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제3강)

presentlee 2024. 1. 13. 23:33

https://youtu.be/XaJLC7zn70M?si=sh24XhiRs0IjOr79

 

□ 요약(4-1장-기획자로서의 리더:리더의 자질-수에즈 운하의 건설)

 

①우산을 찾을 수 없을 때 보통 사람들이 차분히 앉아서 최근에 왜, 언제, 어디서 우산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지 않고 사방으로 찾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을 생각하는 일은 끈기있는 분석을 요구하는 작업이라서 그만큼 어렵기 때문임(p72). 우산을 찾는 데만 집중하면 할수록 ‘시야’는 좁아지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사고는 현실적이고, 편의적이고, 때로는 약삭빠르고, 보통은 단기적이지만, 질적으로 다른 사고의 특성은 상황에 대처하는 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는 쪽인데, 요구의 영속적인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해결책, 즉 변화를 추구하는 뱡항으로 사고하는 것이 변혁적 유형의 사고임(p73). 이러한 모든 일에는 기획(의도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중요한 활동들과 그 활동의 결과를 구성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기획자들은 광활한 활동영역 위에서 상호작용하는 영향력에 관해 확고한 전략적 이해를 가지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함(p73). ②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출전하기 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몇 년에 걸쳐 외교적․군사적 전략을 수립하고 이스탄불과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 왕실과 신중한 외교를 통해 잉글랜드를 고립시키며 잉글랜드의 심장부를 공격할 외교적․군사적 전략을 수립함(p75). 펠리페 2세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에 대해 응징하고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을 부활시키기 위해 무적함대의 사령관으로 시도니아 공작(Duke of Median Sidonian)을 임명하며, 영국해협을 통과해 스페인의 파르마 공(Duke of Parma)이 수년간 지켜온 플랑드르에 닻을 내릴 계획을 세움(p76). 결국 전투병 등 3만명의 인원과 수천필의 노새, 2500문의 대표, 수백만 파운드의 비스켓 등을 실은 150척의 무적함대가 잉글랜드를 향해 출발함(p76). ③1588년 7월 30일 새벽 플리머스 절벽의 잉글랜드 파수병이 스페인 함대를 발견하고 신호용 횃불로 이 사실을 런던에 알리며, 플리머스 앞바다의 해군제족 하워드 경(Lord Charles Howard)과 드레이크경(Sir Francis Drake)의 함대는 항구와 좁은 해협에 묶여 있어 딜레마에 빠져 있었지만 무적함대 지위부는 펠리페2세의 곧바로 전진하라는 명령에 대해 의견이 분분해서 하루밤을 그냥 보내버리고, 그 사이 잉글랜드 함대는 끈끈한 바람을 뚫고 훤히 트인 바다로 나아갔으며, 스페인 함대에 포격을 퍼부은 후에 잉글랜드 부대는 민첩하게 빠져나갔음(p77). 다행이 스페인 함대는 잉글랜드 공격을 물리치고 플랑드르 근처에 다다랐으나, 지원군이었던 파르마 공의 군대는 오지 않았음(p78). 이런 상황 속에서 하워드 경이 화공선으로 서로 연결된 스페인 함대를 공격해 무적함대를 바다쪽을 내몰았으며 이 원정인 일주일만에 끝나고 말았음(p78). 파르마 공의 군대가 제때에 출항하려면 메디나 시도니아와 긴밀한 협력과 함께 매우 정확한 계획이 필요했음(p78). 한편, 무적함대는 북쪽의 세틀랜드(Shetlands)를 돌아 남쪽으로 항해하던 중 광포한 폭풍을 만나 거대한 배들이 해안 모래톱에 부서지고 많은 군사들이 잉글랜드 병사에 의해 살육됨(p79). 펠리페2세의 목적은 단순히 잉글랜드를 침략하는 것만이 아니었고, 자신의 국가를 진정으로 변혁시키고자 했던 것임(p80). 이런 측면에서 그는 확실히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사령관들의 결단력 뿐 아니라 잉글랜드인의 결단력까지도 과소평가했기 때문임(p80). ④“상황이 어때?”라는 질문은 군사작전에서 가장 일반적인 질문이며, 소방대장이 소방대원에게, 외과의사가 간호사에게 가장 먼저 하는 질문임. 특히 장군은 인과관계를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펠리페 2세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들을 통해 ‘신의 의지’라는 인과관계에 관한 그만의 이론을 가지고 있었음(p80). 프로테스탄트 이단에 대한 그의 반대는 힘에 의한 정치, 광신, 전쟁과 신앙심 등이 혼합된 것이었으며, 수천명을 처형하고 “신민들에게 자신과 다른 신앙을 허락하는 군주는 없다.”라고 단언하였으며, 신에 대한 복종의 의미에서 그만큼 결단성, 공격성, 힘을 겸비한 군주는 없었음(p81). 그러나, 그가 섬기는 신은 그의 역할이 어디에서 끝나고 사람들의 역할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으며, 이것이 왜 펠리페 2세가 우유부단하고 완고하였는지를 설명함. ‘제프리 파커’(Geoffrey Parker)는 그가 “신께서 우리에게 좋은 날씨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함(p81). ⑤유럽인들이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전쟁을 그칠 방법을 모색하는 중, 몇몇 지도자들은 세상을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건설적인 일에 매진하여 운하를 뚫고, 강의 흐름을 바꾸고, 거대한 댐을 건설하고, 철광석과 석탄층을 파고들고, 고층건물을 세웠음. 이들은 위대한 장군들과 같이 지도자이며 기획자들이고, 우연이나 종잡을 수 없는 운명의 바람과 파도에 일을 맡끼지 않았음(p82). 그들의 끊임없는 업적 중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것은 운하였으며, 이집트와 중앙아메리카의 두 개의 운하 즉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는 대륙을 둘로 잘라서 두 바다를 하나로 만드는 것으로 교통과 통상의 새로운 흐름을 창조했음(p82). ⑥헤로도토스(Herodotos)에 의하면, 기원전 7세기 이집트인들이 나일강 동쪽으로 향하는 운하 건설을 시도하였으나 수십만명이 죽었고, 왕 ‘네코’(Necho)가 “너는 지금 야만족의 침입을 돕는 길을 뚫어주고 있을 뿐이다”라는 신의 계시를 듣고 운하건설을 중단했다고 함. 