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xZPMky3643M?si=ky8xZ7mvUbqx0K56
House Leadership School
□ 요약(6-2장 프랑스:리더십의 시련:역사상리더십의 사례-로베스피에르)
①프랑스 공포정치 기간동안 과격파들이 가장 가까운 동지를 배반하고 죽이며,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도 여자나 아이들을 익사시키는 등 리더십 연구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짐(p144). 연대기순으로 프랑스혁명을 되집어보면, 루이 16세는 1791년 6월 탈출을 시도했으나 국경에서 저지당해 다시 파리로 돌아오고, 국민의회의 공화주의자들은 왕정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짐. 한편, 루이 16세를 왕위에 복원시키려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의 공격 위협으로 국민의회 후속 입법의회(Legislative Assembly)는 사분오열됨.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전쟁 시작으로 감정이 격화된 상태에서 1792년 8월 급진파가 계속 주도권을 잡고 그 과정에서 2만명의 파리시민이 왕궁을 포위하는 등 혁명 속의 혁명이 일어남(p144). ②입법의회는 국민공회(Convention)로 대체되고 의원들은 보통선거 방식으로 선출되었으며, 1793년 10월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과 처형, 외국의 위협, 혁명의 의미를 둘러싼 급진파들 사이의 균열이 발생하면서 국민공회는 공포정치의 주무대가 되고 정치적 갈등은 살육의 정치로 변함(p144). 1793년 10월 급진적인 산악파(Montagnardistes)는 온건한 지롱드파(Girondistes)를 재판하여 처형했고, 로베스피에르파(Robespierreistes)는 상퀼로드 세력의 지도자격인 에베르파(Hebertistes)를 분쇄하고자 당통파(Dantonistes)와 제휴했으며, 2주일 후에는 당통파와 그 추종자들이 단두대에 서게 됨. 결국 귀족 후예, 농민반란군, 1789년 혁명 영웅, 탈기독교에 저항하는 승려 등 50만명 이상이 체포, 수만면이 처형됨(p145). ③프랑스가 1791년 ‘계몽주의적’ 헌법에서 공포정치의 암흑 속으로 빠져든 이유에 대하여 일부 역사가들은 당시 모든 급진파들을 자극했던 장 자크 루소 같은 사상가들의 절대주의적 이상을 광적이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실현시키려는 과정으로 설명함(p145). 다른 학자는 돌발적인 상황과 이에 대한 지도자들과 국민의 반응의 교차점에서 혁명의 급격한 방향선회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도 함. 한편 저자는 좀더 간단하게 모든 힘 중 가장 강력한 힘만이 프랑스혁명에서 보이는 것같은 광범위한 사회 변동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는데, 1780년대와 1790년대 초반의 프랑스인들의 고통스러운 궁핍과 필요에 따른 것으로 설명함(p145). ④외부의 적들의 위협이 높아지자 그 위협은 내부로 연결되어 외국인이나 왕당파 귀족들이 노동자와 농민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기근을 조장한다는 것으로 번졌고, 로베스피에르 같은 통치자는 그것을 이용했으며 굶주린 시민들의 격한 감정에 부흥해야 했기 때문에 급진적인 혁명가들은 그들에게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필요나 공포, 증오심에 끌려다녔음. 이러한 잠재적 추종자 중 대표적인 것이 ‘상퀼로트’라고 불린 급진 혁명의 보병부대였음(p146). 핵심세력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조직된 수만 명의 ‘상퀼로트’는 혁명의 급진화에 결정적 요인이었고, 1793년부터 1794년까지 파리를 통치하기도 하였는데 급진파의 주도세력은 그들을 자극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음(p146). “우리는 피를 흘려야 빵을 얻을 수 있다.”