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제4강)

presentlee 2024. 1. 20. 23:59

https://youtu.be/021wIQUftHM?si=wBIVNXgVxoiEzaRA

 

House Leadership School


□ 요약(5-1장-미국:건국 리더십의 대변혁:역사상 리더십의 사례-집단적 리더십)
 ①엘리자베스 1세나 펠리페 2세와 같이 군주제의 경우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는 통치 리더십의 형태였으나, 18세기 대중의 저항과 개혁의 때에는 그 힘은 아래로부터 치받쳐오르는 민초들의 ‘집단적 리더십’이었음(p102). 이와 같은 ‘집단적 리더십’은 계몽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서로 치열한 의견대립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고대 그리스 철학, 로마의 국가철학,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오랜 세월을 통해 숙성된 종교적‧세속적 사상과 같이 공유하는 사상적 배경이 있었음(p102). ②‘칸트’는 조용하고 키가 작고 새가슴을 가졌고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교수직도 명성도 없이 오랜 기간 연구에 종사한 인물이었으나, 칸트는 점차 다른 젊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이 칸트의 강의에 몰려 그를 지성의 메시아로 추앙하기까지에 이름. 이와같이 스코틀랜드에서는 ‘데이비드 흄’과 ‘에덤 스미스’, 프랑스에서는 ‘볼테르’와 ‘루소’ 등 계몽철학자들이 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으며, 이 사상이 널리 퍼짐으로 ‘창조적 리더십’이 나타나게 됨(p103). ③ 이와 같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독서층은 난공불락의 특권층에 대한 불만,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정부, 국민의 요구에 묵묵부답인 통치자들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하나가 되기 시작하였고, 몽테스키외‧볼테르‧루소는 개인적으로는 각자를 평가해 주지 않았지만 사실상 결속력과 학설을 가지고 하나의 학파를 창설하였음. 이러한 유럽에서의 변화의 충격과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사상들이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여행자들을 통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전해져서 미국 국민들을 ‘변혁’시키는 새로운 집단적 리더십의 중추를 형성함(p104). ④‘미국의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은 미국 정치사에서 리더십에 부여된 가정 과격한 부름이었으며, 애국적인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가장 소중히 여겨와던 것으로 미국인이라면 모두 1776년 7월 4일을 알고 있을 것임. 그런데, 미국 헌법이 채택된 1788년 6월 21일과 ‘인권선언’(Bill of Rights)이 통과된 1791년 12월 15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임(p104). ‘집단적 리더십’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행위라고 평가받은 ‘독립선언문’은 ‘토머스 재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존 에덤스’(John Adams) 세명이 선언서를 기초했으며, 많은 사람이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고 의회는 이 초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기에 앞서 또다시 수정을 가함(p105). ⑤제퍼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 로마 사상가들의 작품을 그 시대의 원전으로 해독하고 인용할 수 있을 만큼 고전에 밝았으며 당시의 새로운 사상에도 해박한 사람이었으므로, 지적 리더십의 집단적 행동으로서의 독립선언서는 미국과 유럽의 수십년간에 걸친 정치적‧철학적 논쟁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음(p105). ‘제퍼슨’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면서 어떠한 서적이나 소책자도 참조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의 동의를 불러일으킬 만큼 명료하고 단호한 표현으로 주제에 대한 상식을 제기하려고 했다.”라고 말함(p106). ⑥독립선언서 두 번째 문단에 미국인들이 원했던 것이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은 이와 같음.