한편,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Darius) “페르시아의 힘으로 나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나는 이 강에서부터 홍해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라고 비문에 새겼는데, 홍해가 육지보다 몇 피트 높아 운하를 건설하면 이집트가 물에 잠길 것이라는 말을 듣고 건설을 중단하였음(p83). 나폴레옹은 1789년 이집트를 점령한 후 “홍해의 독특한 산물들을 프랑스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측량기사들이 홍해가 밀물일 때 지중해의 썰물보다 62피트 더 높다는 오보에 운하 건설의 꿈을 접었음(p83). ⑦1832년 그 꿈은 ‘페르디낭 드레셉스’(Ferdinand de Lesseps)라는 젊은 프랑스 인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는 이집트의 부왕 ‘모하메드 알리’(Mohamed Ali)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 그는 이집트 영사관에서 근무 후 네델란드, 스페인에서 대사까지 하였으나 부당한 혐의로 44살에 강제퇴직 당함(p83). 그러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근무한 1832년 경 콜레라로 인해 항구에 격리되었을 때에 나폴레옹의 수에즈 지협을 뚫으려는 야망을 읽고 흥분하였으며, 어린시절 친구로 지냈던 ‘모하메드 사이드’(Mohamed Said)가 1854년 권력을 계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의 웅대한 계획을 새로운 이집트 부왕과 나누게 됨(p84). ⑧당시 영국 상인들은 아시아지역 물자 보급을 위하여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까지 1만 마일을 항해해야 했는데 운하가 건설되면 대략 4천마일을 줄일 수 있었으며,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레셉스’는 런던으로 달려가 저널리스트, 정부 각료, 의회의원들에게 로비를 벌였으나, <타임즈>를 비록한 언론은 냉소했으며, 영국 정부는 냉담하였음. 1857년 ‘레셉스’는 운하 건설이 단순히 상업적인 모험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이라는 점을 상인과 선주, 일반 대중에게 강력히 선전하면서 영국 제도를 순회하였고 특히,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묶어 인류를 나누고 있던 장벽을 허물어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함(p84). ⑨대중의 박수갈채에도 불구하고 영국 수상 ‘팔머스터 경’(Lord Palmerston)은 레셉스의 꿈을 ‘속기 쉬운 자본자들’을 속이는 ‘물거품 같은 계획’이라 결곤지었고(p84), ‘레셉스’는 그의 친구 이집트 부왕으로부터 운하를 뚫는데 99년 동안 특권을 받았으며, 2억프랑의 자본을 모으기 위해 ‘일반인’에게 주식을 팔았으며, 전세계적 사업임을 부곽시키기 위해 비프랑스 투자자들에게 주식의 반을 할당하는 등 스스로 계획을 실행함(p85). 그 결과 모하메드 사이드가 주요 투자자이고 많은 프랑스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이 멋진 투지 기회라는 생각과 민족적 자긍심 때문에 주식을 매입함(p85).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확소한 실행력, 무한한 자원, 자신의 목표를 추진할 기회를 포착하는 수완을 드러내는 등 비범한 지도자로 타고난 자신의 특성을 드러냄(p85). ⑩그는 유럽의 최고 실무 엔지니어들을 불러모아 1859년 4월 5일 사이드 항에서 처음으로 모래를 파내기 시작하였으며(p85), 엔지니어들은 거대한 준설장비들을 고안하고 개선하는 일들을 시도하였으며, ‘레셉스’는 일상적인 결정들을 내리고 위기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면서 그들과 함께 최상의 집단 리더십을 보여줌(p86). 이집트 정부가 강제 동원한 2만명 가량의 농부 출신 노동자들이 처음 일을 시작하였는데, 운하 회사가 그들을 매질하는 일이 발생하고 영국정부가 공식적으로 항의하자 운하회사는 프랑스 등 다른 유럽의 자유 노동자를 모집했고, 이후 철저한 기계화가 이루어져 1869년 8월 15일 지중해와 홍해가 연결됨(p86). 런던의 <타임즈>는 운하건설에 반대한 영국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다면서 ‘레셉스’에 대하여 정중히 사과하였고, 그의 명성은 이전 시대의 ‘웰링턴’(Wellington)과 ‘넬슨’(Nelson)의 명성에 필적할만하게 됨(p86). ⑪60대 중반이 된 ‘레셉스’는 혼 곶(Cape Horn)을 도는 수천마일의 우회로를 없앨 수 있는 ‘파나마’지역 운하 건설을 계획하였으며 수에즈운하 때의 방법을 고집하였으나, ‘파나마’지역에 있는 ‘구릉’으로 인하여 ‘수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였고, 1881년 2월에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엄청난 실패로 드러남. 이와같은 이유는 기획자들이 수문없이 해수면 높이의 운하를 만드는 데 필요한 굴착작업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임(p87). 또한, 프랑스 엔지니어들은 ‘황열병’으로 쓰러졌으나, ‘모기’가 황열병을 일으킨다는 사실고 모르고 있었음. 한편, ‘파나마채권’은 기대했던 것 만큼 팔리지 않았고, 그 결과 의회 허가가 필요한 ‘복권사업’에 매달렸으나 이것이 그를 제3공화국의 부패정치의 함정에 빠뜨리게 하여 몇몇 의원들이 뇌물죄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레셉스’와 그의 아들 ‘찰스’는 ‘사기죄’로 1893년 2월 9일 최고 5년 징역형을 받음. 또한, 영국은 1875년 모하메드 사이드의 파산 후견인 자격으로 그가 가졌던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사들여서 영국이 실질적으로 운하를 관리하게 됨(p88). 여기에서 “교만은 파멸을 불러온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레셉스’의 실패는 수에즈운하에 사용한 방법을 파나마에서도 고집한 ‘지식’ 때문임(p88).

