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제5강)

presentlee 2024. 1. 27. 23:54

https://youtu.be/ZSZqthBHzl4?si=P5WMJRj6OoYwC6cG

House Leadership School 

 

□ 요약(5-4장-미국:건국 리더십의 대변혁:역사상 리더십의 사례-정당)

 

①연방주의자들이 헌법을 쟁취하였으나, 정부를 획득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의 시계 만큼이나 복잡한 동력장치, 지렛대 장치, 균형 장치를 가진 연방정부라는 발명품을 획득한 것임(p122). 이제 이것을 작동시켜 국민들의 요구에 부흥하고 공공의 가치를 수호, 확산시키는 리더십은 가능할까? 연방주의자들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야심가들이 권력분립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권력을 한 대 뭉쳐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려고 모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에 대해 ‘매디슨’은 “페더럴리스트”(The Federalist)에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각 부서를 통활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부서로부터 오는 권리 침해를 저지하는 데에 필요한 “헌법적 수단”을 주고 “개인적 동기부여”를 해 주는 것인데, 야망은 야망으로 저지해야 하며 인간을 통치하는 인간의 정부를 구성하는 것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으며, 정부가 피치자들을 통제할 수 있게 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정부가 그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였음(p123). ②왜 공화제적 정부에서 “국민에 대한 의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매디슨’과 그의 동료들은 정치인의 야망만큼 국민도 믿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들은 국민이 현명하고 사려깊고 절제가 있다고 믿지 못했음(p123). ‘매디슨’은 “만약 다수가 그들의 공통의 이익을 위해 결합한다면 소수의 권리는 위협받게 될 것”라고 적고 있으며, 또한 그는 “사회 자체가 여러 부분들로, 이해관계로, 계층으로 쪼개져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에 따른 다수의 결합으로 인해 개인 또는 소수의 권리가 위험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적었음(p124). 이러한 점에서 ‘제퍼슨’과 ‘매디슨’의 차이가 있음. 인간본성에 관한 제퍼슨의 관점은 부정적이지 않았고, 그는 ‘덕성의 공화국’(republic of virtue)의 가능성을 믿었으며, “무엇보다도 다수의 의지가 항상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원칙”이라고 적었음(p124). ③많은 미국인이 ‘인민 다수’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유’를 열렬히 신봉했으며,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협요소가 정부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임. 그러나, 이러한 믿음에는 커다란 오류가 있었고 이것이 미국인들의 합의를 뒤흔들게 되었는데, 이러한 틀을 선호한 사람들은 독재지배를 두려워한 나머지 ‘진정한 리더십’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p124). 새 헌법에는 징세, 통상의 규제, 화폐 주조, 우편제조, 과학의 촉진과 해군의 유지 등 국가의 ‘일반적 복지’에 대한 국가 사명이 나타나 있는데, 여러 방면에서 잠재적 리더십이 견제받고, 권력이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다면 약한 연합정부가 이러한 과업을 성취하기는 어려울 것임(125).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야심찬 경제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퍼슨’은 ‘해밀턴’이 상공인들을 위한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여 반대하였고, ‘독점의 제한’을 계속적으로 주장함(p124). 그런데 새로운 요구와 새로운 희망과 기대는 국민들도 정부로부터 행동을 요구하였고, 그들의 필요로 하는 것, 희망하는 것은 각기 달랐다는 점에서 ‘매디슨’의 예측이 맞았음(p125). ④표면적으로 1790년은 질서와 화합의 시대가 예정된 것처럼 보였으며, 리더십의 살아있는 상징인 ‘조지 워싱턴’은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주의자와 ‘제퍼슨’이 이끄는 공화주의자 사이에 교묘하게 균형잡인 행정부를 통솔함. 