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창조주에 의해 양도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믿으며, 이러한 양도될 수 없는 권리에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가할 권리가 포함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정부를 만들었고,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국민들의 동의로부터 나온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지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고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조직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인 것이다”라고 나타남(p106). ⑦여기서 ‘생명권’이란 시민사회의 구축 원리를 일컫는 것으로, ‘생명’은 통치자 아래에서 감성과 이성이 배제된 단순한 육체의 ‘안전’ 이상을 필요로 하고, 이러한 생명에 대한 권리의 의미를 구체화한다는 것은 정부와 지도자가 부담할 책임의 범위를 규정해주는 것이며,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에 상응하는 그들의 가치와 행동규범을 규정해주는 것임(p106). ‘자유권’이란 ‘자연권’의 요체이며, 자치권 부여를 거부당한 미국인들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항거’라는 모습으로 나타남. 그러나 여기에는 자유의 기초가 되는 국민 모두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동시에 정부의 권력을 제한할 것인가?하는 질문이 남게 됨(p107). ‘행복추구권’이란 마치 카드놀이의 와일드카드와 같이 측량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잠재적으로 가장 인간을 사로잡는 개념으로 ‘제퍼슨’이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의 넘치는 상상력 속에서 예리하게 탐색된 개념이며, 독립선언서의 맥락 속에서 생명을 얻게 됨(p107). ⑧20여 명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이름과 함께 ‘존 행콕’(John Hancock)의 큼지막한 서명이 들어간 독립선언서는 1776년 7월 8일필라델피아에서 공개되었고, 다음날 뉴욕에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장군과 그 부대원들 앞에서 낭독되었으며 13개주 구석구석까지 보내짐. 6년 후 영국이 요크타운에서 항복하고 2년 후 정치권력의 교체로 전쟁이 종식됨. 독립 전쟁이 끝난 후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통일되고 동질적인 시민’이라는 공화주의 이상이 흔들리게 됨(p108). ⑨1786년 메사추세스 의회가 세금과 부채의 경감을 요구하는 절박한 탄원을 무시한 채 휴회하자, 서부 메사추세츠에서 무장한 폭도들이 의회를 중단시키고, 수백명의 ‘불평분자들’이 ‘대니얼 셰이스’(Daniel Shays)의 지휘 아래 스프링필드 무기고로 집결하였으며, 군대의 발포로 인해 폭도들은 북부와 서부로 흩어지고 1787년 겨울 그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함(p109). 이 사건으로 인하여 독립운동 후 ‘연맹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아래 각 주로 흩어졌던 집단적 혁명 리더십 간에 다시 서신왕래가 활발해젺는데, 혁명전쟁 영웅인 버지니아의 ‘헨리 리’(Henry Lee)는 동생 ‘리차드 리’(Richard Lee)에게 “동부는 욕구의 폭발로 소요가 계속되고 혁명의 가능성도 있다.”라고 씀(p109).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조차 동요되어 이 폭동을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반역으로 규정하고 파리 대사였던 ‘제퍼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제퍼슨’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나중에 자기 사위에게 쓴 편지에 “자유의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들과 독재자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라고 쓰기까지 했음(p110). 
● 비평                                                                
  필자는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 과정에 ‘벤자민 프랭클린’, ‘존 에덤스’, ‘토마스 제퍼슨’의 기초안에 관하여, 의회가 다시 수정을 가하는 등 다수의 집단적 참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집단적 리더십’이 미국의 독립을 가져오는 ‘변혁적 리더십’으로 작용하는 과정을 통찰력 있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종교개혁의 영향 가운데 나타난 계몽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초기 문단에 잘 제시하였음.
● 토의
  미국의 독립이라는 큰 이슈 앞에서 ‘집단적 리더십’이 힘을 발휘하였으나, 이러한 공통 사항이 성취된 후에는 다시 ‘집단적 리더십’은 흩어지고, ‘메사츄세스’ 사건 등 남아 있는 사람들 간에 공동체의 분쟁과 분열의 상황이 재현되었음. 평상시 ‘집단적 리더십’ 혹은 ‘변혁적 리더십’의 공동체에 대한 역할?

