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sSz71tqw3LY?si=P592xcM7hQW5DsD9
House Leadership School
□요약(7-1장 갈등의리더십:중국,영국-마오쩌뚱,볼링브로크,에드먼드버크)
①20세기 초 중국 후난선에서 태어난 ‘마오쩌뚱’은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창사’에 있는 학교에 들어간 후, 1918년 대학에서 무엇이라도 얻고자 베이징 대학으로 가서 도서관 조교로 일하면서 8명의 후난성 출신 학생들과 한 방을 사용함(p165). 그때 ‘마오쩌뚱’은 컬럼비아 대학의 ‘존 듀이’ 밑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베이징 대학의 철학 교수로 ‘백화운동’을 주도한 ‘후스’에게 용기내어 질문을 했지만 어떤 답도 듣지 못하였던 일 등을 겪으면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학습모임에 가담하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독점한 엘리트와 힘없이 고생하는 민중들 사이의 갈등을 연구함(p165). ②‘마오쩌뚱’은 1927년 후난성 시골마을로 돌아와 ‘소작농민운동’에 주목하게 되고, “중국 각 지역에는 수백만 명의 소작농들이 사나운 폭풍우 처럼 일어날 것이고, 그 기세는 놀라우리만큼 빠르고 맹렬하여 어떤 힘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이끌면서 그들의 선두에 서고자 하였음(p166). 그런데, 문제는 ‘갈등의 리더십’이었는데 ‘마오쩌뚱’은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그리스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희곡, 종교적 소책자나 ‘전쟁과 평화’와 같은 감동적 소설 등을 읽으면서 다른 모든 유형의 갈등을 뛰어넘는, 또는 그것들을 꿰뚫는 절대적 중심 가치를 지닌 보편적 갈등이 ‘경제적 갈등’이라고 봄.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는 ‘갈등’을 사회변화와 진보를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했음(p166). 또한,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하여 계급없는 사회가 도래하면 모두가 화목해질 것이며 갈등은 사라질 것이라고 봄(p167). ③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에 이것은 공산주의 비전의 관점에서 최고의 이상향이었으나, ‘마오쩌뚱’은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공산주의 사회라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완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갈등의 원인은 계속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임. 1949년 그가 중국을 장악하고 상대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불온한 사람들과 싸우면서 그의 생각은 입증되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는 투쟁을 통해 발전한다.”,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백화제방’을 허용하였으나, 결국 과감하게 소리를 높였던 수십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지방 오지로 쫓겨남. ‘마오쩌뚱’은 조직화된 반대세력의 출현을 꺾고, 공산당과 중국 사회 내의 저항을 분쇄하는 폭력적 장기간의 사상정화 운동을 펼치는 등 끊임없이 갈등을 조장함(p167). ④하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인간사회의 구조가 끊임없는 갈등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갈등을 조절할 뿐 아니라 그것을 생기 넘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돌리고자 하며, 패배한 측은 다음 선거에서 그들의 가치와 이해를 놓고 다시 싸우게 됨. 민주주의를 시험하는 기준은 ‘다수의 지배에 대한 승인’과 ‘소수의 권리’인데, 다수의 지배권리는 이것을 대체하기 위해 투쟁하는 소수의 권리와 조화를 이루며 이로 인해 정당화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의 거대한 엔진은 서로 대립하는 정당들과 그들의 리더십임(p168). 예를 들면, ‘피트’(William Pitt)의 ‘토리당’(Tories) 대 ‘폭스’(Charles Fox)의 ‘휘그당’(Whigs),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의 ‘보수당’ 대 ‘글러드스턴’(Gladstone)의 ‘진보당’, ‘링컨’(Abraham Lincoln)의 ‘공화당’ 대 ‘더글러스’(Stephen Douglas)의 ‘민주당’, ‘후버’(Herbert Hoover) 의 ‘공화당’ 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민주당’인 것임(p168). 