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45강 리더십강의-30(상호거래적리더십)

presentlee 2024. 11. 3. 07:42

https://youtu.be/P8jLVdaheaU?si=QmdHPuxbHmQgAStl

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4부 거래적 리더십


□ 요약(제10-8장 오피니언 리더십-정당 리더십Ⅱ)


①‘그린백커들’(Greenbackers), 노동자, 농민, 인민주의자들과 그 외의 제3정당은 두 주요 정당을 대체하지는 못했지만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들었음(p476). 두 정당은 모두 응집력이 분열되는 동안 ‘보수적 리더십’아래 남아 있었는데, 1896년,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의 연설에 의해 깨어난 민주당의 토지재분배론자, 서부, 인민주의자, 남부사람들은 전국대회에서 동부의 보수주의자와 소위 개혁가로 알려진 ‘황금벌레’들로부터 통제권을 탈취하였는데, 민주당은 인민주의자의 공격을 흡수하고 이를 이용한 대신 큰 대가를 치러야 했음(p476). ②지리적 중요성에 대한 ‘브라이언’의 호소력이 부족했던 탓으로, 미시시피 동쪽에 있는 북부의 모든 주와 뉴잉글랜드의 모든 카운티, 동쪽 공업지대 대부분의 노동자 세력을 잃게 되었는데, 민주당의 분파들이 영구적으로 과격해지고 최소한 농업화하는 동안, 민주당은 소수당으로 남았으며, 1912년 공화당이 분열되기 전까지 대선에서 승리할 수도 없었음(p476). 이것도 공화당의 반대파에 대한 냉담한 충고와 함께 이루어진 부분적인 재편성이었는데, 처음 두 번의 재편성은 반대세력의 여세 때문에 일의 진척이 늦었지만, 선거에서 중요한 결실을 맺었고, 세 번째의 재편성은 급변하는 경제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매우 어렵게 이루어졌지만, 수십년 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선거에서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냄(p476). ③이것이 바로 1930년대의 ‘루스벨트의 재편성’이며, 이것과 처음 두 재편성과의 차이는 정당 수뇌부와 선거전 ‘리더’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하는데, 1920년대 말, 세계경제 대공황이 미국의 경제를 휘어감기 시작했을 때, 두 주요 정당의 ‘리더십’은 보수당의 손 안에 있었음(p476). 양당 모두 처음 20년 동안은 진보적인 추세에 반응해 왔지만 당시 양당의 지배적인 ‘리더십’은 입헌제의 거국내각, 낮은 세금, 내각 경제, 엄격한 개인주의, 주의 권리, 그리고 1920년대에 나타난 유사한 정책과 표어로 내건 목표를 지지하고 있었으며, 양쪽 정당에서 소수 ‘리더’ 그룹이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음(p477). ④‘자유공화당’은 ‘윌리엄보라’(William Borah) 상원의원, 오레곤의 ‘촬스맥내리’(Charles I. McNary)와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전통을 지닌 주지사들을 내세웠고, 민주당에서는 장관직을 맡고 있는 ‘알 스미스’(Al Smiths)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상원의원 ‘데이빗 월셔’(David Walshes)와 ‘로버트 와그너스’(Robert F. Wagners)를 내세움(p477). 승산 있는 이슈를 찾고 있었던 야당으로서 민주당은 모든 정당의 진보 세력을 연합하여 공화당의 보수주의에 대적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에 기대를 걸었을 지도 모르는데, 민주당은 그런 전략적 재주를 부릴 만한 단합력은 물론, ‘리더십’과 정치신조마저 결여되어 있었으며, 1928년 ‘알 스미스’를 지명한 사건은 민주당이 낡은 정치로부터 탈피함을 의미했지만 ‘브라이언’의 경우처럼 ‘운좋은 전사’가 선거를 승리로 이끌 만큼 설득력을 지니지는 못함(p477). ⑤3년간의 실업이라는 고통과 절망, 무책임한 정부 등의 상황은 1930년대 초에 급진적으로 변화하였고, ‘루스벨트’는 1932년의 캠페인에서 민주당을 통합했으며, ‘Bull Moose’(소와 무스의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성격, 또 큰 덩치를 빗대어 한 말)와 같은 공화당원의 지지를 얻는데도 성공함(p477). ‘루스벨트’의 캠페인은 너무 조심스럽고 계산적이어서 진보적인 공화당원을 설득하기에 무리가 있었지만, 선거를 승리로 이끌기에 충분하였음. 