□ 요약(5-2장-미국:건국리더십의 대변혁:역사상리더십의 사례-수정헌법)

 

 ①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포지 계곡’(Valley Forge)에서 살아남은 미국의 리더십은 1786년의 폭도들로 인하여 자신들이 애지중지하였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가치이자 ‘워싱턴’을 비롯한 다른 모반자들이 호소하던 가치가 위협받고 있는 것에 대해 걱정하게 됨(p110). 이러한 배경 하에서 ‘워싱턴’은 헌법제정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친구 ‘라파예트’(Marquis de Lafayette)에게 “이는 우리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보호해주는 존경할만한 정부를 갖게 될 것인지, 아니면 우연이나 즉흥적 결과에 따라 운영되는 정부를 갖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무정부상태나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야망에 찬 몇몇 선동가들에 의해 독선적으로 운영되는 정부이며, 국가의 이익보다는 선동가들 자신의 욕망에 의해 통치된다.”라고 함(p111). ②1787년 봄 헌법제정을 위한 대표자들이 필라델피아에 도착하기 전에 수개월에 걸쳐 집단 토론이 선행되었는데 식자들과 법조인, 기업인, 교사, 목사들 간의 서신왕래를 통해 이루어졌고, 2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가 가지는 깊이와 너비임(p111). 헌법 기초자들은 생각을 가다듬고 논리를 세우느라 수많은 시간을 보내었는데 이러한 사고과정과 국민적 통합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느라 주고받는 편지 글에서 수천개의 단어들을 쏟아놓고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영광스러운 기회를 갖게 되어” 또는 “존경하옵고 평안을 비옵니다”라는 말로 끝내는 것이었음(p111). ③그 당시 ‘연맹규약’(독립전쟁 중 참가한 여러 주가 하나의 통합체를 이룬다는 규약)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각 주들이 서로 통합되는 한 계속 유지되도록 만들어져 있었느나, 독립이 확보된 이후에는 해체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신생공화국이 ‘집단적 리더십’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에 경쟁과 갈등, 무책임과 불의를 야기하고 있었음(p111). 따라서, ‘매드슨’은 그것이 “공화정부를 통치하는 다수파는 공공선과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가장 안전한 보호자라는 공화정부의 근본원칙에 대해 회의를 품게 했다”고 이야기했음(p112). ④‘연맹규약’ 체제를 대체할 정부의 형태에 대하여 대다수의 개혁주의자들은 직접적․간접적인 국민의 통치가 혼합된 공화정부?를 원하였고, 그들은 서신을 통하여 집단적으로 의논하며 집단적 학습경험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대표성, 연방주의, 대통령의 권한, 다수의 지배, 소수의 권리같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함(p112). 이 과정에서 ‘매디슨’은 처음에 ‘연맹규약’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면서 회의 소집에 반대했으나, 소요사태의 영향으로 회의소집에 찬성하게 되고, 그는 주정부 내 발견되는 ‘부도덕’들이 “총체적인 병폐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파악하고 완전한 치료를 위해서는 그러한 부도덕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라고 생각함(p112). 따라서 그는 각 주들에 대해 최상의 통치권을 가지는 국가권력을 모색하였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미국 국가조직의 ‘제2의 혁명’이였음(p113). ⑤서신왕래를 통해 그들이 ‘대토론’을 한 후에 1787년 5월 대표자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였을 때에 근복적 변화 달성을 위해 실천적 아이디어를 많이 가져왔으며, ‘매디슨’은 후일 ‘버지니아 플랜’(Virginia Plan)으로 알려진 방대한 계획을 마련했고, 여기에서 그는 주정부의 법령들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새로운 의회를 가지게 될 강력한 연방정부를 제안함(p113). 그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길고도 무더운 여름 내내 문서의 조문 하나하나를 만들어갔는데, 영국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은 “내가 아는 한, 현대에 와서 지식인들에 의해 생산된 정치 분야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라고 평가했음(p113). 