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26-12강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29(에이브러햄 링컨, 신뢰의 리더십)

presentlee 2026. 3. 22. 00:35

https://youtu.be/l2XGYuIH_no?si=KfgNl0GnTE2yYWY4

 

[하우스리더십학교]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29(26-열둘째주)

#리더십 #도리스컨스굿윈 #에이브러햄링컨 #여의도하우스 #하우스카페 #하우스처치 #하우스리더십학교

www.youtube.com

HouseLeadership School

 

Leadership : in Tubulent Times(도리스 컨스 굿윈)

□ 요약(제3-1부 리더와 시대 6. 에이브러햄 링컨_상호존중․균형의 리더십)


① [상호 존경과 존엄의 기준을 세우고, 분노를 조절하라] 어느 날 저녁, ‘스탠턴’이 격분해 한 장군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걸 ‘링컨’이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스탠턴’이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라고 변명하자, ‘링컨’은 “그런 생각을 편지로 써서 질책하면 어떻습니까?”라고 제안했고, ‘스탠턴’이 편지를 쓴 후 ‘링컨’에게 읽어주었는데, 그러자 ‘링컨’이 말했음(p395). “멋진 편지입니다! 스탠턴 장관, 이제 그 편지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탠턴’은 “물론 보내야지요!”라고 답했고, 그러자 ‘링컨’이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십시오.”라고 했고, ‘스탠턴’은 “이 편지를 쓰는 데 이틀이나 걸렸습니다.”라고 의아해했음(p395). ② 그를 보며 ‘링컨’은 이렇게 말했는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지금은 기분이 훨씬 좋아졌고요. 그럼 된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라는 겁니다.” ‘스탠턴’은 잠시 투덜거렸지만 결국 편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음(p395). ‘링컨’은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참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보라고 권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무지막지한 공개적인 공격까지 기꺼이 용서했는데, 남북전쟁 초기에 ‘블레어’가 쓴 비판적인 편지가 수개월 뒤에 예기치 않게 언론에 공개됐을 때, ‘블레어’는 당황해서 그 편지를 백악관에 가져갔고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하지만 ‘링컨’은 그 편지를 읽을 의사가 전혀 없고, 그 때문에 그를 견책하고 싶지도 않다며 “잊어버리십시오. 다시는 언급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라고 말했음(p395). ③ [동료들을 비판으로부터 지켜주라] ‘웰스’의 회고에 따르면, ‘링컨’은 “내각에 전가되는 잘못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내각의 탓이 아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링컨’이 자신의 결정 때문에 부하가 비난받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쟁성이 충분한 병력을 파견해주지 않아 버지니아 반도에서 패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매클렐런’ 장군의 주장에 ‘링컨’이 ‘스탠턴’을 공개적으로 보호하고 나선 사례에서 잘 설명됨(p396). ‘매클렐런’의 주장이 있은 후, ‘스탠턴’에 대한 적대적인 공격이 뒤따랐고 급기야 그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그때 ‘링컨’은 신문에 대대적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극적인 뉴스거리를 제공하려고, 모든 정부 부서에게 정각 1시에 업무를 중단하고 의사당 앞 계단에서 예정된 합중국 단합대회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내렸음(p396). ④예포가 터지고, 해병대 군악대의 애국적인 노래가 연주된 후, ‘링컨’은 ‘매클렐런’의 비난을 직접적으로 반박했는데, ‘링컨’은 ‘매클랠런’ 장군을 지원하려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보냈다며, “전쟁성 장관이 더 이상 보낼 수 없는 것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음(p396).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고, ‘링컨’은 “‘스탠턴’은 대담하고 유능한 장관입니다. 내가 여기에 선 이유는 전쟁성 장관에게 가해진 모든 비난이 내가 떠안을 책임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정의를 추구한다면 당연히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요.”라고 덧붙였음(p396). ⑤사면초가에 빠진 장관을 ‘링컨’이 용기 있게 보호하고 나서자, ‘스탠턴’에 대한 비난은 서서히 수그러들었는데, 결국 내각의 모든 국무위원에게 영감과 용기를 북돋워 주며 그들을 변화시킨 것은 ‘링컨’의 성품-일관된 세심함, 인내심과 신중함, 공감 능력-이었으며, 이런 ‘팀 리더십’을 본보기로 한다면, 위대한 선함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음(p397). ‘링컨’은 이처럼 겉으로는 온유하고 친절했지만, 내심에서는 복합적이고 야심적이었으며 계획적이고 확고한 ‘리더’였는데, 국무위원들은 개인적인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링컨’을 비판하고 조롱했음(p397). ⑥또 ‘링컨’을 자극하며 화나게 만들었고, 끝없는 압력을 가했는데, 하지만 그들이 각자의 책무를 열정적이고 능숙하게 해내는 한, 또 ‘링컨’이 결정한 방향을 지향하며 중요할 때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한 모든 것이 용납됐음(p397). 