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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4부 거래적 리더십, 제5부 함의들-이론과 실제
□ 요약(제14-11장 행정리더십 : 링컨, 테어도어루즈벨트, 프랭클린루스벨트)
①거래의 장에서 흥정하고 협상의 가정들을 수용하며 제한된 투쟁의 일부로서 미리 화해에 동의하는 과정을 통해, 대통령은 수적인 면에서나 중요성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를 엄청나게 좁혀버림(p643). ‘카터’는 가장 최근의 예인데, 대통령은 자신이 참여하는 협상과 같은 맥락에서만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게임의 규칙이나 가정을 변화시킬 수 없고, 한 가지 종류의 이슈에서 완전히 새로운 혹은 재정의된 이슈로 논쟁의 대상을 바꿀 수도 없으며, 또는 이해관계를 끝없이 확대하여 국가적 이슈, 광범위한 대중적 선택, 그리고 거래할 공공투쟁의 수준까지 투쟁을 거래의 장 밖으로 끌어올릴 수도 없는 것임. 대통령이 ‘행정 리더’로 효과성이 있느냐의 문제는 사실상 대통령의 효과성 정의의 문제로 도덕적, 실질적 가치 기준에 의해 측정되는데, 이를 몇몇 현대 대통령제를 토대로 살펴봄(p643). ②몇 가지 점에서 최초의 현대적 대통령은 ‘링컨’이었는데, 그는 인력과 자원을 사회적, 경제적으로 동원해야 했던 급박한 시민전쟁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광범위한 권력을 행사하여 정부내에서 중앙집권을 이끌어냄(p643). ‘링컨’ 행정부는 미국 행정력 행사에서 최고 수준이었으며, 그는 여러 달 의회를 회기로 불러 들이지도 않은 채 통치했고, 또한 법에서 규정한 한도를 넘어 육‧해군의 규모를 키웠으며, 반란군내 노예들이 해방되었음을 선언하고, 국법을 포고했으며, 인신보호영장 발행을 유예시켰으며, 의회의 승인 없이 수백만 달러를 사용함(p643). ③‘링컨’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휘그당식의 낡은 관점-대통령의 전권 확대에 반대하는-에서 완전히 실용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인 태도로 행동했음(p644). 또한 전쟁 초기에 노예제도를 보는 그의 태도는 기회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것이었는데, ‘링컨’은 분리된 주들의 노예제도에 개입하려고 전쟁을 벌이는 것은 아니라고 밝혀 탈퇴한 주들이 연방에 재편입하도록 했으며, 그는 다른 지역에서 미국 흑인의 식민화를 찬성함. 노예해방을 선언한 것은 아마도 도덕적 이유만큼 당면한 군사적, 실질적인 목적 때문이었을 것임(p644). ④무엇보다도 ‘링컨’은 각 주들의 권리를 계속해서 보호해 주었는데, ‘링컨’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노예론 폐지론자들과 찬성론자들, 의회내 급진파들과 보수파들 사이에서 놀랍도록 균형잡힌 행동을 취한 것은 비난할 수 없을 것인데, 그러나 그의 사후에 남북전쟁의 도덕적 문제가 전쟁 종식 후 매우 실질적 문제, 즉 재건 문제로 인해 대가를 치러야 했음(p644). 여기서 ‘링컨’의 기능주의는 몰락해 버리는데, 군사적 필요를 침해하지 않으려 그렇게 조심하고 각 주의 권한을 인정해 주었지만, 해방된 자유민에게 국가의 도덕적 합의를 수행한 전후 정책과 관련하여 실패한 ‘리더’인 ‘링컨’에게서 확고한 지침을 받지 못한 채 북군은 전쟁을 종식키켰으며, 각 주들의 권리와 온건함, 타협 때문에 자유민들에게 돌아갈 토지, 투표권, 자녀 교육을 보장할 연방법은 마련되지 못하였은데, 아마도 ‘링컨’은 바로 자신이 조성한 여건 속에서 자신의 선택권이 얼마나 철저하게 제한되었는지 깨달았을 것임(p644). ⑤20세기 들어서야 자신의 행정력을 철저히 이용하고 주저없이 사실을 드러낸 또 다른 대통령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루스벨트’로, 그는 “행정력은 헌법에 나타나 있는 제재나 금지 사항으로만 제한되고, 헌법상의 권한하에서 의회에 의해서만 강제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으며, 그렇다고 믿음(p645). “나의 시각으로 모든 행정관료들은 국민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수행하도록 정해진 심부름꾼이며, 손해보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냅킨 속에 감추어 두는 부정적인 이점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나는 권력을 침해한 것이 아니다. 