이와 같이 이 헌법은 서구 역사에서 창의적이고 지적인 리더십으로 만든 가장 훌륭한 정치적 계획의 사례이며, 이 ‘지적인 리더십’은 극히 집단적 사고의 산물이었음(p113). ⑥헌법 입안자들은 ㉠‘거래적 수준’의 접근을 하였는데, 결정을 구체화하고 자기네들이 대표하는 이익에 민감한 협상들을 중개하기 위하여 경쟁했으므로 문제와 대안을 지방정부적․주정부적․지역적․계층적 관점에서 분석함(p113). ㉡또한, 그들은 중앙정부적 요구에 초점을 맞추고 체제 변환을 목표로 했던, 다시 말해 새롭고 더욱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향했던 ‘변력적 지도자’들이고도 했음(p114). ‘매디슨’의 ‘버지니아 플랜’이 이러한 강력한 정부 구성의 토대였으며, 실제로 ‘뉴저지 플랜’(New Jersey Plan)도 있었느나 ‘매디슨’은 “미국의 정치체제를 흔드는 부도덕한 계층”을 제거하기에는 미약하다고 보았음. 한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출현이 “주정부의 권한을 삼켜버리게 될 것”이라고 함(p114).⑧중앙정부에 대한 권한 부여는 권력 분배의 방법에 대한 논쟁이었으며, 이 점에 관해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공화국의 실패에 대해 면밀한 탐구에 의존했고, 새로운 정부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간의 상호견제와 균형이라는 복잡하게 얽힌 체제 내에서 안정되도록 설계함(p114). 정치학자 캘빈 질슨(Calvin Jillson)의 지적과 같이 체제 변혁 수준의 입안자들은 ‘공통된 이해’보다 ‘공통된 생각’에 따라 행동였으며, 변혁적 지도자로서 헌법 임안자들은 이론가인 동시에 실천자로 행동했기 때문에 지적인 쿠테타를 훌륭하게 이끌어 내었음(p114). 회의장 안에서는 워싱턴, 매디슨, 해밀턴, 그리고 12명의 각기 다른 창조적인 사상가들이 공통의 목표를 향하도록 그들을 지도함(p114). ⑨헌법 입안자들은 헙법을 통과시키는 과정에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는데, 신문 편집인들은 성향상 국가주의자였고, 유력한 대기업들은 통상 장벽이 낮아지게 될 기대로 새로운 헌법을 적극 지지하였음. 그러나, 반연방주의자들은 성향상 지방주의적이었으며 그들끼리 결속하는데 느렸음. 그러나 그들은 소책자와 논쟁을 통해 연방주의자의 주장과 확신에 대한 강력한 반박논리를 만들어내고, ‘조지 메이슨’(George Mason),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 뉴욕주지사,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버지니아 주지사 등으로 이루어진 막강한 팀을 논쟁에 참여하도록 이끌어냄(p115). ⑩헌법 제정 과정에서 혁명(독립전쟁) 당시의 집단적 리더십이 다시 전면에 부상하였고 두파로 나누어짐. 1776년의 모반자 중 상당수가 1787년에 다시 모반자가 되었는데 이들은 주정부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는 헌법보다는 연맹규약이 혁명의 가치들을 훨씬 잘 구체화한다고 믿음. 그들이 비록 건국의 결정적인 시기에 창의적 변화의 초석에 갈등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들은 1780년대 후반 미국 국민의 희망과 기대의 틀을 바꾼 리더십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협력자였음(p116).
● 비평                                                                
  필자는 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과거 ‘연맹규약’을 통한 각 주의 자치적인 통치의 형태에서, 하나의 연합국가 형성을 통한 강력한 국가 체제로의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2의 혁명’이라고 보았음. 물론, 미 연방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권력의 체계이지만, 사실 헌법 제정 당시   미국이 주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청교도 배경의 동일한 근원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연합체를 이루기에 보다 용이했던 면이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체제를 뒤집는 ‘혁명’의 단계 보다는 ‘혁신’적인 ‘통합’의 단계였을 것으로 생각됨.
● 토의
  필자는 헌법 제정 과정에서 ‘지성적 리더십’이 ‘집단적 리더십’ 그리고 ‘변혁적 리더십’까지 이어졌음을 헌법제정 과정에서 잘 보여주고 있음. 이러한 기초가 되었던 ‘지성적 리더십’이 우리의 정치․사회현실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지? 만약 현재 존재하고 있다면 어떠한 것이 있으며, ‘지성적 리더십’이 구체화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 있다면? 