역사가 ‘제임스 로저 샤프’(James Roger Sharp)의 말대로 ‘그 당시 엘리트 집단을 서로 신뢰하는 가운데 신사적으로 의견을 조정할 능력이 있었고, 인본주의적 문명의식을 좇아 공공선을 분별해내고 이를 위한 입법활동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음. 그러나 실상 1790년대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투쟁적이고 분열된 시대였음(p126). ⑤정부 내 ‘해밀턴’과 ‘제퍼슨’은 개인적‧정치적으로 서로를 증오하며, ‘프랑스 혁명’에 대하여 ‘공화주의자’는 지지하였으나, ‘연방주의자’는 경악하였음. 또한 1790년대 중반 양측은 치열한 이념전쟁을 벌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제임스 매디슨’은 놀라운 지적 유연성과 창의성을 다시 한번 발휘하여, 친공화주의 잡지인 “내셔널 가제트”(National Gazette)에 기고한 연속 에세이에서 ‘여론’, 특히 점증하는 ‘당파적 감정’의 ‘역할’을 분석하였음. 즉, 자신의 정당(공화주의)이 “부유층에 좀 더 편향된” 연방주의자들에 대항하는 “국민 정당”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정당’들이 정부의 기본 쟁점들을 둘러싸고 ‘필연적’으로 나뉠 수 밖에 없다는 취지였음(p126). 또한, ‘정치지도자’와 ‘인민 다수’를 견제한다는 그의 생각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견제장치를 이끌어 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서로가 서로늘 견제하는 정당”이었음(p126). ⑥‘매디슨’의 ‘정당’에 대한 이론적 전환은 다수의 지배에 대해 매디슨이 가졌던 두려움에 중대한 시사점을 가져다 주는데, 어떤 정당이든지 선거에서 승리하면 정부 내에서 그 다수를 위해 활동할 것이고 이것이 ‘다수지배의 원칙’임. 그러나 어떤 극단주의도 억제되고 소수파의 의견도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연방체제 속에 내재되어 차단과 조율의 메커니즘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패배한 정당의 야망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임. 권력남용을 위한 추가적 안전장치를 전제로 하여 ‘매디슨’은 ‘다수지배의 원칙’을 포용하게 됨 ⑦‘매디슨’이 ‘정당’을 헌법상의 기구에 포함시키려 하지는 않았으며, 공화주의의 이상을 포기하지는 않았음. 사회 내에 어떤 분열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국민들은 무엇이 ‘공동체의 이익’이고 무엇이 ‘공화주의 정부를 보존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인지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위대한 정치적 가치를 중심으로 뭉치게 될 것이라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임(p127). 1790년대처럼 사회적 합의가 깨어질 때 ‘정당’이 등장하여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내게 되며, 하나의 정당이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내어 “궁극적으로 지배권을 확고히” 할 것이고 다른 정당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함(p127). ‘매디슨’은 ‘정당’들이 견제와 균형의 체제에 추가되어 영속적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한 것임. ‘정당’은 ‘공동이익’에 대한 합의를 반영하면서 ‘정당’도 고도로 훈련된 조직으로 스스로를 변혁해가며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임(p127). ⑧미국 전역에서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정당’을 건설해갔음. 그들은 자신이 천사의 편에 서서 다른 편의 악마와 전쟁을 한다고 믿었으며, 공화파와 연방파의 공천 후보자를 추천하기 위해 자신들이 사는 주 안의 다른 사람들과 손잡고 있는 지방 관리들, 전국에 걸쳐 자기들 당파의 동료와 손을 잡고 있는 지방 관리들을 선출함. 그들은 ‘혁명의 원칙’을 달성하기 위해, 그리고 국민들이 그들이 선출한 관리들이 ‘충성스럽게 복무하는지, 비열하게 배신’하는지 알기 위해 수십개의 ‘민주-공화 단체들’을 만들었고 치열한 정치투쟁을 하였음. 이들은 공화파와 연계되어 있었고, 주요 감시 대상으로 삼은 선출직 공무원은 모두 연방파였음(p128). ⑨1796년 ‘존 에덤스’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프랑스와 ‘준전시상태’가 될 즈음 ‘애덤스’와 ‘해밀턴’, 연방파가 지배하고 있던 ‘의회’는 ‘대통령’이나 ‘의회’를 ‘모욕 또는 비방’, ‘선동’하는 행위를 ‘미국의 선량한 시민에 대한 증오’로 규정하는 ‘선동방지법’(Sedition Act)를 통과시켜 자신의 정파의 고삐를 풀어주었으며, ‘공화파’는 자신들을 탄압하는 ‘연방파’를 견제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인 ‘선거’에 매달렸음.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가적 리더십’에 대해 국민의 가치로 압력을 행사하는 ‘수단’인 정당이 형성된 것임(p128).