행정력 사용을 엄청나게 확대시켰다.” 그는 미국 정부 체계의 효율성은 “강력한 중앙 행정부”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고, 따라서 그는 어디서든지 행정부를 강화하기 위해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음(p645). ⑥‘테오도르 루즈벨트’는 활동가였지 정부 혁신가는 아니었는데, 그는 견제와 균형 시스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시스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뽑아내기 위해 ‘바보’, ‘얼간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도 흥정을 벌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그는 ‘정치 리더’ 혹은 ‘입법 리더’라기 보다는 본질적으로 ‘행정 리더’였음(p645). 비참한 국내 위기 상황에서 행정부 수반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증명한 것은 ‘루스벨트’의 먼 사촌 ‘프랭클린’이었는데, 최고 정치가인 ‘루즈벨트’는 여론의 잠재적인 힘뿐만 아니라 여론의 미묘함과 복잡성을 감지하고-재빨리 움직이거나 고의로 낮추거나 하는 등의-타이밍 감각을 통해서 정적의 감시를 피할 줄 알았음(p645). ⑦그는 정치적 세부사항까지 주의를 기울이고 집단 파벌을 중재하며 파벌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기술, 반대파 리더를 서열에서 탈락시키는 능력, 자신만의 싸움터를 골라 적이 그 곳에 싸우도록 하는 능력, 그리고 개인적 매력과 정치적 열정의 적절한 배합 등을 갖추고 있어서, 이 모든 자질이 그를 20세기의 가장 효과적인 정치 전술가로 자리매김하게 함(p645). 이런 정치적 자질에는 비정통적이고 고도로 개인화된, 그리고 뛰어난 행정적 방식이 포함되며, ‘루즈벨트’는 행정 수단으로서 공식적, 비공식적 권력을 완전히 활용하여 끊임없이 언쟁하는 야심에 찬 자기의 행정참모들을 통제하였는데, 즉, 목표를 고양시키고 동기를 창출하고 개인적 충성심을 불러일이키면서 부관들에게 최상의 노력을 이끌어냄(p646). ⑧또한 노련한 시간 감각으로 부관들을 안달하면 한없이 기다리고, 때로는 부관들보다 빨리 움직이지만 자신이 겨냥하는 목표물-게으른 기관이나 둔한 관료 등-이 가장 허약한 순간을 기다림(p646). 또 고의적으로 부관들 사이에 일종의 경쟁심과 의지의 충돌이 일어나도록 자극하여 실무상의 에너지와 번득이는 창조력을 불러일으켰으며, 극도록 넓은 “통솔 범위”에 유지하여 주의집중, 격려, 개입 중 적어도 한 가지 태도를 취하였음. 한가지 임무를 여러 명에게 배치하거나 여러 임무를 한 사람에게 할당하거나 함으로써 호소의 장으로, 정보의 보고로, 조정의 도구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였으며, 내각과 같은 집단적인 의사 결정 기구를 무시하고, 그 대신 다른 기구에서 사람들을 뽑아 다양하게 활용함(p646). ⑨대통령의 재량을 넘어서거나 훨씬 못 미친다고 생각되는, 하위 공무원이 맡은 세세한 사안에 몰두하기도 했었는데, 때로는 정보를 거둬들이고 때로는 정보를 흘려서 부관들과 관료들의 의견이 일치하도록 조정함(p646). 셀 수 없는 많은 편지, 쪽지, 소문 등에서 수집하고 부하들로부터 보고 받은 정보들을 자신만의 사적인 장소에 남겨두기도 했는데, 규칙, 관습, 전통이 자신의 필요에 부합할 때는 그 뒤에서 지식을 바탕으로 잠자코 있는 한편, 그렇지 않을 때는 교묘히 피하였고, 항상 설득하고 아첨하고 기만하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고 내각 관료들을 갈아치우며 회유하고 부정 조작을 함(p646). ⑩이런 대단한 기술들이 어떤 가치와 목적에 손상을 입히겠는가? ‘루스벨트’는 윌슨주의 민주당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보편적 믿음 외에는 체계적 프로그램이나 이념을 갖고 있지 않았음(p646). 경제위가라는 극심한 압박을 받으면서 그는 취임 3개월 동안 세 가지의 특별한 목표를 제시했는데, 회생, 구제, 개혁이 그것이었는데, 다수의 개혁 입법을 통해 고용주-노동자, 판매자-소비자, 대기업-중소기업, 농부-중간상인, 투자자- 시설 간의 관계를 장기간에 걸쳐 변화시켰으며, 구제 사업은 실업노동자, 임시 숙소의 농민, 전문가, 모든 종류의 예술가, 사업가 등 모든 종류의 빈곤층에게 혜택을 줌(p647).