라는 어떤 목수의 말처럼 그들은 폭력을 수반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혁명적 진보에 불타는 신념으로 움직임(p147). ⑤‘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급진적인 ‘자코뱅당’의 핵심부는 매우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음. ‘헌법을 위한 동지들의 모임’(Society of Friends of the Constitution)은 1789년 의회 토론클럽으로 발족하였는데, 제3신분의 대표자들 및 반동주의적 귀족정치와 점증하는 급진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귀족들로 구성됨. 그들의 대중적인 이름 ‘자코뱅’(jacobin)도 그들이 파리에서 당분간 회합을 가졌던 장소의 명칭에서 따온 것임(p147). 1791년 6월 루이 16세의 탈출 기도가 실패하자 이 클럽은 왕정의 지속을 주장하는 쪽과 공화국 창건파로 분열됨(p147). 프랑스 내부의 공포와 증오가 심화되자 자코뱅다의 좌파는 클럽을 장악하여 온건파들을 숙청하고 거리의 혁명가들과 연합함. 1792년 후반쯤 급진파들은 전국에 걸쳐 수십만 명의 동조자들을 지배하게 되며, 규율을 강화하고 반대자들을 적극적으로 숙청함(p147). ⑥‘자코뱅당’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구축하면서 1789년의 혁명 이상과는 점점 멀어짐. 시작단계에 ‘자코뱅당’은 헌법의 원칙에 충실했고 도덕과 리더십에는 로마의 모델을 지향했으나, 공포정치의 시기에 이르러, 계몽주의적 이상은 독재와 탄압을 가리기 위한 기회주의적 장치에 지나지 않게 됨. 만약 단 한사람으로 ‘자코뱅당’의 헌신과 극단주의를 상징화한다는 그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가 될 것임. 그의 어머니는 어렸을 적에 죽고 아버지는 실종되었으며 친척의 손에 자라 ‘파리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제3신분의 대표로 선출되어 ‘국민의회’와 ‘자코뱅클럽’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함. 그는 원내전술의 대가였고, 싸고 풍족한 빵을 약속하는 국민의 수호자였으며, 지칠줄 모르는 연설가였음(p148). ⑦‘로베스피에르’ 자신은 국민과 일체감을 느낀다고 공언했지만 루이 16세만큼이나 일반 국민과는 괴리되어 있었고, 혁명의 적들로부터 혁명을 보위할 목적으로 1793년 설립된 ‘국가공안위원회’(Committee of Public Safety)에 그의 권력을 강화시키며, 중앙집권적이고 전제적인 혁명의 통치수단으로 공포정치를 설파하고, ‘자유’에 대하여 혁명의 적들을 분쇄하는 정부의 무제한적인 자유로 인식함(p148). 그는 상퀼로트와 충돌했는데 그들은 직접민주주의와 지방자치를 요구했지만 ‘로베스피에르’는 냉담하였고, ‘국가공안위원회’는 공포정치의 표적을 ‘상퀼로트’에게로 향함으로, 1794년 봄에 이르러 ‘혁명정부’는 살육의 괴물이 됨(p149). 한 생존자는 “그는 지배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신이 되어야만 했다.”고 진술하였으며, 결국 그는 실각되었고 ‘국민공회’에 충성했던 군인들이 자살 시도 끝에 기진맥진한 그를 단두대로 끌고가게 된 것임(p149). ⑧1789년부터 1791년까지 2년간 프랑스인들은 거의 교과서적인 혁명을 만들어 내었으며, 혁명의 지도자들은 인권선언의 약속과 헌법에 제안된 자유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싸우면서도, 그렇게 혁명적이지는 않았고 ‘왕정파’와 ‘혁명파’는 불안정할지는 몰라도 정교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심도있으면서 안정적인 변화를 향해 프랑스를 이끌고 있었음(p149). 그런데, 무엇이 그토록 끔찍할 정도로 잘못되었을까? 그 무렵 왕의 탈출 시도가 실패하면서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고 정치의 중앙에 어떤 리더십도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간극이 생겨났으며, 왕과 평민 양자의 균형 대신, 권력의 정상에서 새로운 인물들이 권력과 생존을 위해 투쟁하게 됨. 결국, 자유가 허가증에, 평등이 극단주의에, 박애주의가 살해주의에 자리를 내주게 되면서 절망적인 상태의 시민들은 생존과 안전을 원했고 구세주를 찾게 됨(p149).