1862년 9월 22일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공포했을 때 그들이 보여준 공동 전선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노예 해방 선언이 9월에 공포된 이후 1863년 1월 1일 발효될 때까지의 100일은 ‘링컨’의 내각을 시험하는 시간이었으며, 그 힘든 시각을 링컨은 어떻게 무사히 견뎌냈을까?(p397) ⑦ [칭찬이나 비난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라] 노예 해방 선언이 공포되고 사흘 후에 ‘해니벌 햄린’(Hannibal Hamlin)은 ‘링컨’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예 해방 선언이 뜨겁게 환영받고 유지될 것”이며 “이 시대의 위대한 선언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자신있게 예측했는데, 하지만 ‘링컨’은 무척 현실적이어서 즉각적인 반응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그는 ‘햄린’ 부통령에게 “신문과 저명한 인사들의 찬사는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나 바라는 겁니다. 주가가 떨어졌고 군대의 전진도 예전보다 느려졌습니다. 겉으로는 괜찮게 보이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음(p398). 중간 선거를 위해 투표장으로 향하는 유권자들은 불만이 팽배했는데, 뉴욕의 일기 작가, ‘조지 템플턴 스트롱’은 “반란을 진압하려는 전쟁이 시들해지고 있다.”고 한탄했으며, 앤티텀 전투에서 거둔 성과에 크게 만족한 ‘매클렐런’ 장군은 퇴각하던 남군을 추적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리’는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로 피신할 수 있었음(p398). ⑧게다가 ‘매클렐런’은 노예 해방 선언 같은 ‘가증스런 신조’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피력하며 군대의 진격을 고집스레 거부했는데, 그 행위는 노골적인 불복종에 가까웠고, 유권자들은 전쟁을 더 가열하게 추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를 비판했음(p398). 이런 지각은 노예 해방 선언에 대한 보수파의 분노와 결합되었고, ‘몽고메리 블레어’가 예측했듯 선거는 공화당의 참패로 끝났는데, ‘링컨’의 개인 비서, ‘존 니콜라이’(John Nicolay)의 표현대로 “우리는 거의 모든 의석을 잃었다.” 연방 의회에서, 노예 해방 선언에 반대한 보수적인 민주당의 의석수가 두배로 증가한 까닭에 공화당은 겨우 다수당을 유지할 수 있었고, 오하이오와 인디애나, 펜실베니아와 뉴욕의 주의회에서는 민주당이 압도적인 다수당이 됐음(p398). ⑨공화당의 패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링컨’은 조크로 우울함을 태워버렸는데, “켄터키 소년이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려고 달려가다가 발가락을 다친 기분이라고 할까요? 다 커서 울지는 못하겠고, 웃기에는 너무 아프고요.”(p399) [압박에 대처하고, 균형감을 유지하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을 찾아내라] 언론인 ‘노아 브룩스’(Noah Brooks)는 “이번 계절의 이른바 휴일들은 침울하기 그지 없었다. 도시는 부상하고 죽어가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행방불명되고 부상한 친척들을 찾아 헤매는 북부의 많은 주민으로 호텔이 북적댔다.”고 말했는데, 중간 선거 이후, ‘링컨’은 오랜 망설임 끝에 ‘매클렌런’의 후임으로 ‘싸우는 장군’으로 알려진 ‘앰브로즈 번사이드’(Ambrose Burnside)를 선택했고, 기질이 ‘매클렐런’과 완전히 다른 장군으로 바꾼 셈이었음(p399). ⑩하지만 ‘번사이드’의 저돌적인 기질은 결국 재앙을 부르고 말았는데, 12월 중순, ‘번사이드’는 ‘링컨’의 충고를 무시하고 포토맥 군을 버지니아 프레더릭버그의 ‘살육장’(slaughter pen)으로 잘못 인도하는 실수를 범했고, 그 결과로 1만 3,000명의 북군이 전사하거나 부상했음(p399). 무지막지한 비난이 ‘링컨’에게 쏟아졌고, 프레더릭스버그에서의 굴욕적인 패전에 영국과 프랑스가 남부 연합의 편에 섰고, 내각 전체가 사임하고 ‘링컨’도 ‘해니벌 햄린’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줄 거란 소문까지 퍼졌는데, 죽음과 국상(國喪)의 연속에 전쟁이 불명예스러운 재앙으로 끝날 것이란 두려움, 결국 남부 연합이 독립하고 노예제도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란 두려움이 팽배했으며, ‘링컨’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음(p400).
● 비평
 필자는 노예해방선언 이후 발효시 까지 100일의 기간 동안 ‘링컨’이 겪은 위기의 상황들을 잘 묘사하고, ‘리더십’의 어려움을 프레더릭스버그를 통해 잘 보여줌
● 토론
 전투의 실패와 선거의 패배 등 여러 악재들 속에서 ‘링컨’이 ‘리더십’을 지켜내고, 어려움을 통과해 낼 수 있었던 비결(요소)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 요약(제3-1부 리더와 시대 7. 에이브러햄 링컨_위기극복의 리더십)