● 비평
필자는 ‘링컨’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의 먼 사촌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비교하면서 ‘행정 리더십’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음. 특히 미국의 대통령들이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시킴으로 강한 미국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줌.
● 토의
상기 3명의 미국 대통령의 ‘행정 리더십’의 모습 가운데에서 현 우리나라 현실에 필요한 ‘행정 리더십’의 모습은 누구인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 요약(제14-12장 행정리더십 : 프랭클린 루스벨트, J.F.케네디)
①‘루스벨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국민들이 그에게 전권을 위임한 가장 시급한 목표는 경제회복이었는데, 실업률은 ‘루스벨트’ 첫 임기 동안 어느 정도 감소했으나, 두 번째 임기 동한 급상승함(p647). 실질적인 경기 회복은 2차 대전 발발과 이로 인한 소비물가 수요증가로 이루어졌는데, ‘루스벨트’의 탁월한 전술적 자질은 의심할 여지없이 선택의 폭을 넓혀 주었고, 첫 번째 임기 동안 그의 의회 주재는 대체로 효과적이었으며, 이것은 부분적으로 그의 대단한 인기와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됨(p647). ②‘뉴스타트’가 말한 대로 “모든 영역에서 생동감 넘치는 끈기와 노련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다시 보여줄 준비가 될 때까지 일상적인 혼란의 충격을 이겨낼 것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나중에 다시 이를 증명할 준비를 하는 식”이었다고 함(p647). 1936년의 위대한 재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가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범위의 권력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데, 그는 연방 대심원을 “봉쇄해서” 현대화하려 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의회에서 실패하였으며, 그는 민주당을 활성화하여 개방하려 했으나, 1938년 반뉴딜 정책 후보에 맞서 ‘루스벨트’ 후보를 후원했던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음(p647). ③1938년 그는 의회 선거에서 상․하 양원 모두의 지지를 잃었는데, 두 번째 임기 말에는 국내 정책에서 권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으며, 명성, 자질, 그리고 인기는 이어졌지만,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안정적인 권력 기반이 부족했음(p647). ‘루스벨트’는 대단한 즉흥가였는데, 그는 일상의 모든 사소한 권력을 이용하여 속이고, 얼버무리고, 회피하고, 모든 기회를 움켜잡는 자신의 능력을 솔직하게 자랑함(p647). 마지막에는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고, 적절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찾게 되었는데, 그가 추구하는 근본적 변화는 국가 전체에 걸친 실질적 경제 회복, 못먹고 못입고 집없는 1/3의 사람들의 운명을 근본적․장기적으로 개선해 주는 일, 평등한 기회나 평등한 조건 중 하나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 모두가 뉴딜이 표방하는 바였음(p648). ④‘루스벨트’는 정책 사업이나 이념을 가치없다고 여겼는데, 그는 근본적인 정부 개혁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연방법원이나 예비 선거에서의 개입은 개인적 영향력의 조작을 위해 감행한 모험적 시도였는며, 그는 여전히 자신의 권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음(p648). 