● 비평

필자는 ‘매디슨’이 ‘공화주의’의 이상을 버리지는 않았고, ‘새로운 정당’이 공통의 합의를 이끌어내면 다른 정당은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음. 이러한 생각은 다소 이상적인 것이며 현대 ‘공산주의’ 체재하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매디슨’이 ‘자유’에 대한 이상과는 거리가 먼 단일정당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됨.

● 토의

우리 정치 현실 속에서 미국 ‘정당’의 발생과정에 나타난 경쟁을 통하여 ‘정당’ 자체의 존립을 스스로 유지하기 위한 “변혁적” 행동이라 평가되는 것은?

 

요약(5-5장-미국:건국리더십의 대변혁:역사상리더십의 사례-국민의 정부)

 

①유혈에 의한 것이든 혈통에 의한 것이든 권력승계는 모든 통치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데, 어떤 학자는 “일군의 지도자들이 막대한 권력을 자발적인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상대편에게 “넘겨주는 것”을 “정치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신비한 현상”이라고 불렀음. 최소한 민주주의에서 권력승계는 간단해 보이지만 권력을 내놓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절대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음(p129). 아무리 좋게 본다고 해도 어리석고 능력 없는, 아주 나쁘게 본다면 부패하고 반역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반대파에게 넘겨준다?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p129). 이것은 정치적 맹신, 민주적 절차와 국민의 판단에 대한 순응, 그리고 상대방도 그렇게 순응하리라는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함(p130). ②‘제퍼슨’과 ‘매디슨’ 조차 반대파의 역할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였으며, 그들은 ‘그들이 위헌적이라고 판단한 연방법에 대해 이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라고 선언한 ‘캔터키-버지니아 결의안’(Kentucky and Virginia Resolutions)을 비밀리에 입안하였으며, 반대야당의 존재라는, 민주주의적 사상을 완전히 받아들지 않음을 뜻하였음. 즉, 헌법을 당파투쟁에 예속시키려 한 것임(p130). 1800년이 다가오면서 ‘애덤스’와 ‘해밀턴’의 추종자들은 그들 공동의 적인 ‘공화파’를 비난 듯 서로를 격렬히 비난하였음. 즉, ‘해밀턴’은 대통령인 ‘애덤스’가 우유부단하다고 비난하였고, ‘애덤스’는 전 재무장관 ‘해밀턴’을 “모든 도덕적 원칙을 파괴하는 자”로 부름(p130). ③1800년 여름 수백명의 버지니아 노예들의 반란이 간신히 진정되었고, 노예들이 리치몬드 시에서 가난한 백인을 제외한 모든 백인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보도가 남부를 공포로 떨게 했음(p131). 이러한 때에 각 주의 입법부가 서서히 대통령 선거인단을 선출했으며, ‘제퍼슨’과 ‘버가 애덤스’가 ‘찰스 코츠워스 피크니’(Chales Cotesworth Pinckney)를 제쳤지만, 선거제도는 ‘정당’을 염두해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화파로 함께 뛴 ‘제퍼슨’과 ‘버’가 각각 73표씩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고, ‘버’는 양보하려 하지 않았으며, 선거는 ‘하원’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연방파가 ‘버’를 선출하여 ‘제퍼슨’에게 일격을 가하려는 와중에 무장한 양 당파 지지자들이 워싱턴D.C로 진격한다는 소문이 나옴(p131). ④‘제퍼슨’은 자신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려고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단호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버’에게 축하 메세지를 보내면서, 자신 밑에 둘째 자리라는 것을 명확히 함. ‘해밀턴’은 “미국 공직에서 가장 부적절한 인물”, “비열한 위선자”로 평가했던 ‘제퍼슨’을 원칙에 입각하여 지지함으로서 추종자들에게 실망을 안김. ‘버’는 부통력직을 수락함으로써 “극단적인고 불규칙한 인물”이 아니라 현실주의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임. 