정당의 리더십이 유권자에게 뚜렷한 선택지를 제시할 때, 선거에서 정당이 승리한다는 것은 변화를 위임받았다는 것과 통치행위의 방향을 잡았다는 것을 뜻함(p168). ⑤영국의 젊은 토리당원인 ‘헨리 세인트 존’(Henry St. John, 뒷날의 볼링브링크 경(Lord Bolingbroke))은 1701년 22살의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토리당의 초선위원을 지휘하고 4년만에 전쟁성 장관, 뒤이어 국무성 장관이 되었는데, 사실 그는 악명높은 바람둥이로 첫째 부인을 학대하고, 술을 많이 마셨으며, 난봉꾼들과 음담패설을 하는 등 덕성이 좋지 않았지만, 당시 공적 리더십과 사적 덕성을 구분하는 영국의 분위기에서 리더가 된 인물임(p169). 그는, 엄격한 엘리트주의자로 우수한 혈통의 상위계급이 명령을 내리고, 토지를 소유한 신사계급이 국가의 등뼈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음. 또한, 그는 동료 의원들에 대하여 “길잡이 양이 방울소리가 들릴 때까지 멀뚱한 표정으로 서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방울 소리가 들린 뒤에야 어딘지도 모르고 길잡이 양을 따라가는” 양떼에 비유하였음(p169). ⑥1714년 ‘볼링브로크’는 그와 ‘옥스퍼드 경’(Lord Oxford)이 왕위 계승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새 국왕 조지 1세에 의하여 면직당했으며, ‘옥스포드 경’은 2년 동안 런던탑에 갇혀 고달픈 생활을 하였고, ‘볼링브로크’는 프랑스로 도피했음. 그 뒤 그는 사면과 함께 자신의 정치 생명을 회복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나머지 정치인생 내내 ‘월폴’(Robert Walpole) 내각의 반대자로 남아있어야 했으며, 그는 정치적 반대에 대한 이론가가 되었음. 당시 영국인은 내전과 전쟁, 종교 분쟁, 왕위계승 시대가 지난 뒤 패배한 지도자가 승자에게 도전하는 능력보다는 안정과 평온함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또는 당파적인 반대는 수 세기 동안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으며, 이 때 필요했던 것은 이것을 정당화시켜줄 이론이었음(p170). ⑦부지불식간에 영국은 서서히 정치과정에서 반대를 제도화하는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는데, 첫 번째 단계가 왕의 통치와 관련된 비판에 대한 ‘관용’이었음(그러나, 왕위 계승처럼 비판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는 ‘관용’이 베풀어지지 않음). 다음 단계는 조직적인 반대의 등장인데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조직화되어 집단적으로 정부를 공격하였고, 이것이 겁나는 이유는 조직화된 집단을 “인간의 정치적 권리를 지키기”보다는 “국가의 안녕과 이익”에 반하는 “개인의 야망과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임(p170). ‘볼링브로크’는 오랫동안 야당 역할을 맡아 고생했기 때문에 야당의 역할에 대해 실감나게 기록하였는데, 그는 말년에 ‘반대’란 이기적인 동기가 아니라 애국심이라는 위대한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사고는 실제로 야당(그가 속한 ‘토리당’)에 반대를 한 것에 나타났으며, 그는 야당을 부패와 전제적인 통치에 맞서는 애국자들의 집단으로 생각함(p170). 이러한 야당은 현명한 군주와 손을 잡고 “당파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국가정신에 따라 행동”하도록 할 때까지 “존속하고 성장”할 것임(p171). ⑧‘볼링브로크’는 “애국심으로 가득 찬 군주에 의해 통치되는 자유로운 인민의 진정한 모습은 하나의 일반정신에 의해 생기 넘치게 되는 가부장제적인 가족의 이미지”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견해는 영국인들이 통치자와 반대자 모두를 포용하는 민주적 틀을 고안해내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도록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나, 그들의 생각과 실험은 계속되어 여러 정당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진 것은 중요한 일보전진이었음(p171). 물론 ‘볼링브로크’가 전혀 사심이 없이 생각한 것은 아니며, 그의 토리당 동료들은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었고, 그 당시 조직력없는 정당의 집단적 리더십보다는 유력한 명사들의 개인적 리더십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음. 예컨대 ‘로킹엄 후작’(Marquis of Rockinghum)은 해마다 ‘윌리엄 피트’와 그의 ‘토리당’에 대항하여 휘그당을 이끔(p171). ⑨1760년대와 1770년대 식민지 독립투쟁 등 분열을 가져온 몇가지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당과 반대당의 역할에 대한 초점이 모아지고 신랄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국왕에 맞서서 아메리카의 반역자들을 지지한 사람들이 탄핵되거나 반역자로 간주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음(p172). 