● 비평
필자는 프랑스 혁명의 시기를 1789년에서 1791년까지의 이상적인 기간과, 그 이후의 공포정치의 시기를 나누어 설명하면서 그 원인을 1791년에 발생한 루이 16세의 도피사건에서 찾고 있음. 이와 같은 필자의 입장은 ‘혁명’의 정의에 대하여 인간의 자유와 평등, 생명권이 존중받는 온건한 의미의 ‘변화’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됨. 이러한 필자의 생각에 동의하며 ‘혁명’의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1791년 이후의 처참한 상황 혹은 공산주의 ‘혁명’에 따른 다수의 학살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여짐. 그러므로 ‘혁명’을 이끄는 ‘변혁적 리더십’의 이미지도 ‘리더’를 두려워하고 자신을 억압하며 자유를 제한하는 존재로 오용되었으며, 필자는 이 책을 통하여 오용된 이미지를 바로잡고 있다는 취지에서 필자의 시도가 잘 녹여진 것으로 보임
● 토의
본 책에서는 온건한 프랑스 혁명의 전단계에서 공포가 지배하는 후단계로 넘어가는 사이에 ‘왕’의 권위의 실추를 들고 있음. 즉, ‘혁명’이 온건하게(자연스럽게)이루어지기 위해 중간단계의 권력 유지가 필요하다는 것임. 현실정치에서 이런 역할의 기구가 있는지? 권력 이양의 적절한 중간단계 모습은?
□ 요약(6-3장 프랑스:리더십의 시련:역사상리더십의 사례-나폴레옹)
①‘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이 권력을 잡은 지 2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관광객들이 파리의 ‘앵발리드’(Invalides)를 찾아 그의 장식된 무덤을 굽어보는 이유는 그들이 책과 방송을 통해 ‘코르 시카’ 태생이라는 낮은 신분, 유럽을 정복한 뛰어난 군사작전, 황제 즉위, 엘바와 워털루를 접했을 것이기 때문임. 인간 나폴레옹에 관한 신화 또한 방문객들을 끌어드리는데, 그는 별도의 편지를 4명의 비서들에게 동시에 따로 불러주곤 하면서 정확히 자신이 멈춘 곳에서 다음 말을 이어갔다고 함(p150). 근본적인 가치에 토대를 둔 현실적이고, 의도적이고,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기준으로 리더십을 판단한다면, 나폴레옹은 어떤 종류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것인가? ②수십 년 후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그를 “고결하지 않은 인간치고는 인간으로서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결론지음. 그는 군사적 천재성으로 유명했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문민적 명성이 훨씬 오래 남아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매우 특유한 개성을 가진 행정국가의 통치자의 모델을 보였음. 그는 자신의 막료들에게 “나만이 국민의 대표이다”라고 소리쳤으며, 어떤 반대도 개인적 도전으로 보았으나, 그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억압하기 위해 폭력을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는 균형을 잡고 그들을 무력화시켜 외곽으로 밀어냄(p151). ③‘나폴레옹’은 검열을 실시하고, 도서의 유통을 통제하고, 극장의 수를 제한했고, 노동자들의 집회를 제한하고 거리의 집회를 억제하는 등 그에게 고결한 인격은 없었다고 해도, 한가지 지배적인 가치는 있었는데 그것은 ‘질서’였음. 