● 비평

필자는 ‘레셉스’ 수에즈 운하 건설과 관련하여 영국 국민들에게 단지 실리적 목적을 넘어선, 동․서양 문화 단절의 극복이라는 고차원의 목적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대중적인 지지를 얻어낸 그의 천부적 리더십과 운하 건설 중 엔지니어들과 ‘레셉스’의 집단적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잘 드러냄.

● 토의

수에즈 운하 건설과 관련하여 ‘레셉스’의 기획자로서의 리더십과 현 우리나라의 ‘정책 수행’과 관련된 리더십을 비교해 본다면? ‘레셉스’가 ‘파나마운하’건설과정에서 보였던 실수과 실패를 통해 ‘리더십’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점?

 

□ 요약(4-2장-기획자로서의 리더:리더의 자질-파나마운하 건설)

 

①중국으로 가는 서쪽 직항로에 관한 생각은 수에즈운하를 건설하려는 생각보다 오래된 것이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oeles)와 세네카(Seneca)는 스페인에서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제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p88), 콜롬버스(Columbus) 역시 그 항로를 찾던 중에 신대륙을 발견하였음(p89). 운하건설은 혼 곶을 돌아가는 항로보다 서쪽 해안과 광활한 태평양으로 나아가는데 수천마일이나 단축된 통로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북아메리카인들은 운하 건설이라는 아이디어에 흥미를 나타내었음. 왜냐하면, 미국이 이 운하의 통제권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서반구의 식민지 경영세력에 대항하여 미국이 그 권위를 주장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임(p89). ②대범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5년 동안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령 지역을 여행하고 나이아가라 운하 건설을 열렬히 주창했던 박물학자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와 1804년 함께 만난 자리에서도 ‘한 통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것임(p89). 미국인들은 1825년 400마일을 흘러 오대호와 허드슨강을 연결시키는 ‘이리’(Erie)운하를 완성하여 중서부가 새로운 교역지와 정착지로 개방되는 충격을 맛보았기 때문에 지협운하에 대한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음(p89). ③1854년 미국 해군 탐험대 스물여덟명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의 오지로 파견되었으나 출발하자마자 길을 잃고 7주동안 질병과 굶주림으로 시달린 후에 7명이 죽고 나머지 사람들이 태평양에 도착함(p90). 이와 같은 환경의 어려움 뿐만 아니라 그 지협을 어느 나라가 가로챌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레셉스’의 파나마 운하 민자건설사업 계획에는 냉담했으며, 미국 대통령 ‘헤이스’(Rutherford B. Hayes)는 “우리나라의 정책은 운하를 미국의 관리하에 두는 것이다”라고 경고한 상황이었음(p90). 그런데,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에서 승리해 필리핀을 획득하자 미국인들은 다시 ‘파나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특히 ‘군사력과 경제력은 대양의 지배 여부에 달려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미국 해군의 약점을 냉정하게 평가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에 나타난 ‘머핸’(Alfred Thayer Mahan)의 학설에 매료되었음. 이 책에서 ‘머핸’은 지협의 관통이 미국의 고립주의에 힘을 불어넣는 지극히 중요한 전략의 핵심이라고 예견함(p90). ④한편, ‘레셉스’의 ‘파나마’운하 건설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세기가 바뀌면서 미국의 엔지니어들은 운하 건설이라는 거대한 모험에 필요한 과학기술과 숙련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했고, 또한 그들은 ‘레셉스’와 프랑스 엔지니어들의 방대한 자료를 이용할 수 있었음(p90). 