그 후 ‘후버 정권’ 이후 마지막 경제위기가 닥쳤는데, ‘루스벨트’의 놀라운 ‘리더십’은 100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경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회복되어 ‘르위스’(John I., Lewis), ‘롱’(Hrey Long), ‘커플린’(Father Coughlin) 등 새 ‘리더’들을 필두로 노동자, 농민, 고령자층, 실업자 등의 불만세력이 정치적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소요와 혼란이 가중되었음(p477). ⑥1935년 ‘루스벨트’는 그 다음 100일 동안 좌파적 입장으로 돌아섰고, 1936년 캠페인에서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어서 결국 전국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1936년에 민주당은 명실공히 자유주의 정당을 표방했고, 공화당은 진보적 노선을 포기하면서, 세 번째 정당 재편성의 전성기로 기록됨(p478). ‘루스벨트’ 공화당원들이 뉴딜 계층으로 편입되고 민주당의 보수세력이 이탈하면서 정당체계는 어느 정도 재정비되었는데, 이것은 부분적인 재편성이었지만 특별한 중요성이 내제되어 있으며, 1936년 집권 후 루스벨트는 연방대법원 구성 계획안이나 주로 남부사람들로 구성되어있는 의회의 반뉴딜 민주당 세력을 축출하는 등 논쟁의 여지가 있는 개혁을 진행시켰으나 대통령에 의한 정계개편은 남부지역과 북부 몇 개의 주들에는 별로 영향이 없는 듯하였음(p478). ⑦보수적인 남부 상원의원 대다수는 ‘사회주의적’인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민주당에 남아있는 것에 대해 만족했으며, ‘루스벨트’의 좌파 참모세력은 이를 이용해 그들을 위험한 좌파쪽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함(p478). ‘루스벨트’ 편에서는 “축출” 실패 이후, 의회에서 남부 민주당을 회유하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 말까지 민주당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도시적인 북부사람들과 지방을 근거로 한 남부 사람들 사이의 어색한 동맹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듯이 보였는데, 이러한 혼동상태는 유럽과 아시아에 팽배해 있었던 폭력과 루스벨트가 자신의 대외정책을 위해 남부출신 민주당원 대부분의 국제 공산주의 입장이 합쳐진 남부지역의 지지를 필요로한 데 부분적인 원인이 있었음(p478). ⑧그러나 주된 이유는 선거와 여론에서 발휘한 ‘루스벨트’의 ‘리더십’ 때문이었는데, ‘루스벨트’는 여론에 관한한 숙련된 관리자였으며, 만약 수치로 평가할 수 있다면,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능숙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p478). 그가 “난로가에서의 가벼운 담소” 방식을 통해 대중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항상 기자들이 얻는 만큼 자신도 얻어 가는 것이 있겠끔 기자회견을 이끌어가는 그의 능력을 보면, 그의 의사소통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지만, 그는 기교가 이상이었고, 기술혁신, 입법상 제안, 작지만 깜찍한 뉴스거리, 난국에 대한 대처, 논쟁거리가 될 만한 개혁안, 국내외 여행 등으로 끊임없이 뉴스에 영향력을 행사함(p479). ⑨그의 제안은 다른 정치인과 ‘리더’들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상황에 따라 설득하기도 하고 순종하며, 진보하고 퇴각하고, 고압적으로 요구하면서도 타협하는 재능은 정당이란 시스템 안에서 적어도 한 순간이나마 가장 분열된 세력까지 통합할 수 있는 힘이었음(p479). ‘루스벨트’가 여론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여론에 대해 꾸준하게 연구해 왔다는 점인데, 그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더 많이 우편물을 분석했고, 각 행정부의 보고서를 수합했으며 수많은 신문기사를 스크랩하고, 그 당시 알려졌던 것보다 더 많이 투표와 관련된 여론 조사자료를 수집했으며 이 자료를 면밀히 분석함(p479). ⑩‘루스벨트’는 시간감각이 뛰어났으며, 반대세력의 활동이 활발할 때는 그들과 맞서지 않으려고 조심했으며, 반대세력의 활동이 뜸해졌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재빨리 대처했고, 그는 가끔 대중이 개혁에 대해 피로를 느낄 때마다 숨돌릴 여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음(p479). 때로 여론에 천천히 대응할 때, 그의 호전적인 부하 장교들은 걱정스러워하며 투덜거릴 정도였으나, 신속하게 행동을 취할 때도 있었고, “난 고양이 같습니다. 나는 민첩하게 일격을 가한 다음 편안히 쉬지요”라고 말한 적도 있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바로 ‘여론형성 리더십’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데, ‘루스벨트’는 이 관물을 통과하는데 실패한 적이 거의 없었으며, 주 상원의원으로 두 번, 주지사로 두차례, 대통령직에 네 번 당선되었던 노련함이 이를 뒷받침함(p479).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여론형성의 리더십을 설명하기 위하여 1900년대 초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 세력구도의 재편을 잘 기술하면서, 특히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여론을 다루는 기술을 잘 묘사하고 있음. 이와같이 우리 정치 현실 속에서 여론형성의 리더십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리더십’을 개발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모습이 필요한지? 