즉, 그는 혁명 이후의 혼란 속에서 프랑스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안정’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질서’는 ‘나폴레옹’의 측면에서는 ‘국가의 생존을 위한 질서였음(p151). ‘질서’는 최고지도자의 정통성을 요구하는데, ‘나폴레옹’이 ‘국민투표’의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매우 창의적이었음을 보여줌. ‘국민투표’는 로마시대에 ‘국민과 상의’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고, 자코뱅당이 헌법 통과를 위하여 사용했었음(p151). ④1802년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 종신통령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국민투표를 하게 되는데, 당시는 비밀투표가 아니었던 점, 즉 보복의 위험성이 있는 점 등이 작용하였는지 모르겠지만 360만표의 “예”와 8272표의 “아니요”가 나옴. ‘나폴레옹주의자’들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국가 통합과 일치시키고 한목소리로 애국적 단결을 외침. ‘크리스토퍼 헤럴드’(Christopher Herod)는 ‘나폴레옹’이 “프랑스에는 단 하나의 당과 하나의 의지만 존재한다.”라는 말을 상기시키면서, “자코뱅당, 왕당파, 모두는 쓸데없고 이념을 접어둔 채 오로지 프랑스인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음. 이러한 ‘단일의지’(single will)는 단명에 그쳤지만, 그의 ‘민법전’(Civil Code)은 훨씬 오래 지속되었음(p152). 그 당시 법제도의 누더기 같은 짜깁기는 특히 재산권, 전통적인 특권, 상속, 고용, 결혼, 이혼 등의 문제에서 커다란 지역적 차이를 보였는데, 개인의 재산권 보호와 관련하여 ‘초기 혁명’은 개인의 권리를 강조한 반면 ‘민법전’은 가족과 개인간의 조화를 추구하였는데 아버지가 자식의 결혼을 막을 수 있었고, 혁명의 관대한 이혼조항을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고, 여성의 참전권은 제한되었고, 남편의 동의 없이는 계약의 당사자가 될 수 없는 등 보수주의적 측면에서 통일되었음(p153). ⑤‘나폴레옹’은 두루 의견을 구하고 법전문가들과 긴밀히 협조하였기 때문에 그의 ‘민법전’은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혁명사상을 전 세계에 보급하는 역할을 함. 역사가 ‘마르탱 리옹’(Martyn Lyons)은 “민법전은 교부주의와 봉건주의로부터 유럽의 해방을 약속하는 프랑스 정복사업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라고 이야기하였음(p153). 또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젊은이들이 법을 존경하지 않는 한 자신의 정권이 안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방자치에서 관리하던 중고등학교를 전국에 걸쳐 통합하기로 결정였은데, 1802년의 법은 45개 국공립학교에서 철저하게 획일화된 강의 계획에 따라 정부에서 고용한 교사들이 동일한 교재를 사용하도록 규정함(p153). 그러면서, ‘나폴레옹’은 언제라도 시간을 보고 프랑스의 모든 학생들이 지금쯤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자랑했다고 함(p153). ⑥‘나폴레옹’은 ‘제국대학’(Imperial University)를 설립하여 교육의 중앙집권화를 꾀하였는데 12년 후 국공립학교는 36개로 줄어들었음. ‘나폴레옹’은 징병제도 자체를 시민권의 시험대이자 시민사회의 이정표로 여겨 수백만 프랑스 젊은이들이 군복무를 하며 전유럽을 누비고 다님. 이에 대해 역사가 ‘이세르 울로크’는 “징병제는 가장 독소적인 시민의 의무였고, 지속적으로 전염병적 성격을 가지는 대중적 반발을 야기한 이슈였다.”라고 기록함(p154). ⑦‘징병제’는 모든 새로운 질서의 특징을 정확히 나타내었는데 ‘왕’의 신민이 ‘시민’이 되었으며, 그들은 조직화된 사회의 ‘징병’으로 만드는 것이었음. 그들은 ‘나폴레옹’을 추종해야 했으나 지도자와 추종자간의 상호교환의 결여되어 있었음(p154).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뿐 아니라 전 세계를 탈바꿈시키는 ‘변혁적 지도자’가 되려고 했으며, 세인트헬레나에서 “아마도 통일된 교육의 확대에 힘입어 유럽에 미국 같은 유럽단일국가가 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함(p154). 그의 이런 시도가 실패한 근본적 이유는? 이런 정치 스타일의 장․단점은?