또한, 미국 정부만이 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는 단순한 전제가 제기되었는데(p90), 그곳에 콜롬비아 인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난제가 있었으며, 이미 미국은 1869년 콜롬비아와 파나마 운하 조약을 협상했으나 상원이 이를 부결시킨 상태였음. 1903년 8월에는 콜롬비아 상원이 만장일치로 운하 건설을 거부함(p91). ⑤이러한 상황에서 ‘머핸’의 학설을 강하게 신봉하는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velt)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루즈벨트’는 협상테이블에 일종의 앵글로색슨적인 편견을 가지고 나와 ‘보고타에 있는 하찮은 놈들’이 운하 건설을 방해함으로 그에게 더 많은 돈을 뜯어내려 한다고 생각하고 1821년 파나마가 콜롬비아에 합병되면서 분리주의자들이 독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대하여 파나바를 독립시켜야 할 ‘새로운 이유’를 알게 되었음(p91). ‘루즈벨트’는 미국의 두 함대가 하나로 통합되면 미국은 대서양 뿐 아니라 태평양에서도 강국이 될 것이지만, ‘파나마’를 ‘공개적’으로 확보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파나마의 반란군이 ‘파나마시티’와 ‘콜론’을 공략하여 탈환하면 미국 해군이 콜롬비아 지원군의 상륙을 막아줄 것에 대해 합의함. 결국 반란군은 ‘파나미시티’를 장악하고 1903년 11월 4일에 ‘파나마공화국’을 선포였으며, 미국은 3일 후에 새로운 공화국을 승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2주일 이내에 루즈벨트는 운하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권리 뿐만 아니라 지협을 가로지르는 10마일 너비의 운하 지역에 대한 영구적인 소유권을 인정받는 조약을 체결함. ‘루즈벨트’는 이 일에 대한 자신의 핵심적인 역할을 공직이 끝나고 3년이 지난 후에야 밝힘(p92). ⑥운하 건설을 위해 워싱턴에 조직된 위원회 7인은 하나같이 건설사업에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고, 초대 위원장의 해고되었으며, 두 번째 기술위원장은 좌절 속에 그만둠. 그러나 미국인 운하 건설업자들은 프랑스인들이 사용했던 것보다 세 배 가량 큰 95톤 짜리 ‘토목공사용 증기삽’을 타스로 주문하는 등 인력과 자금, 장비를 쏟아부어 일을 진척시켰고, ‘루즈벨트’는 하얀 여름 옷차림으로 증기삽 제어실에 결연히 앉아있었음(p93). ⑦‘파나마’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 ‘루즈벨트’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파나마 운하’ 건설의 실제적인 영웅은 공병단 대령 출신인 마흔여덟살 ‘고살스’(George Washington Goethals)였는데, 그는 1907년 기술위원회의 세 번째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중요 항만공사의 경험을 가지고 ‘파나마’에서 강인한 리더십을 발휘하였으며, ‘루즈벨트’는 사람들에게 “만약 언제라도 당신이 그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그것을 말하려고 애쓰지 마시오. 당신이 그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 당신의 사직 사유가 될 것이오”라고 할 정도로 그를 신임함(p93). 그는 그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불만과 관심사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했으며, 노동자들을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대하자 그들이 최선을 다해 ‘고살스’를 돕게 되었음. 또한 그는 단호하고 과감한 엔지니어여서 운하의 도면을 획기적으로 수정했고, ‘완벽하게 운영되는 끊임없는 연쇄 시스템’처럼 실행될 때까지 작업을 재편성함. ⑧‘파나마 운하’건설의 또 한명의 영웅은 수석 위생관인 ‘고거스’(William C. Gorgas)박사였는데, 처음 미국인들은 프랑스인들과 같이 파나마에서 황열병으로 시달렸으나, ‘고거스’박사가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모기에 의해 발병한다는 학설을 받아들여 독한 연기를 피워 모기를 박멸하는 훈증소독을 대대적으로 실시한 결과, 1년 반 후에 파나마 지역에서 황열병을 뿌리뽑았음(p94). 그러나, 이와같은 재능, 지식, 기술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들 중에는 서인도제도의 흑인, 중국인, 스페인인, 이탈이아인 등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들이었음(p94). 이와 같이 1914년 8월 크리스토벌(Cristobal)이라는 작은 시멘트배가 최초로 이 운하를 건너갈 때에 ‘파나마 운하’는 희생자수, 더딘 전진, 질병과 오물, 계급간 격차 등을 겪은 전쟁과 비견되는 곳이 되었음(p95). 하지만, 10년간 연간 5천 척의 배들이 파나마운하를 운행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해군력에 엄청난 변혁이 일어나게 되어 ‘루즈벨트’가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우리는 운하를 건설하여, 동서 양 대양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우월한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예견이 실현된 것임. ‘루즈벨트’가 죽은 후 3개월 후인 1919년 말, 미국 태평양함대가 처음으로 파나마 운하의 수문을 통과하게 되었음(p95).