① 남북전쟁 중 북군 장군으로 ‘링컨’이 새로 임명한 ‘번사이드’가 북군을 ‘프레더릭스버그’로 몰아 넣어 1만 2천명이 사상을 입은 후 ‘링컨’은 병사들의 처참한 죽음에 고통을 받았고, 그들은 “피와 목숨으로 조국의 미래 행복과 번영을 구하려던 용맹한 사람들”이었는데, ‘링컨’은 “삶의 과정에서 어느 때보다 혼돈한 겨울에 깊은 우울”에 빠졌으며, 삶의 우여곡절을 고려하면, 실로 섬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을 정도로 ‘링컨’은 “지옥보다 더 나쁜 곳이 있다면 내가 지금 있는 곳이다.”라고 말했음(p400).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링컨’은 어떤 전략을 사용했을까? 그 기나긴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를 무사히 견뎌낼 정도의 안정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을까? ②안정이 드러나는 형태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만큼이나 각양각색이며, ‘링컨’은 엄청난 압박에 시달릴 때 연극 관람으로 한숨을 돌리며 활력을 되찾았고,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4년 동안, ‘링컨’은 100번 이상 극장을 찾았는데, 가스등이 희미해지고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서면, ‘링컨’은 “완전히 다른 경로의 생각”에 몰입할 수 있었음(p400). ‘링컨’과 함께 연극을 관람한 한 친구가 말했듯이, <헨리 4세 제1부>의 공연을 보며 “그는 전쟁을 까맣게 잊었다. 의회도 잊었다. 정치에서도 떠났다. 그는 완전히 ‘할’ 왕자(헨리 5세의 젊은 시절)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p401). ③‘링컨’은 극장을 자주 찾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은 끔찍한 불안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에 짓눌려 죽을 것 같다.”고 솔직히 말했고, 하지만 연극 관람이 현실 도피는 아니었는데, 머리를 식히며 휴식하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링컨’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연극-<멕베스>, <리어왕>, <햄릿>-에 끌렸고, 이를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독하기 위한 출구이자 입구로 삼았음(p401). 언젠가 ‘링컨’이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공연되느냐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와 함께하는 생각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했듯이,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리더’에게 ‘셰익스피어’의 철학적 깊이가 유의미한 깨달음을 주었던 것임(p401). ④‘링컨’은 악몽 같은 나날과 대통령이란 외로운 지위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때도 많았는데, 그런 밤이면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 손때가 묻은 ‘셰익스피어’를 쥔 채 백악관의 작은 방에 들어가 젊은 개인 비서 ‘존 헤이’와 ‘존 니콜라이’를 깨웠고, 그러고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미고 흉내를 잘 내는 공연자로서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셰익스피어’에서 좋아하는 