□ 요약(6-4장-프랑스:리더십의 시련:역사상리더십의 사례-드골)
①프랑스인들이 지난 200년 동안 도덕적‧현실적, 때로는 치명적인 리더십과 통치술을 실험해왔는데 왕정과 혁명, 공포정치, 통령제(Directory), 왕정복고로 이어진 나폴레옹의 황제정, 7월왕정, 제2공화국, 나폴레옹 3세의 제2황제정, 파리코뮌(Paris Commune), 제3공화국, 비시정권(Vichy regime), 제4공화국, 제5공화국 등이 그것임. 프랑스 정치를 10년간 강의하면서 필자는 4개의 제도적 변화를 학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함(p155). 상기의 모든 체제 중에 제3공화국은 가장 낮은 기대 속에 출발했으나 오히려 1870년부터 1940년까지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다당제 및 의회주의와 관련해서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례가 됨(p155). ②사실 제3공화국은 조금만 압력을 받아도 폭발하는 위태로운 연합이었고, 국민들을 통합시키기보다는 분열시켰으며, 행정부의 리더십은 비효율적이고 불안정, 타협, 부패, 무능을 야기하며 장관들은 부침했고 수상들은 끊임없이 교체되고 양쪽의 극단주의자들은 번창하였는데, 제3공화국은 행위를 하든지 하지 않던지 ‘거래적 리더십’의 전형적인 사례였으며, 여기서 이상적 지도자는 ‘왕초 브로커’(master broker)였음(p156). 수많은 파벌이 존재하는 ‘국민회의’(Chamber of Deputies)에서 특정 파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대변하지 않는 것도 아닌 정당의 수뇌부들과만 거래하는 것은 부족했음(p156). ③그래도 제3공화국은 파나마 운하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추문들, 드레퓌스 사건, 제1차 세계대전의 재앙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제3공화국의 장부 비결은 뛰어난 유연성이었음(p156). 제1차 세계대전 후 좌파가 승리하여 1936년 ‘레옹 블룸’(Leon Blum)의 ‘인민 전선’(Popular Front)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혹한 리더십의 시험을 겪게 되었는데, 좌파의 승리로 전국에 걸쳐 노동자들의 연좌데모가 한창일 때 블룸은 그의 각료들과 주당 40시간 노동과 연간 2주의 유급휴가 법안을 밀어붙였으며, ‘인민 정부’는 1년밖에 유지되지 못했으며 ‘블룸’은 잘 단련된 공산주의 좌파들과 우익 급진파 사이의 간격을 좁혀줄 집단적인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했음(p157). 오랜 기간 제3공화국이 유지된 것은 인민들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들을 대립하게 만드는 통치였음. 그러나 ‘히틀러’와 ‘독일국방군’(Wehrmacht)이 제3공화국을 붕괴시킴(p157). ④제4공화국은 제3공화국과 복사판이었는데 나치의 지배에서 해방된 1년 후 새 헌법 채택 여부를 놓고 투표자의 96%가 찬성함. 그러나, 모든 실질적 권한이 의회에 집중된 새 헌법은 정부가 의회에 의존하게 만들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과거의 상원도 ‘공화국 위원회’(Council of Republic)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되살아남. 이러한 체제는 이전 체제와 같이 정치학자 ‘스탠리 호프만’(Stanley Hoffmann)의 말과 같이 ‘완벽한 브로커’를 원했음. 즉, “정책의 결과에는 무관심한 사람, 나중에 필연적으로 ‘팔아야 할’ 정책에는 절대로 손대지 않는 사람, 여러 집단들과의 협상에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을 가지는 사람, 의원들은 모두 평등하다는 윈칙을 꼼꼼하게 지키는 사람, 유권자와 의원들 사이에 신성불가침의 거리를 두는 사람을 지도자로 요구했음(p158). ⑤프랑스인들은 최근의 ‘비시정권’에 대한 반발, 제3공화국이 국민들에 의해 폐기된 것이 아니라 히틀러에 의해 분쇄되었다는 감상적인 이유 때문이었으며, 더 깊이는 정당의 두목들이 각자 나누어 먹을 수 있는 허약한 정부를 원했기 때문임(p158). 이러한 상황에서 부각된 걸출한 인물이 ‘샤를 드골’(Chrles de Gaulle)이었는데 그의 성격과 신념은 모두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의 무질서와 불안정에 대한 분노에서 형성됨(p158). ⑥‘드골’은 예수교 교단의 학교에서 경건함과 애국심을 배우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베르됭전투에서 부상당하여 사경 중에 방치되고 독일인에게 발견되어 포로수용소에 갇힘. 이후 그는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고집스레 방어하는 정태적 방어전략을 포기하고 미래의 육군을 위해 가동성과 기계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해 상관들의 심기를 건드림. 또한,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자유 프랑스 저항운동’(Free France Resistance)’를 통해 그의 리더십을 입증함. 그는 1946년 만약 행정부의 권력이 입법부에서 나온다면, 그 결과는 “정부를 단지 대표자들의 집단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시키는 권력의 혼란일 것이다. 