그러므로 신생공화국은 첫 번째 권력이양 시험대를 통화하였는데, 이 시험대는 이후 200년 동안 다른 나라들이 수도 없이 실패한 것이었음(p131). ⑤당시 제도는 불안하였고, 대통령 선거절차는 교착되지 않도록 개혁되어야 되었으며, ‘정당’은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대부분의 빈곤층, 여성, 노예, 이민자들에게는 여전히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음. 그러나 생명과 자유, 더 높은 수준의 평등과 공동체, 그리고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계기가 마련됨(p132). 미국인들은 ‘국민에 의한 정부’란, 헌법적 장치와 선거절차가 없이는 합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투쟁은 적절할 뿐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 되었음. 역사가 ‘로버트 위브’(Robert Wiebe)가 지적했듯이, ‘정당’은 미국 사회를 양분함으로 미국 사회를 통합했음(p132). ⑥독립의 쟁취, 최소한 주들을 통합했던 연맹체제의 확립,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헌법의 제정, 중앙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권리장전의 추가-이 모든 것들이 ‘변혁적 리더십’과 ‘행동하는 리더십’ 개념에 관한 훌륭한 예이며, 근본적이고 생산적인 변화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행동의 거대한 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줌. 또한, ‘정당’간의 권력이동의 가능성이 다수의 헌법 기초자들이 가지고 있던 다수의 지배에 의한 공포를 성공적으로 제한할 수 있었음(p133). ⑦‘제도의 대변혁’ 뒤에는 ‘가치의 혁명’이 자리잡고 있어서, 1787년 헌법 제정으로 신생 공화국의 질서와 안정이 이루어지고, ‘권리장전’을 통해 ‘개인적 자유’라는 모호한 개념에서 ‘정부에 대한 견제’라는 개념으로 바뀌었으며, 행복은 개인적이라는 견해가 ‘공동선’과 ‘공화주의’의 이상에 근거한 사회적․집단적 행복이라는 개념과 공존하게 됨(p133). ⑧‘가치의 대변혁’ 뒤에는 중대한 사상적 전환이 있었는데, 혁명 전 미국의 사상가들은 유럽의 온건한 계몽주의적 이상을 반영하고 있었으나, 영국의 가혹한 지배에 도전했던 미국의 사상가들은 점증하는 갈등으로부터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라는 새로운 이상을 향해 갔으며 이러한 세기적 변화의 지도자가 ‘매디슨’이었음(p133). 또한, ‘국가적 리더십’이란 두리뭉실한 합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 ‘정당’간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확연해졌음. 이는 집단적․지적․정치적리더십이었음(p134).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초기 공화국이 헌법 제정과 선거를 통해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을 미국의 독립으로부터 대통령 선거까지 통찰력 있게 다루면서 보여주고 있음. 또한, 이 과정에서 나타난 ‘제도의 변혁’과 그 이면에 있는 ‘가치의 혁명’ 및 ‘사상적 전환’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음. 우리 사회에서 ‘집단적 리더십’을 통해 이러한 ‘변혁’을 이루어 갈 수 있을지?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 요약(6-1장-프랑스:리더십의 시련:역사상리더십의 사례-프랑스 혁명)