희극적인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음(p401). ‘링컨’이 ‘셰익스피어’의 비극 공연에 공감한 성향은, 우스꽝스럽고 풍자적인 이야기를 좋아한 성향과 맞아떨어졌으며, 비극과 희극의 백지장 같은 차이가 ‘링컨’에게 ‘문학적 기분 전환’(Literary recreation)을 준 것인데, 화가 ‘카펜터’의 표현을 빌리면, ‘링컨’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터트리는 호탕한 웃음은 “야생마의 울음소리”와 비슷했고, 한 친구는 ‘링컨’에게 웃음은 구면구(救命具) 역할을 했다고 결론지었음(p402). ⑤‘존 헤이’도 “그가 세심한 관찰력으로 내 무거운 눈꺼풀을 눈치챈 경우에만 ‘셰익스피어’ 낭송을 중단하고 나를 잠자리로 보냈다.”고 회생했고, ‘낭송’은 ‘링컨’이 힘들고 외로운 시기에 인간애를 공유하는 방법이었음(p402). 그가 내린 명령의 결과로 하루하루 병사들이 죽어가던 때, 홀로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링컨’은 용서하는 힘을 통해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냈고, 전쟁성 장관과 군장교들은 군율을 유지하기 위해 탈영하거나 보초 근무 중 잠든 병사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링컨’은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를 찾아내려 애썼음(p402). ⑥‘링컨’은 사형 청원서를 읽을 때마다 병사의 관점-향수병에 걸리고 의지력을 넘어서는 두려움에 짓눌린 십대 병사의 야간 탈영, 피곤에 지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잠들어버리는 보초 근무-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음(p402). 감형의 이유를 찾아내면 “내 이름을 서명하여 그 병사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즐겁게 해준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다.”라고 말했고, 잠깐이나마 씁쓰레한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생명을 구원했다는 즐거움을 누렸던 것임(p402). ⑦ [약속을 지켜라] 1863년 1월 1일이 다가오자,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을 새해 첫날부터 발효하겠다는 9월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전반적인 의혹”이 국민 사이에 감돌았다. 평론가들은 선언문이 법제화되면 남부에서는 인종 전쟁이 일어나고, 북군 장교들은 지휘권을 포기할 것이며, 10만 명의 병사가 지체 없이 무기를 내려놓을 것이라 예측했다. 게다가 공화당원과 합중국을 지지하는 민주당원을 묶어두던 불안정한 연대마저 균열될 위험이 있다고도 경고했다. ‘조지 템플턴 스트롱’도 “‘링컨’이 강단 있게 그 위기를 헤쳐 나갈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고는 “누구도 모른다!”고 덧붙였음(p403). ‘에이브러햄 링컨’을 잘 알던 사람이라면 그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는 약속을 지키는 걸 명예의 문제이며,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중요한 보석’이라 생각했음(p403).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으로 극도의 스트레스 가운데 있을 때, 그 상황을 정서적, 감정적으로 <연극>이란 도구를 통하여 해결하였음을 잘 설명하고 있음. 이와같이 ‘리더십’이 스트레스와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