만약 국가적 리더십이 무능과 무기력으로 와해되지 않는다면 프랑스 정부의 통합과 단결, 내부적 기강은 보존될 것이다.”라고 말함(p159). ⑦‘드골’은 전후 일련의 위기로 흔들리는 제4공화국을 예의주시하고, 자신이 예견했던 문제들이 일어나도록 조장했는데, ‘프랑스 국민연합’(Rightist Union of the French People)을 조직하여 자신의 세력과 좌파 사이에 있는 국민의회 중도파를 압박하고 의회를 무기력하게 만듬. 1958년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 독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장기간 아무 소득도 없이 고심하는 동안, 5월 13일 프랑스 군부의 우파 극단주의자들이 ‘알제’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드골에게 ‘공공안전정부’(Goverment of Public Safety“’를 이끌도록 요구하며, 이틀 뒤 ‘드골’은 “프랑스 정권을 수임할 준비가 되어있다.”라고 선언함(p159). ⑧공황에 빠진 ‘국민의회’는 국가적 수모와 내전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이며 잔혹한 지혜를 발휘하여 자신을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만든 ‘드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6월 1일 ‘국민의회’의 투표결과 ‘드골’은 수상에 취임하여 새 헌법을 입안할 권한을 위임받고, 젊은 변호사들 팀이 비밀리에 준비한 제5공화국 헌법을 입안하였는데, 그 핵심은 권력을 의회로부터 국가의 중재자이자 보호자인 대통령으로 옮겨오는 것임(p159). 7년 임기는 지방관리들인 8천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하는 방식으로 하고, 대통령은 총리를 지명할 권한과 의회를 해산하고 법안을 거부할 권리도 가졌음. 1958년 9월 새 헌법은 국민투표에 의해 80%의 압도적 지지로 비준되었고 석달 뒤 드골 역시 압도적 지지로 제5공화국 첫 번째 대통력으로 당선됨. ‘드골’은 종종 대통력직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통치의 목적 그 자체인 것처럼 국정을 운영하였으며, 신진 관료들이 포진된 행정부를 지휘하며 능률과 혁신을 가져왔음. 그러나 비정치화된 전문 관료 집단은 국민의 요구와 이해관계로부터 유리되었고,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사회 속에서도 ‘프랑스인의 빈곤’은 계속되었으며, 영세한 지방 제조업체들이 대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음(p160). ⑨‘드골’이 주장했던 리더십은 경제가 아니라 질서와 통합에 대해서였는데, 알제리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그는 안보와 안정이라는 근본적인 약속을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1968년 5월 초에 소르본대학의 학생시위의 확산으로 2천 명의 학생과 수백명의 경찰이 대치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해 역사가 ‘로버트 길디’(Robert Gildea)는 “권위주의, 위계질서, 관료주의라는 가치를 반영하는 드골 식의 축소판”이라고 기술함. 이에 대해 드골주의자들은 진압으로 사태를 처리하려고 하였으나 이것이 파리 시민을 학생 편에 서게 만들었고, 열흘뒤 노동자의 연대총파업이 생겨나며, ‘리옹’,‘보르도’,‘스트라스부르’로 확산되었고 결국 ‘드골’은 “나는 더 이상 내 정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인정함(p161). 그는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들에게 호소하기로 하고 지방정부 강화와 상원의 권한 제한에 관한 것이었는데 결국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통력직에서 사임하게 됨. ⑩‘리더십’에 대한 ‘드골’의 생각은 맹렬할 정도로 개인주의적인 것이었으며, 마치 ‘위대한’ 프랑스의 실현을 위해 ‘일치단결된 위대한 국민’을 인도하는 구세주같이 지도자, 추종자, 국가 사이에 거의 신비적인 일체감을 전제로하는 것이었으나, ‘스테프 호프만’의 말처럼 사람들은 “드골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음. 특히, 대통령이 국민보다 국가를 훨씬 더 사랑한다는 느낌을 줄 때 국가의 권력과 위신, 즉 드골의 지변이었던 “고귀하고 특별한 운명”은 공허한 것일 뿐임(p163).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프랑스 혁명 가운데 과감한 인권 선언과 투표권 부여를 통해 대중은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러한 프랑스적 실험의 핵심에는 예비 지도자와 잠제적 추종자간의 상호작용에 착란이 있었으며, 지도자가 인민들의 열정, 공포를 부추기며 나타난 힘에 대하여 그것을 진압, 회피, 혹은 국민투표 등 기만적 방법을 취하려 하였다고 함(p163). 서로 힘을 실어주는 리더십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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