일생 동안 그가 민주당이 실용적이고 의지할 수 있는 개방 정당으로 변모하도록 하려는 정당 재조정에 귀착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타고난 즉흥가일지라도 행정력에 뚜렷한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음(p648). ⑤‘윌슨’ 이후 백악관에 들어선 대통령 가운데 ‘J.F.케네디’만큼 대통령의 권한과 책임을 인식한 경우는 없었는데, 이는 그가 “위대한” 대통령들이 권력을 행사해 온 방식을 연구했기 때문이며, 자신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는데 “나는 휘그당원이 아니다”라고 그는 주장하고 싶어했고, 그는 선거운동 당시 이렇게 말한 바 있음(p648). “반응할 뿐만 아니라 행동하고 다시 행동하는 대통령-연구집단 뿐만 아니라 정책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대통령-, 한 페이지의 메모 뿐만 아니라 복잡한 문제를 마스터할 대통령이 되고 싶다. 나는 말 그대로 모든 의미에서 행정 수반이 대통령이 되고 싶다. 즉, 문제에 대응할 때 부관들이 충고하는대로 움직이는 대신 부관들을 지시할 줄 아는 대통령, 일이 제대로 되도록 기꺼이 책임지려 하는, 그래서 일이 올바르게 진행되지 않았을 때 기꺼이 비난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p648). ⑥‘케네디’는 ‘루스벨트’보다 어느 정도는 더 체계적인 일련의 정책을 갖고 있었으나, 위대한 ‘행정 리더’처럼 자신의 행정력을 철저히 활용하려 했음(p648). 문제는 이런 권력이 전적으로 부적합하다는 데 있었는데, ‘케네디’는 ‘루스벨트’처럼 의회에서 영향력도 없었고 여론 조사와 인기몰이를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심지어 아주 사소한 정책 사업을 입법화하는 데도 자신의 정치자원을 소진하는 것 같았으며, 1960년대 민주당은 1930년대보다 훨씬 심한 혼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권한을 과감하게 집행해보려는 그의 열의는 식는 것 같이 보였음(p649). ⑦대통령 측근 보좌관이었던 ‘테오도르 소렌슨’이 쓴 책은 ‘케네디’ 재임 3년째 출판되었고, ‘케네디’ 자신이 서문을 쓴 것으로 당시 대통령의 침체된 기분을 잘 나타내 준 것으로 보임(p649). 대통령의 권위는 ‘케네디’의 권위만큼 대단하지 않았으며, 그의 정치 자원은 돈이건 사람이건 시간이건 신용이건 지지이건 모두 신통치 않아 보임. 일부에서는 왜 ‘케네디’가 궁지에 몰린 것과 다름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더 대담하고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지 궁금해 함(p649).
● 비평
필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케네디’의 예를 설명하면서, ‘행정 리더’의 활동의 여지가 결코 크지 않으며, 일반인이 바라보는 것처럼 권위와 권력을 마음껏 행사하기 보다는 다양한 한계 조건들에 걸려서 제대로 일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 쉬움을 실례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됨.
● 토의
우리의 정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과 능력에 대해 과신하거나 오해한 부분은 없는지? 만약 우리 정치 현실 속에서도 ‘행정부’의 권한이 약해져 있다면, 대통령제에 걸맞게 행정력을 강화시킬 방법은?