□ 요약(5-3장-미국:건국리더십의 대변혁:역사상리더십의 사례-매디슨)

 

 ①1787년 가을 독립선언서에 명시되었던 가치들이 미국 헌법 초안에도 재천명 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초안을 읽은 미국인들은 충격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는데 ‘우리 합중국 국민들은’(We the people)이라고 시작한 헌법 전문은 독립선언이 환기시켰던 가치들 즉, ‘생명’, ‘자유’, ‘행복추구’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어 보였기 때문임(p116). 헌법 전문에는 ‘정의를 확립하고’, ‘국내 안녕을 확보하고’, ‘공동의 방위를 도모하고’,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의 자유의 축복을 도모하고’와 같은 단어들이 열거되었지만, 국민의 자유를 열거한 ‘권리장전’은 헌법의 어느 곳에도 없었음(p117). ②권리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빠져있다는 점이 반연방주의자들에게 활력을 찾아주었으며, 헌법에서 권리에 대한 어떤 조항도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가장 이론이 분분한 쟁점이 됨. 헌법회의가 끝난 후 ‘매디슨’은 파리의 ‘제퍼슨’에게 헌법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6천 단어의 편지 전갈을 보내었는데, ‘제퍼슨’은 편지를 받자마자 “나는 각 주의 의회에 의존하지 않고 그 스스로 평화롭게 존속할 정부를 만든다는 일반론을 매우 환영합니다. 나는 정부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구성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쓰면서(p117), “나는 이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몇가지 것을 덧붙이려고 합니다. 우선 종교의 자유, 출판의 자유, 상비군에 대한 보호, 독점 제한, 인신보호영장의 청구권, 배심원단에 의한 재판 등이 명확하게, 그리고 어떤 궤변도 없이 규정하고 있는 권리장전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회신함. 그는 ‘권리장전’은 “국민들에게 이 지구상에 있는 어떤 정부도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함(p118). ③이와같이 ‘매디슨’과 ‘제퍼슨’은 2달이 걸리는 서신 왕래를 통해 헌법에 대해 논쟁하였고,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헌법 초안은 주의회에서 토론, 주 비준대회에 참석할 대표자 선거, 비준대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헌법 제정 과정이 전체 주에서 진행되면서 온 나라가 끊임없는 토론에 열중함(p118). 몇몇 반영방주의자들은 헌법에 반대하기보다 ‘권리장전’ 법안을 고려하기 위한 새로운 전국 대표자대회를 요구하기도 하였는데, 1788년 1월 보스톤에서 열린 매사추세츠 대표자대회에서 해결책이 나와 연방주의자들은 각 주가 헌법 비준과 함께 수정안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한다는데 합의하게 됨(p119). ④각 주별로 소집된 대표자대회의 헌법비준안은 근소한 차이로 통과되었고, 특히 1788년 7월 버지니아주는 ‘패트릭 헨리’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89대 79로 통과시키면서 20개의 수정안을 제출함. 뉴욕주에서는 골수 연방주의자 ‘알렉산더 해밀턴’의 대가다운 작업에도 불구하고 30대 27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통과됨(p119). 결국 1788년 9월 중순쯤 ‘구’의회가 ‘신’의회를 소집할 날짜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주들이 헌법안을 통과시킴. 1789년 3월 상원과 하원이 만나 ‘권리장전’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였는데, 이 입법을 담당할 자로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권리장전’을 반대했던 ‘매디슨’이 선출되었음(p119). 