□ 요약(제3-1부 리더와 시대 8. 에이브러햄 링컨_신뢰의 리더십)


①‘메리 토트’와의 약혼을 파기했을 때, 또 공공사업을 통해 일리노이주에 경제 번영을 가져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링컨’은 생명을 위협받는 우울증을 겪었고, 약속과 결심을 실천하는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비로소 우울증을 딛고 일어나 정치인으로 부활할 수 있었음(p403). 그 이후 가장(家長)으로서, 또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서 그는 항상 깊이 심사숙고한 후에야 개인 의견을 피력하거나 약속했으며, 따라서 그가 자신과 창조주 신과 맺은 9월의 약속을 지킬 것이란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는데, 실제로 ‘링컨’은 매사추세츠 출신의 한 의원에게 “나는 이미 약속했습니다. 따라서 그 약속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음(p404). ②노예폐지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가 노예 해방 선언의 발표를 연기한 ‘링컨’을 매몰차게 비판했지만, ‘링컨’이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성품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지 “‘에이브러햄 링컨’이 굼뜨게 행동하는 것일 수 있지만, 공식적으로 서명하고 엄숙하게 선언한 약속과 목표를 재고하거나 철회할 사람은 아니다.”라고 썼음(p404). 또 ‘링컨’이 재고하지 않을까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단호히 “아니다!”라고 대답하며 “‘에이브러햄 링컨’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링컨’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약속을 믿으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음(p404). ③백악관은 새해 첫날 연회를 열어 일반 대중을 초대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1863년의 첫날에도 그 행사를 위해 백악관 문이 정오에 열렸고, 세 시간 동안 ‘링컨’은 백악관 2층에 있는 접견실, 블루 룸(Blue Room)에서 “잔잔하고 평온한 미소를 띠고” 1,000명이 넘는 시민과 악수를 나누었음(p404). 하지만 한 기자는 “그의 두 눈은 생각으로 가득했고, 정신은 딴 곳에 있었다.”라고 보도했는데, 그날 오후 늦게 ‘링컨’은 해방 선언문에 서명할 예정이었고, 하루 전,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문을 최종적으로 점검할 목적으로 세 번째로 내각을 소집했으며, 그날 ‘링컨’이 제시한 선언문은 하나의 중대한 점에서 9월의 원고와 달랐음(p405). ④수개월 전부터 노예폐지론자들은 흑인을 군대에 징집하라고 주장하던 터였으며, ‘링컨’은 그런 급진적인 조치를 시기상조라고 생각했고, 그런 조치가 취해지면 그렇잖아도 불안정한 연대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망설였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때가 됐다고 판단해, 의회에 “과거의 고요함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현재에는 맞지 않다. 현재 상황이 새롭다면 우리는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의견을 전달했음(p405). 군대가 흑인 징집을 시작할 거라는 새로운 조항이 해방 선언문에 덧붙여졌고, ‘새면 체이스’ 장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인류의 이해심 많은 판단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란 구절로 선언문은 마무리됐는데, 간단히 치러진 서명식에는 ‘수어드’ 국무장관과 그의 아들 ‘프레드’를 포함해 12명만 참석했음(p405). ⑤‘프레드 수어드’의 기억에 따르면, 선언문이 ‘링컨’ 대통령 앞에 놓여 있었고, ‘링컨’은 펜을 잉크병에 살짝 담근 후 선언문 위에 손을 멈추고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곧이어 단호한 어조로 말했는데, “내 평생 지금 이 선언문에 서명하려는 순간처럼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 적이 없습니다. 내 이름이 역사에 전해진다면 이 서명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서명에 내 모든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p405). 하지만 그의 팔은 뻣뻣해지고 감각을 잃은 듯 흔들리고 떨렸으며, “이 서명은 훗날 면밀히 조사될 겁니다. 내 손이 흔들린 흔적이 발견되면 ‘‘링컨’이 주저했군.‘이란 말이 나오겠지요.” 그래서 ’링컨‘은 몇 분을 기다린 뒤에야 펜을 잡고 “여느 때보다 대담하고 명확하고 단호한” 필체로 서명을 했음(p405). ⑥뉴잉글랜드 전역에서 이른 아침부터 교회와 공화당과 극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문에 서명했다는 소식을 손꼽아 기다렸으며, 보스턴의 트레몬트 템플(Tremont Temple, 1806년에 세워진 침례교회 예배당으로 미국에서 현존하는 흑인 교회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음)과 근처 음악당에서는 밤을 하얗게 새울 각오로 6,000명 이상이 모였음(p406). ‘프레더릭 더글러스’, ‘랠프 월도 애머슨’, ‘해리엇 비처 스토’, ‘올리버 웬들 홈스’를 비롯한 여러 연설가의 웅변이 이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이 고조됐는데, 오후 10시가 다가와도 아무런 소식이 들여오지 않자 “뚜렷한 그림자”(visible shadow)가 군중에게 드리워졌음(p406). ⑦마침내 한 남자가 군중을 헤집고 달려왔고, “왔습니다! 