 

①1789년 10월 5일 교회 종이 경보를 울릴 때, “우리에게 언제 빵을 줄 것인가?”라는 외침과 함께 생트마르그리트(Sainte Marguerite) 성당 앞에 작은 행렬이 만들어지고, 그들은 칼과 곡갱이를 들고 파리의 중심부로 몰려나가며 합류한 인원이 약 7천명이나 되었음(p135). 그들은 루이 16세가 국민의회에 맞설 왕당파의 쿠테타를 시도하려고 플랜더스 지방의 군대를 베르사유로 집결시켰다는 소식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군중들은 대담함에 도취되어 베르사유로 진격하여 왕을 만나기로 결정함(p135). ‘라파예트’가 이끄는 2만명의 왕실 호위대가 파리로부터 도착하면서 승리감이 긴장감으로 바뀌었고, 한 여인이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의 심장을 도려내자!”라는 고함을 지르기까지 했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실 발코니에 모습을 나타내자 군중의 분위기가 급변하여 “왕실 만세!”를 외침(p136). ②1789년 ‘10월의 그날들’은 프랑스혁명의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고, 루이 16세는 다시 베르사유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와 왕비, 두 자녀는 ‘왕자가 아니라 죄수’처럼 파리에 남게 되었으며, ‘국민의회’가 비겁하게 왕을 추종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법마저 파리의 군중들에게 좌우됨. 왕의 권위는 약화되고 의회의 권위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중들이 권력의 주도권을 잡게 됨(p136).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후일 ‘베르사유 행진’에 대하여 ‘잔인한 건달과 암살자들의 무리’라고 하였으며, 역사가 ‘조르주 루데’(George Rude)는 이 군중들에 대해 ‘육체에서 분리된 망령’ 같았다고 기술함(p137).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점원, 노동자의 아내, 소매상, 곡물상, 수공업자, 대장장이, 양복장이, 가발 제조업자, 방직공, 금고 제조업자 등 ‘주거가 분명한 자’들 이었음(p137). ③혁명 발발 2년 전만 해도 ‘루이 16세’는 조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베르사유의 땅도 물려받았으며, 1775년의 대관식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를 폭발시켰음(p138). 그러나 환경과 그의 성격이 그를 수감자로 만들어 신민들로부터 더 멀리 격리시켰으며, 오스트리아 출신 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문난 부패행위를 하고, 혁명 기간에 권력 남용, 정치적 간섭을 일삼음. 대신들도 음모와 부정부패에 열중했으며 ‘루이 16세’는 국민들 위에 군림만 했을 뿐 통치하지는 못하였으며 그들을 이끌지 못했음(p138). ‘명예’, ‘작위’, ‘독점권’, ‘급여’ 등은 정치적 거래와 질서 유지의 핵심 도구였으나, 귀족 지위는 이미 오래전부터 매매 대상이 되었으며, 정부직도 시장에 나왔음. 부패가 제도화되었으나, 왕은 충성심을 얻어내려고 그것에 의지했고, 궁정에 총애받는 신하들과 더불어 왕과 왕비는 상업적․정치적 거래 시스템 속에서 거대한 중개인 역할을 하였음(p138). ④왕은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특권적 위계질서가 정착되고 구조화되어 어떤 힘도 그것을 뒤집을 수 없을 것으로 보였으며, 1787년에 미국인들이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있는 동안 ‘루이 16세’의 이러한 편벽한 통치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다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음(p139). 그러나, 1789년 한 해에 왕의 통치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일군의 놀랄 만한 프랑스인들이 브르타뉴, 부르고뉴, 프로방스 및 10여개의 지방 민초들 속에서 나왔으며, 그들의 노력은 폭력과 공포 속에 함몰되었지만, 리더십의 불꽃은 군중과 귀족의 기이한 연합에서 피어올랐음. 1760년대 말 시작된 무질서는 가장 근본적인 결핍, 즉 식량부족으로 인해 되풀이되고, 이에 반해 ‘베르사유’는 넘처나는 ‘부’의 상징이 됨(p139). ⑤부자들은 국고의 고갈된 재정상태에 불만이었는데, 7년전쟁과 미국의 독립전쟁에 대한 지원으로 왕정은 파산을 맞게 됨. 1787년에 이르러 ‘귀족회의’(Assembly of Notables)는 왕에게 ‘삼부회’를 소집하도록 압력을 가했는데, ‘삼부회’란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왕이 자문을 위해 소집하는 중세의 제도로 150년 동안 한번도 소집된 적이 없었음. 삼부회는 제1신분인 ‘승려’, 제2신분인 ‘귀족’, 제3신분인 ‘평민’으로 구성되었는데 전통적으로는 각각의 신분은 1표씩 행사할 수 있어서 제1신분과 제2신분이 자연스럽게 연합하여 제3신분을 지배할 수 있었으나, 1787년 8월, 파산하기 1주일 전 왕은 다음해에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동의하고, 12월 초청장이 인쇄되었을 때, 제1신분과 제2신분은 300명의 대표가 할당되었으나, 제3신분은 600명이 할당된 것임(p140). 