□ 요약(제14-13장 행정리더십 : J.F.케네디, 닉슨 행정부)
①‘케네디’는 1962년 의회 선거 때 민주당원을 돕기 위해 개입하지 않았고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아첨, 협박, 뇌물 등을 이용했지만, 자신이 운영해야 하는 체제 자체를 고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부분적으로 케네디 자신의 큰 기회가 1964년 선거에서 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임(p649). 이때쯤이면 의회 다수 의석을 민주당이 차지하여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는데 충분하므로 정부 개혁은 최소화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임. 그렇지만 ‘케네디’가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 것은 아마도 지적인 이유에서일 것인데, 즉, 대부분의 대통령들이 그렇듯이 필요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 자신의 행정력에서 충분히 영향력을 추출해 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임(p649). ②그는 실패할 수도 있지만, 의회에서 제안할지도 모르는 개혁을 감히 시도하지 않은 것이며, 또한 어쩌면 기질적으로 그 일을 해낼 능력이 없었거나, 지적으로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임(p650). ‘소렌슨’에 따르면, ‘케네디’는 “위대한 혁신이 우매한 다수에게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제퍼슨의 명언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좀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었을지에 대한 가능성은 암살로 인해 사라짐(p650). ③‘닉슨’ 행정부는 ‘행정 리더’로서의 역할에 대한 믿을 만한 시각을 주기에는 지나치게 최근인데, 일시적으로 판단했을 때 ‘닉슨’은 극적이며 모방적인 권력과 전임 대통령에게 의존하는 ‘리더’에 해당함(p650). 상․하 양원에서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상황에서 ‘닉슨’은 ‘도덕적 리더’이기 보다는 거래와 흥정에 의존했으며, 대부분 민주당 전임자들에 의해 임명된 연방 사법부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상황에서, 그는 이념적 균형을 위해 보수파를 공석에 앉혔으나 ‘닉슨’이 임명한 판사들은 모두 닉슨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음(p650). ④숫자상으로 상당히 축소된 민주당만큼 조직과 규모가 쇠락한 공화당을 주재하면서, 그는 전체적으로 공화당(COP)을 무시하고 수 년 동안 구축해온 자신만의 사조직을 기반으로 공직을 유지함(p650). ‘루스벨트’가 최고의 회유가였다면 ‘닉슨’은 완전환 기회주의자였는데, 이념적 입장도 수시로 변하고 이전의 입장을 반복하고 대선 당선을 위해 수 억 달러의 자금을 모금했고 민주당을 사보타지하고 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포화가 계속되는 동안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경제적 규제를 단호히 반대했다가 채택하기도 함(p650). ⑤결과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행정부의 내부 휴강 상태를 가져 영향력을 축소하여 실권을 만회하려는 절박한 노력을 했는데,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음(p650). 이리하여 행정력의 딜레마가 남게 되는데, 스스로 명성, 선택,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행정부 수반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자신을 위해 권력을 보존하는 것과 더욱 광범위한 목표를 위해 권력을 확대시키는 것을 어떻게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가? 기회주의나 편법을 전략으로 삼는다면 위대한 목적을 좇아 부귀나 명성을 희생하는 대신 ‘윌슨’처럼 기만에 굴복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겠는가?(p651). ⑥더욱 엄숙한 질문이 남는데, 대통령이 ‘행정 리더’로서 자신의 협소한 권력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인다면 그리고 광범위한 입법 혹은 정당 관련 자원이 부족하다면 결국 그는 자신의 선택과 기회를 넓힐 능력보다는 제약된 선택들 중 하나를 고르게 되는 위치에 놓이지 않을까?(p651). 대통령도 의회도 문제에 정면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문제들이 미결로 남아있다면 국내나 국외에서(그리고 경제, 정치, 세계안정 혹은 국가적․도덕적 측면 등에서) 위기가 닥치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행정 리더십’과 이를 창출하는 궁극적인 메커니즘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부가 위기에 빠진다면 민주 사회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을 것인가?(p651). ⑦유럽과 미국의 경험이 함축하는 바는 명확하게, ‘행정 리더십’은 자체로 지속적이고 계획적인 사회 개혁에는 부적합하며, ‘행정 리더십’은 특정의 제한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효과적이며 위기 상황에 없어서는 안됨(p651). 하지만 ‘행정 리더십’의 구조 내에서 방향성과 통제력 상실, 서로 갈등하는 책임․동기․목표들이 주는 계속적인 중압감, 집행 과정에 내제된 한계점들, 시스템 외부에서 이념적, 정치적 자원들을 동원할 수 없는 리더의 무능과 결합된 대부분의 행정 시스템에 얽힌 제한된 시간, 이 모든 것들이 ‘행정 리더’에게 장애 요인이 됨(p651). ⑧뉴딜은 1933년 ‘루스벨트’가 ‘행정 리더십’을 확고하게 보여주었던 ‘백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1935년의 ‘두번째 백일’에서 나왔는데, 그 기간은 지적인 불안과 정치적 행동, 그리고 입법 및 행정적 정책 결정의 기간이었음(p651).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또한 노동당이 1940년대 후반 영국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창조성, 이념적 불안, 정책 갈등, 그리고 정치 조직화, 특히 정당 형성을 수십년간 거친 결과였는데 ‘행정 리더십’이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권력과 원칙에 확고히 기반하고 있어야 함(p652).
