몰두한 끝에 공정한 제안이라 하기에 충분한 결의안을 작성했음(p192). 노예제도가 기존에 존재하는 주에서는 연방 헌법으로 보호된다는 걸 인정했지만 연방 의회는 국가 수도의 문제에 통제할 권한을 지니므로 컬럼비아 특별구, 워싱턴 DC내의 노예제도를 독자적으로 다룰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었고, 또 워싱턴에서 노예의 점진적인 해방을 요구하며, 정부가 노예 소유주에게 노예 값을 부족하지 않게 보상하자고 제안함(p193). ⑦위싱턴에서 피난처를 찾으려고 남부에서 탈주한 도망 노예를 체포해 인도할 권리가 지방 정부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동시에, 결의안의 채택 여부는 컬럼비아 특별구 주민의 투표에 맡겨야 한다고도 주장했는데, ‘링컨’은 결의안에 기계적으로 균형은 맞추었지만 북부와 남부의 감정이 화합되기 힘든 지경이란 것은 헤아리지 못했음(p193). 노예폐지론자 ‘웬들 필립스’(Wendell Philips)는 ‘링컨’을 “일리노이주의 노예 사냥개”라고 매섭게 비난했고, 친노예제도 세력은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문을 열어주는 어떤 형태의 노예 해방도 고려하지 않았으며, 어느 쪽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링컨’은 나름대로 신중하게 작성한 타협안을 철회하고 말았음(p193). ⑧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단임으로 끝난 ‘링컨’의 하원의원 시절을 실패로 평가하는데, ‘링컨’이 지금 살아 있다면 그 자신도 그 평가에 동의할 것이며, ‘링컨’은 휘그당의 강령을 충실히 지켰지만, 그의 야망은 당의 목표보다 높았고, 일리노이주의 지리적 선거구 보다 넓었음(p193). ‘링컨’은 일리노이로 돌아왔지만, ‘테일러’를 지원하며 그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으니 중요한 직책을 얻게 될 것이라 기대했으며, ‘링컨’은 국유지 관리 국장에 지명되기를 바랬는데, 당시 국유지 관리국은 서부에 위치한 주들의 연방 토지를 감독하는 차관급 관청이었으며, 그 바람이 이루어지면 ‘링컨’은 공직에 처음 출마할 때 내걸었던 공약, 즉 도로와 철로, 수로의 건설 등을 통해 가난한 지역 경제 개발을 촉진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공약을 실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음(p194). ⑨‘링컨’은 그 공약을 이행하지 못한 것을 정치적 실패이자 도덕적 실패로 여겼으며, 국유지 관리국 국장직은 실패를 만회할 소중한 기회였는데, 하지만 그 직책은 다른 휘그당 정치인에게 주어졌고, 대통령의 인기를 위해 멕시코-미국 전쟁을 벌였다고 ‘링컨’이 준열히 의문을 제기했을 때도 그 전쟁의 기원에 대해 섣불리 발언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사람이었음(p194). ‘헌던’의 회고에 따르면, ‘링컨’은 자신이 탐내던 직책에서 탈락했다는 걸 알게 되자 “출세하겠다는 희망을 버렸다.” 그때 ‘링컨’이 토로한 감정은 중년으로 넘어가는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반복되는 푸념이 되었으며, “너무 힘들다. 이 땅에서 결코 살지 않았던 것처럼 죽어 이 땅을 떠나야 한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세월이 지나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때의 감정이 여전히 강렬히 남았던지 ‘링컨’은 “내 삶에서 그때만큼 낙담한 때는 없었다.”고 말했음(p194). ⑩‘링컨’이 연방 하원의원으로 재임한 2년은 짧기도 했지만 불운하기도 했는데, 그 이후의 5년은 흔히 공적인 삶에서 완전히 물러난 시기로 묘사되며, ‘링컨’은 이때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에 의혹을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여느 때보다 열심히 변호사로 활동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음(p195). 이 시기는 결코 수동적으로 보낸 시간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또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크게 성장한 시기였으며, 실제로 그 시기에 ‘링컨’은 변호사로서 입지를 굳혔고, 미국을 괴롭히기 시작한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리더’로 올라섰음(p195).
● 비평 및 토론
필자는 ‘링컨’의 하원 시절의 휘그당에서의 활동을 개략적으로 그리며, 그가 연설에서 탁월하였음을 잘 그리고 있음. 또한 ‘링컨’이 노예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과 계기를 다루고 있음. 그렇다면 ‘위기’가 ‘리더’의 성장 기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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