이는 왕이 두배로 늘려달라는 요청에 굴복한 것으로 ‘콩트 당트레그’의 표현에 따르면 “제3신분이 곧 국민이며 국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 받아들여짐(p140). ⑥1789년 5월 마침내 천여명의 대표들이 태피스트리와 지난 1300년간 왕들의 초상화로 장식된 장엄한 홀에 자리잡고, ‘루이 왕’은 훌륭하게 장식된 무대 위에 왕비와 왕자들과 시종들에 둘러쌓여있고, 귀족들은 왕의 왼쪽 방석 달린 벤치에 자리잡고, 승려들은 오른쪽, 평민들은 홀의 뒤쪽에 앉아 있었으며 전혀 혁명적인 의회로 보이지 않았음. 평민들 중에는 변호사, 판사, 지방관리들도 있었고 상인, 의사, 교수들도 있었으나 몽테스키외나 루소의 사상을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음(p140). 제3신분은 무질서하고 파당을 지었으며 끊임없이 떠들어 대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는 어떤 화학반응이 있었는지 그들은 한데 뭉쳐서 의회 절차들을 확립해가기 시작했으며, 재빠른 속도로 의도한 바도 없이 혁명을 일으키고 말았음(p140). ⑦6월 10일 그들은 머릿수에 따라 투표하는 총회를 요구했느나 거부당하고, 평민들은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제1신분과 제2신분도 그들에게 합류할 것을 맹렬하게 요청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라고 하였음(p141). 6월 20일 제3신분에 할당된 회의장이 왕명으로 폐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에 놀란 대표자들이 실내 테니스코트를 점령하고 그들의 손으로 헌법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절대로 해산하지 않을 것을 결의함. 1주일만에 ‘루이왕’은 항복하고 제1신분과 제2신분에게 참가하라고 명령했으며, 8월 4일과 5일 양일 간에 열린 밤샘 회의에서 대표자들은 “국민의회는 봉건제도를 완전히 폐지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함(p141). 이에 대하여 역사가 ‘윌리엄 도일’(William Doyle)의 표현대로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내려온 사회적‧제도적 삶의 근본 원칙”이었던 특권제도를 일순간에 붕괴시켜버린 것이었음. 1주일간의 토론 끝에, 8월 26일 ‘국민의회’는 왕이 아닌 국가체제가 모든 주권의 원천이며, “천부의, 절대적인,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주장하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Citizen“을 채택함. ‘국민의회’는 국가권력상의 우월적 지위를 입법부에 부여하고, 왕은 법률 제정에 제한적인 거부권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헌법을 입안하기 시작함(p141). 왕과 다른 신분들과의 갈등 속에서 형성된 대표자들의 단합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갈등은 근본 원칙들이 문제가 되고 있으며 자산들의 단호함이 대변혁을 위한 잠재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심화시킴(p141). ⑧‘국민의회’는 ‘주권’,‘자연권’,‘자유’,‘평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 해 여름 ‘매디슨’이 미국 의회에 ‘권리장전’을 밀어부친 것도 결코 우연이라 볼 수는 없음(p142). 파리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군중들은 ‘국민의회’를 급진적인 방향으로 몰아갔으며, 시끄럽고 고집불통인 군중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호위병을 석방시킬 수 있을 만큼 강했고, 군중의 리더십의 빛나는 성과는 7월 14일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을 장악한 일이었음. 이것은 왕권의 붕괴와 ‘의회’ 역시 그 존재를 확고히 나타낸 거리의 혁명가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함(p142). 그러나 ‘헌법’의 초안은 군중이 아니라 ‘시민’에 대한 것이었고 왕의 신민을 ‘남자시민’(citoyens)과 ‘여자시민’(citoyennes)로 탈바꿈 시키려는 것에 초점을 둔 것임. 역사가 ‘마이클 피츠몬드’(Michael P. Fitzmmons)가 묘사한 것처럼 “군주에 의해 매개되는 특권이 아니라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이 체제 내에서의 권리의 기준”이 된 것임(p142).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집단적 리더십’의 전형으로 ‘프랑스 혁명’의 군중의 예를 들며, 혁명의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음. ‘프랑스 혁명’은 ‘제3신분’과 ‘군중’으로 이루어진 ‘통합적 리더십’을 보여줌. 우리 사회의 ‘통합적 리더십’의 모습은?

역사를바꾸는리더십(제임스맥그리거번스)_24하우스(이현재)_5,6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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