왜냐하면 그는 한낮 ‘종이짝에 불구한 장벽’보다 연방정부의 제한된 권력 및 견제와 균형장치가 인민의 권리보호를 위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p120). ⑤‘심오한 정치가’이자 ‘학자’인 ‘매디슨’은 세가지 이유로 그의 생각을 바꾸게 되는데, ㉠지식인으로서의 ‘매디슨’은 ‘제퍼슨’의 확고한 원칙이 가지는 초월적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 ㉡정치평론가인 ‘매디슨’은 각 주 대표회의에서 기본권을 둘러싼 격렬한 갈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연방체제에 대한 저항을 진화하기” 위해 “일종의 유화적 희생”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음. ㉢마지막으로 ‘매디슨’은 새로운 하원의원에 당선되기를 원했는데, 그러기 위해 그는 종교적․정치적 자유권 쪽으로 쏠려 있는 그의 지역구 버지니아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음. 그는 “이 헌법은 이 헌법에 의해 구성된 첫 번째 의회에서 수정되어야 한다”라고 하며 정력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한 끝에 당선됨(p120). ⑤그 ‘첫 번째 의회’에서, 후일 미국 헌법의 첫 번째 10개 수정조항이 되는 ‘권리장전’ 법안을 추진하는데 ‘매디슨’이 발휘한 리더십은 미국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것이었지만 합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위업 중의 하나가 됨. 즉, 의회가 이익집단을 대변하고 이익집단들 사이의 연립을 형성하는 등 ‘거래적’인 일에 관심을 가졌던 시기에 ‘변혁적 리더십’이 일구어낸 역사적 과업임(p120). ‘매디슨’은 과거에 자신이 ‘권리장전’을 반대했다는 사실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서서 모진 딜레마에 직면해야 했으며, 그는 권리장전을 만들기 위해 상원과 하원의 양쪽에서 3분의 2라는 절대다수를 끌어모아야 했고, 다시 4분의 3 이상의 주로부터 찬성을 얻어내어야 했음(p121). ⑥‘매디슨’이 수정안 제안을 위해 하원에 등원했을 때, 하원의원들은 세금과 관세, 그들의 봉급을 놓고 토론하는데 열중하였으며, ‘좀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 반복해서 들었음. ‘매디슨’은 2주가 지난 6월 8일에야 발언권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반연방주의자들에게서 차용한 많은 주장들을 덧붙여 ‘권리장전’을 위한 진심 어리고도 감명 깊은 연설을 함. 이후 6주가 지나서야 안건심의를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8월 중순 드디에 하원이 수정안을 상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8월 24일에 17개 수정조항들이 동의를 얻음(p121). 그후 상원으로 올라가 17개 수정조항이 12개로 축소되고, ‘매디슨’은 ‘양원협의회’(conference committee)의 주요한 중재자로 하원에서 토론을 주도하고, 결국 12개 수정조항을 통화시켰으며, 1789년 9월 그것을 각 주에 제시함. 2년 뒤 최종적으로 10개 수정조항이 인준됨. 그는 수백개의 제안 중 영원불변하고 탁월한 원칙을 정제하였고, 반대파 반연방주의자와 연합하여 수정조항을 추진하는데 성공함으로 그를 ‘권리장전’의 ‘아버지’라 할 수 있으며, 자유권에 대해 절대적 원칙에 근거한 일관된 입장을 펴왔다는 점에서 ‘토마스 제퍼슨’은 ‘권리장전’의 대부라 일컬어짐(p122).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제임스 매디슨’이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권리장전’을 옹호하게 된 배경을 통찰력있게 설명하고 있음. 이와 같이 정치적 입장 변화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정치적 리더십’을 실추시키지 않고 유지해나가는 방법은?

역사를바꾸는리더십(제임스맥그리거번스)_24하우스(이현재)_5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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