1768년 ‘그래프턴 공작’(Duke of Grafton)이 받은 익명의 서신은 야당을 점점 더 많이 수용해가던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데, 그는 “의회 내에서 하나로 단결된 유능한 야당은 언제나 원내 활동을 고무시키고, 정부를 주의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며, 나쁜 법안은 낭패시키고 좋은 법안은 정화시킬 것이다.”라고 기술함(p172). ⑩풍부한 의회정치 경험과 정치구조의 도덕적 측면에 관한 정교한 이해를 겸비한 사람이 정부의 리더십에 정당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러한 사람이 ‘에드먼드 버크’였음. 그는 1729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프로테스탄트인 아버지와 가톨릭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트리니티 대학에서 수학하고 런던의 미들 템플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휘그당 의원들과 교류하고 1765년 하원의원이 됨(p172). 그는 파당적 투쟁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파당 속에서 “부분적 이해타산” 때문에 “일반선(general good)”을 함몰시키게 되고, 그 결과 “편협하고 고집불통이고 악랄한 정신”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도, 또 한편 그는 “악인들이 연합할 때, 선한 사람들도 제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한 사람들은 차례로 무너질 것이다.”라고 보기도 하였음. ⑪‘명예로운 결합’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버크’는 정당에 찬사를 보내었는데, 그는 ‘오늘날 불만의 원인에 대한 고찰’이란 책에서 ‘정당’을 “구성원 모두가 합의한 특정원칙에 입각하여 그들의 공동노력으로 국가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결합한 조직”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정당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가 됨. 정당 간의 치열한 경쟁은 강력한 리더십을 만들어 낼 것임. ‘버크’는 ‘도덕적 가치’가 정당리더십의 핵심이라고 하였는데, ‘정당’은 자유의 수호자이자 동시에 ‘수혜자’가 되는 것임. 어떻게 이 아일랜드인 ‘이방인’이 정당 및 그 연장선상에서 정당의 리더십에 대해 누구보다 강력한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그가 성숙한 도덕철학자이며, 유태인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국 대중의 정서에 편승할 수 있었다는 점이 더 큰 이유였음. 그는 정치 및 종교와 관련된 소논문과 신문기사를 열심히 읽는 정치인이었으며, 그는 좀더 공정하며 민의를 잘 대변하는 통치제제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간파함(p173.) ⑫‘버크’가 세상을 떠난 1797년 ‘소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의 토리당과 ‘폭스’의 ‘휘그당’ 간의 정쟁이 정점에 이르렀으며, 원칙‧이해관계‧기질을 둘러싸고 일어난 충돌은 최악의 경우에 정당 간의 갈등이 가져올 수 있는 모든 두려운 일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최선의 경우 “남자답고 명예로운 격률”에 기초한 “권력을 향한 고결한 싸움”이라는 ‘버크’의 기대를 입증하였음(p174). ‘피트’는 1783년부터 그가 죽음을 맞이한 1806년까지 주로 총리로 있었고, 반면 ‘폭스’는 내내 야당을 이끌었는데 ‘폭스’는 카리스마적 인물로서 항상 추종자들의 이해관계에 주의를 기울여 “일시적 또는 지역적 특징을 넘어선 최초의 광대한 정당결사체”인 ‘휘그클럽’(Whig Club)을 만듬. 문제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폭스’의 태도였는데 그는 여기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프랑스의 ‘자코뱅당’이 권력을 잡고 혁명의 확산의 조짐이 있을 때 그의 태도는 정치적인 독이 되었으며, 여당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야당으로서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능력을 상실하며, 휘그당의 반대가 결실을 보기까지는 10년이 흘러야 했음(p175). 이때 ‘그레이’와 그 일당이 말많던 선거체제의 민주화를 기획하고, 1832년 개혁법안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으며, 이는 원칙에 입각한 변화를 진작시키는 데에는 투쟁적이고 끈질긴 야당으로부터의 반대가 긴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임(p175).