● 비평

필자는 ‘파나마 운하’의 건설 과정 가운데 나타난 ‘루즈벨트’ 대통령의 ‘변혁적 리더십’의 모습을 ‘운하 건설’이라는 거대한 사업의 완성을 통한 미국의 대서양과 태평양을 통활하는 지배력의 증가까지 연결시키며 드라마틱하고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음. 한편, 필자는 미국의 ‘파나마 공화국’ 지원과 관련하여 ‘파나마 운하’라는 변혁적 사업 수행을 위한 암묵적이고 필수적인 행위로 보고 있으나, 도리어 ‘루즈벨트’를 포함한 미국 외교의 실리를 우선시하는 ‘거래적 리더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행위라고 보여짐.

● 토의

‘파나마 운하’ 건설과 같은 큰 규모의 사업과 관련하여서는 ‘루즈벨트’, ‘고살스’와 같은 강한 추진력과 기획력, 정확성을 갖춘 리더가 필요한 것을 알 수 있음. 그렇다면, 이러한 ‘변혁적 리더십’을 현 정치, 사회의 맥락에서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리더십이 여전히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되는지? 혹은 ‘파나마 운하’ 건설처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는 큰 사업을 추진해 나가기 위하여 현실에서 요구되는 ‘리더십 상’이 있다면?