전보가 막 도착했습니다!” ‘더글러스’는 당시의 “격하고 웅대한” 반응을 이렇게 묘사했는데, “기쁨과 환희”, “오열과 눈물”이 있었고 찬송과 노래가 이어졌으며, <글로리 할렐루야>, <올드 존 브라운>. 새벽 첫 햇살이 열릴 때까지 그들은 하나가 되어 노래하고 찬송했음(p406). 노예 해방 선언에 뉴잉글랜드는 환희로 답했지만, 경계주, 더 나아가 대부분의 북부는 그렇지 않았는데, 앤티덤에서의 작은 승리가 해방 선언에 대한 반발을 억눌렀지만, 프레더릭버그에서의 굴욕적인 패전과 뒤이은 교착 상태로 분노의 불길이 크게 타올랐음(p406). ⑧‘제임스 로빈스’(James Robinson) 켄터키 주지사는 취임 연설에서 주의회에 해방 선언을 거부하라고 권고하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남부 연합을 “결코 꺼지지 않는 증오의 불덩어리”로 단합시킬 것이라는 경고까지 더했고, 인디애나와 일리노이에서도 민주당이 우세한 주의회가 남부 연합과 평화로운 타협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노예제도를 건드리지 말라고 요구했음(p407). 뉴잉글랜드에게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며 노예제도를 용납하는 국가에 살고 싶지 않으면, 분리해 독립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연방의회에서는 ‘코퍼헤드’ (Copperhead, 남북전쟁 당시 남부를 동정한 북부인)로 알려진 민주당 평화주의자(Peace Democrat)들이 선언문 발표 초기의 활력이 크게 꺾인 틈을 기회로 삼아 새로운 징집법을 반대했고, 심지어 병사들에게 탈영하라고 공개적으로 부추기기도 했음(p407). ⑨확증되지는 않았지만 야전군의 보고에서도 노예 해방 선언이 병사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했는데, 많은 병사가 흑인이 아니라 북군을 위해 싸우겠다고 서명한 것이라며 정부에 속았다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었음(p407).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링컨’의 선거운동을 주관했고, 당시 연방대법원 판사이던 ‘데이비드 데이비스’(David Davis)도 오랜 친구, ‘링컨’에게 “사태의 걱정스런 상황”에 대한 염려를 전달했는데, ‘데이비스’는 오직 하나의 방법만이 미국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링컨’에게 “노예 해방 정책을 수정하고, 그 정책을 잘못 지지한 내각을 재구성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링컨’은 그런 패배주의적인 조언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 정책은 “확정된 것”이라 대답했음(p407). ⑩또 다른 친구, 연방 상원의원 ‘오빌 브라우닝’(Orville Browning)도 북부가 타협을 외치며 민주당으로 뭉치고 있다는 소문을 전달했지만, ‘링컨’은 “민주당이 노예 해방에서 양보를 지향하면 결국 마음이 민주당을 떠날 것”이라 예측했고, 노예 해방이 북군을 분열시킬 것이라 걱정하지 않았으며, 또 군의 사기가 흔들리며 노예 해방에 대한 긴장이 심화된 것을 인정했고, 탈영이 증가할 가능성도 인정했지만 “그 숫자가 실질적으로 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음(p408). 오히려 노예 해방의 결과로 자원입대하려는 지원병이 탈영병을 보완하고도 남을 것이라 확신하며, ‘링컨’은 해방 선언문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목적을 재정립하기에 적합한 때가 됐다고 확언했음(p408). ⑪ [기다려야 할 때와 전진할 때를 알아라] “노예 해방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 순간을 보게 되겠지만, 노예 해방을 방해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 압도될 것이다.” ‘링컨’은 이렇게 말하며 노예 해방의 시간이 가차 없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확신했고, 또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사건을 통제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건이 나를 통제했다.”고 말했음(p408). 노예 해방은 ‘링컨’이 대통령이란 지위를 초월하는 사건에 휩쓸려 지향했더라도, 노예 해방 선언의 시간은 거의 전적으로 그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었음(p408).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준비하고 예비 선언을 하며, 그 결과 미국 내에서 일어난 여러 갈등들과 그것을 극복해 내는 ‘링컨’의 ‘리더십’적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음. 단호하며, 결단력있는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

혼돈의시대리더십(도리스컨스굿윈)_26하우스(이현재)_에이브러햄링컨_노예해방선언후리더십.hwp
0.0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