● 비평
필자는 갈등의 리더십에 대하여 사회주의 체제와 영국의 정당제도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피면서, 정당제도를 통한 갈등이 정치체제화 하면서 안착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음. 본 장을 통하여 사회적 갈등이 건전한 방향으로 승화될 수 있는 정치의 형태는 양당제도가 잘 확립되어있는 공화주의 체제이며, 공산주의 국가의 형태에서는 결국 갈등이 폭력으로 진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유’의 가치가 억눌릴 수 밖에 없음을 알게되었음.
● 토의
본 책에서는 ‘영국’의 양당제가 갈등 가운데서 제도화되고 정착되어온 1700년대부터의 오랜 기간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음.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공화주의와 정당제도를 통한 갈등의 해소 혹은 발전적 방향으로의 촉매로서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 요약(7-2장 갈등의리더십:미국-휘그당vs민주당, 노예제도-1850타협)
①1840년 미국 휘그당은 1812년 미‧영 전쟁의 영웅 ‘윌리엄 해리슨’(William H. Harrison)을 내세웠으며, 엄청난 양의 사과술, 너구리털 가죽모자, 인형, 이동식 무대차, “티페카누를! 타일러를!(Tippecanoe and Tyler Too!) 슬로건, 신문광고 등 요란한 선거운동 결과, 비록 대통령선거전이 ‘너구리털 가죽모자(coonskin) 선거운동’이 되었지만, 민주당의 ‘마틴 뷰런’(Martin Van Buren)을 상대로 완승을 거둠. 이러한 1840년 대통령선거전에 대해 정책과는 관계없는 인신공격의 잔치판이었다고 역사가들이 조롱하기도 함.(p175). ②1840년의 대통령선거전은 또 다른 특징이 있는데, 그 선거에 해리슨이 승리함으로 민주당의 일당지배가 무너지고 양당체제가 다시 탄생한 것이며 야당이 강력한 집권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임. 이 선거와 관련하여 모든 주에서 2개의 정당이 조직되면서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하였음. 민주정치의 수준을 판단하는 첫 번째 기준은 권력을 잡고 있는 정치인들이 조직화된 야당을 용인하는지 여부인데, 1800년에 연방주의자 ‘애덤스’가 공화주의자 ‘제퍼슨’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줌으로 입증됨. 두 번째 기준은 정당들이 인만의 기본적인 요구를 반영하는 중대한 문제들을 놓고 서로 맞서고 있는가? 그들은 위대한 공적 가치에 근거한 도덕적 리더십을 제공하는가?와 같은 정당 간의 갈등의 성격에 관한 것으로 미국은 두 번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함으로 비극적 리더십의 실패를 가져왔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진 20여년간의 기나긴 정치과정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음(p176). ③이것은 정당들 간의 갈등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열된 정당 내의 파벌, 지역, 이념, 이해관계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었으며, 이것은 민주당과 휘그당 수뇌부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에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음. 그 수뇌부들은 엄청난 짐을 지고 어수선한 지역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어서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넘어져버릴 상황에 놓여 있는 것과 같았음(p176). ④‘제퍼슨’과 ‘잭슨’(Andrew Jacson)의 지지세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민주당은 전국에 걸쳐 득표율을 유지하였으며,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주축은 남부에 있었고, 그곳에는 노예소유주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었음. 민주당은 또한 북부의 몇몇 주에서도 강세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과격파’(Barnburners)로 불리게된 한 파벌은 노예제도의 확산을 반대했으며, 민주당의 통일성은 “만장일치로 노예제도가 당의 문제가 되지 않는” 주제로 남아있는 동안에만 유지됨(p177). 1830년대 초반 창당 초기부터 분열된 ‘휘그당’ 중 남부의 휘그당원들은 각 주의 권리에 애착을 가졌으며, 노예를 소유한 주의 권리에 대한 연방정부의 간섭을 부담스러워함. 