● 비평
필자는 ‘행정 리더십’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로 ‘루스벨트’를 들고 있으며 그의 뉴딜정책이 ‘행정 리더십’의 대표적 행위로 잘 발견하여 제시함.
● 토의
우리의 정치현실 속에서 대통령의 ‘행정 리더십’을 보여준 대표적인 행위가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는지? ‘행정 리더십’을 위해 전제해야 하는 것은?
□ 요약(제15-1장 결정과 변화 : 모택동-문화혁명)
①홍위병 완장을 두른 ‘모택동’은 1966년 8월 중순에 북경 천안문 광장의 대집회에서 100만 홍위병들을 환영하였으며, 여덟 차례의 열광적인 대집회 중 첫 번째 집회였던 이 기간에 그는 수도순례를 온 천만 이상의 젊은 혁명주의자들에게 자신이 직접 축사를 함(p655). 연중 끊이지 않았던 항의의 상징과 수단이었던 대형 포스터가 중국 전역에 걸쳐 수백 군데의 공공장소 벽에 활기차게 붙여져 있었으며, 이것은 당에 침입한 ‘주자파’(capitalist roaders)를 공개적으로 응징하고 직위해제시켰던 당시 시위의 배경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임(p655). ②이어서 홍위병들은 수개월 동안 수백만 명씩 무료로 기차를 타고, 전국토를 횡단하면서 경험을 교환하였으며, 공동의 행동노선을 계획하고 수행하기 위한 연락위원회를 만들었음(p655). 그해 말경에, ‘모택동’은 ‘문화혁명’(Cultural Revolution)의 영역을 공식적을 확장하여 산업과 농업부문을 포함시켰으며, 그는 노동자와 농민을 동시에 고무하여 ‘혁명을 장악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킬’ 것을 촉구하였는데, 그렇게 하여 다시 한 번 대중행동을 확장하는 한편 동시에 억제하는 미묘한 입장을 취하였고, 농민 대중은 군인으로서 가담하였다는 정도 외에는 여전히 문화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였음(p656). ③그러나, ‘혁명의 역군들’(revolutionary rebels)로 자칭하였던 도시 노동자들은 그해 초에 자발적인 항의를 개시하여 곧 혁명적 봉기의 전위대가 되었으며, 교육수준이 높았던 상당수 젊은 노동자들의 동기는 학생들의 동기와 대체로 유사하였음(p656). 이들 두 집단 모두 매우 투쟁적이었는데, 이 두 집단은 공장관리자들에게 체질화되었다고 보는 불평등,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향과 부패에 대항하여 투쟁하였으며, 노동자들의 목표는 평등을 달성하는 것이었으며, 이들의 타깃은 ‘자본주의적’ 동기들을 타도하는 것이었음(p656). ④이러한 격동의 기간에 ‘모택동’과 그의 당 동료들, 그리고 대중조직의 ‘리더’들은 대중운동의 한계를 규정하고 자신들의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새로운 권력구조를 만들었음(p656). 1966년 말에는 ‘모택동’이 혁명을 보다 더 좌익으로 과감하고 신속하게 진행시키려 했던 것이 명백함(p656)
● 비평
필자는 ‘리더십 강의’의 마지막 부분으로 이론과 실제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서 ‘변혁적 리더십’의 대표 인물로 ‘모택동’을 들어 중국정치를 통찰하였음.
● 토의
우리 나라의 정치 현실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그러한 ‘변혁’을 주도할 ‘변혁적 리더십’을 이루어내기 위한 과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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