 

□ 요약(4-3장-기획자로서의 리더:리더의 자질-하버드 대학의 변혁)

 

①19세기 초 ‘하버드대학’은 ‘프린스턴’이나 ‘예일’에 비하여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는 사실 이외에 별로 다른 점이 없었고, 노예 반대 투쟁 와중에서도 하버드대학의 주된 관심은 학생 규율에 관한 것이었음(p96). 1860년 하버드대학은 새로운 학장을 물색 중이었는데, 그 후보의 마지막에 35세의 젊은 화학교수인 ‘찰스 윌리엄 엘리엇’(Chales William Eliot)이 있었음. 1869년 엘리엇은 16:8로 하버드 학장으로 선출되어 5개월 후 학장직에 취임하였으며 40년 동안 학장직에 있으며 ‘하버드’를 변혁시킴(p96). ②먼저 ‘엘리엇’은 교수 급료를 3천달러에서 4천달러로 끌어올리고, 전문성을 강화하는 비즈니스와 교육을 위한 새로운 학과를 만들었으며, 필수과목 대신에 학생들에게 강좌 선택의 자유를 주는 ‘선택과목제’를 도입함(p97). 그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에서 가정 존경받고 많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는 학장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확실한 목표와 그 목표에 적합한 수단들의 뛰어난 결합, 그러한 목표와 수단을 측량해 낼 수 있는 확고한 가치기준과 같은 변혁적 리더십의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임. 또한 그에게 무한한 리더십의 가능성을 제공했던 경제적‧사회적 환경 변화에 주목해야 함(p98). ③특히 ‘선택과목제’에 대한 엘리엇의 확고한 신념은 그가 지녔던 최고의 가치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개인의 자유, 즉 지적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권이었음(p98). 그는 ‘자유’를 통해 학생들의 ‘자결’, ‘성숙’, ‘책임’, ‘판단력’ 등 그들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이 드러나리라 믿었음. 그는 그의 믿음을 실행하기 위해 저명한 교수들, 목소리 큰 학생들, 불평하는 학부모들, 간섭하는 정치인들, 경쟁관계에 있는 총장들, 게다가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과도 싸워야 했음(p98). ④‘하버드’의 ‘자유’를 위한 그의 투신은 민주주의의 두 번째 원리인 ‘평등’으로 확장되어나가 ‘실질적 기회의 평등’의 가치가 미국 사회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주게 되었음. 그는 학교가 가톨릭교도, 유대인, 흑인, 중국인, 심지어 여학생들에게도 입학을 허가할 만큼 포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함(p99). 아울러, ‘엘리엇’은 역사가 ‘호킨스’(Hugh Hawkins)의 말과 같이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집단적인 해결책을 채택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고, 하버드의 뛰어난 교수진과 부유한 보스턴 금융가들의 후원에 의존하기도 함(p99). ⑤‘엘리엇’의 성공 밑바탕에는, 인류는 “진보하게 되어 있고” 따라서 “미약하고 헤매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인류는 처음부터 계속 향상되어왔다”는 전제가 있음.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식의 변혁적 목표에 대한 신념은 기획하는 리더의 전제조건이지만 결코 단 한사람의 노력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집단적인 조합체”가 되어야 함(p100).

● 비평

필자는 ‘하버드 대학’을 개혁한 ‘엘리엇’의 리더십을 “변혁적 리더십”으로 보았으며, 그의 개혁의 근본에는 인류의 긍정적 진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그러나 단순히 리더 한 사람의 목표 추구만으로는 “변혁적 리더십”이 목적하는 “행복추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집단적 리더십”이 필요함을 역설하였음. 한편, 이러한 “집단적 리더십”의 “임파워먼트”를 통한 목표의 추구가 ‘하버드 대학’의 변혁이라는 선순환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의사결정”에 소요되는 많은 시간, “집단” 내에서의 의견 충돌과 분열‧대립에 따른 일이 지체 혹은 중단 등 많은 부작용 역시 발생할 것으로 보여짐. 따라서, “변혁적 리더십”이 “집단적”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하여도, “집단적 리더십”이 반드시 “변혁적 리더십”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기는 어려움.

● 토의

‘하버드 대학’을 통하여 나타난 ‘엘리엇’의 ‘변혁적 리더십’의 핵심이 그의 ‘자유’, 특히 대학 내의 과목 선택 등과 관련된 ‘자유’에 대한 추구 및 두 번째로 ‘평등’의 가치를 ‘학내’에서 실현코자 한 것이었다면, ‘변혁적 리더십’이 현재의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 내에서 ‘자유’, ‘평등’의 가치로 잘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만약,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며 이것을 ‘기획자로서의 리더’라는 주제와 연관시켜 볼 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역사를바꾸는리더십(제임스맥그리거번스)_24하우스(이현재)_4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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