북부에서 휘그당은 노예제도에 반대는 하지만 국가 의제에서 이것을 경제 문제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보수주의자인 ‘코튼 휘그’(Cotton Whigs)와 연방정부에 대한 ‘노예를 소유한 주 세력’의 영향력에 놀란 반노예제도운동의 지도자들인 ‘양심적 휘그’(Conscience Whigs)로 분열되었음(p177). ⑤휘그당과 민주당 모두 사슬에 묶여 있는 아프리카 미국 흑인이라는 불붙기 쉬운 문제는 외면한채 대외정책, 관세제도, 이민자, 철도확장 등 상대적으로 편안한 기존의 문제들을 놓고 싸웠으며, 이와같이 휘그당과 민주당이 전문적으로 했던 것은 파벌과 이익집단의 요구사항들 사이에서 중개를 하는 ‘거래적 리더십’이었음(p177). 즉, 당시 최고의 자리에서 전성기를 누린 휘그당 상원위원 ‘헨리 클레이’(Henry Clay)와 ‘대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 민주당 상원의원 ‘스티븐 더글라스’ 같은 협상가와 장사꾼들이었음(p178). ⑥전성기에 중개인들은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여겨지는 ‘1850년의 타협’을 훌륭하게 만들어내었는데, ‘클레이’가 타협안을 제시했고, 의회는 중개과정을 통해 이것을 갈고 닦아 신중하게 균형잡힌 몇가지 협정들을 만들어 내었음. 그 내용은,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하고, 다른 주들은 노예제도의 허가 여부를 주민투표에 따라 결정함. ‘도망노예환송법’(Fugitive Slave Act)를 강화하며, 수도인 워싱턴에서는 노예매매는 금지하지만, 그곳에서도 노예제도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것이었음. 이러한 타협은 워싱턴에서 이루어진 10년간의 교활한 거래에 딱 들어맞는 클라이맥스였음(p178). ⑦‘1850년의 타협’은 모든 파벌에 부분적 만족을 주려는 것이었으며, 북부 휘그당이 말한 바와 같이 “이 문제에 대한 더 이상의 정치적인 운동을 억누를 시간”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타협안은 적대적인 마음을 가라앉히기는커녕 북부와 남부 모두를 자극했는데, 남부인들은 결국 노예폐지론자들에 양보한 꼴이 되었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공공연하게 연방 탈퇴를 거론하고, ‘양심적 휘그’는 노예제도 허가여부를 주민투표에 따라 결정할 경우, 노예제도가 새로운 주들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으며 ‘노예를 소유한 주 세력’에 의한 영구적인 지배의 전조로 보았기 때문에 휘그당에서 탈당하여 다른 대안적인 정당을 모색하기 시작함(p179). ⑧‘윌리엄 수어드’(William H. Seward) 상원위원은 “이것은 반대하려는 힘과 지속하려는 힘 간의 억누를 수 없는 갈등이며, 미국이 언젠가는 완전한 노예소유의 나라가 되든지 또는 완전한 자유노동의 나라가 되어야만 하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애석해 하였음. 이와같이 민주당과 휘그당이 오랫동안 부정하려고 했던 것은 틀림없이 노예제도를 둘러싼 갈등의 ‘억제 불가능성’이었음. 노예제도를 둘러싼 문제들이 더 이상 지역적이며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을 때, 정당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통일이라는 ‘더 높은 법’에 호소하였으나 그러한 통일의 대가는 무엇일까? 역사가 ‘윌리엄 브로크’(William R. Brock)는 “타협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애국심에 호소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오랜 가치들을 포기했다.”라고 기술하였음(p179). ⑨이와 같이, 1850년의 타협은 양당체제의 도덕적 파탄이었으며, 인간을 노예로 삼은 것에 대해 두 정당의 지도적인 인물 중 누구도 자유, 평등, 정의 같은 ‘오랜 가치들’의 이름으로 반대하지 않음. 휘그당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양심적 휘그’는 북부의 민주당원들과 함께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음. 새로 창당된 정당은 “도덕적 토대 위에서 행동하겠다.”라는 당 창립자들의 서약과 함께 현재 노예제도에 반대한다고 단언하였으며, 공화당 지도자 중의 하나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선언했듯이, 공화당의 “적극적이고 활기 넘치는 행동원리”는 “노예제도 자체에 대한 혐오, 즉 노예제도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사회적‧정치적 제 측면에 대한 혐오”였음(p179).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휘그당과 민주당이 ‘노예제도’라는 근본적인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피상적인 것만 다루어 결국 양당제의 근본 기능인 ‘갈등의 리더십’의 모습을 잃어버렸음을 역사적 과정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줌. 우리사회의 근본 갈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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