□ 요약(제10-9장 오피니언 리더십-프랭클린 루스벨트)


①‘루스벨트’는 미 상원의원 임명권을 얻으려는 졸렬한 계획아래, ‘태머니’(Tammany)파(민주당 일파)의 지지를 받은 후  ‘보자’와 겨루었을 때와 1920년(민주당 퇴조기), ‘콕스’(James M. Cox)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을 때에만 실패를 맛보았을 뿐인데, ‘루스벨트’는 상당한 실력의 공화당 운동가들을 상대로 선거에 이기고, ‘루이스’(Lewis), ‘커플린’(Coughlin), ‘스미스’(Al Smith, 1936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휠러’(Burton K. Wheeler), ‘루스’(Henry Luce)와 같은 다른 ‘여론 리더’를 상대로 한 만만찮은 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둠(p480). ‘루스벨트’가 국민여론을 움직여 다수의 표를 거둬들일 수 있게끔 한 공통적 특성들은 그가 정당을 재편성하는 데에 있어서 비효율적으로 작용했는데, 선거마다 잇따른 그의 성공은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민주당을 결집하는데 있어서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함(p480). ② 필요한 것들을 즉각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쓰러질 듯하고 제각각인 당의 결속력을 증진시키기보다 대통령 자신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게 훨씬 수월하였는데, 대통령은 분명 1938년에 있었던 몇몇 주와 지방선거에서 보수적인 민주당 후보에 대항하여 선거전에 개입했으며, 이 조치는 정치적 입장 차이를 넘어 ‘루스벨트’와 개인적 친분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용기를 줌(p480). 그러나 핵심 목적은 바로 ‘정당 숙청’에 있었는데, 대통령은 정치적 자원을 자유주의적 민주당원을 위해 근본적인 토대를 장기적으로 건설하는 데 쏟아붓지 않고, 개인적이고 무계획적이며 한탕주의적인 방식으로 개입했는데, ‘루스벨트’를 뛰어난 전략가로 만들었던 그의 기민함, 다양한 역할들을 총괄할 수 있는 능력, 개인적인 매력, 여론을 다스리는 능력, 능숙하고도 드라마틱한 선거운동은 일관된 정치적 프로그램 아래 강력하고, 장기적이며, 목적지향적인 강력한 대중운동을 이끌 수 있는 특성이 아니었음(p480). ③이런 모든 것들은 구체적인 문제를 즉각적으로 다루는 활동적인 정치가의 자연적인 경향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다만 ‘루스벨트’ 자신은 근본적인 취약점과 당의 개편 필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1932년 어느 밤에 ‘터그웰’(Rexford Tugwell)에게, “여보게 렉스, 우린 워싱턴에서 8년이란 시간을 갖게 될 테지. 그 시간이 끝날 때 우리는 민주당을 갖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네. 하지만 우린 진보적인 민주당을 가지게 될 거야.”라고 말함(p481). 그는 당의 개편 가능성에 대한 ‘익스’(Harold Ickes)와 이전의 진보당원들(Bull Moosers)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고, 그런 후 1944년 그는 그 자신의 정당에서 중심세력과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그때까지 외면당해 왔던 ‘윌키’(Wendoll Willkie) 문제를 다소 간접적이지만 분명하게 제기함(p481). ④‘루스벨트’는 그의 고문이었던 ‘소제만’(Samuel Sosenman)에게 ‘윌키’와 대화하라고 명령하면서, “생각해보니 민주당은 자체의 반동적인 요소를 남부지구에서 제거해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그리고 공화당에서 자유주의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우리는 자유당과 보수당이라는 두 개의 실질적 정당들을 가져야만 한다. 지금에 이르러, 정당은 반대자들에 의해 분열되고 있다”고 말함(p481). ‘루스벨트’는 “우리는 이번 가을 선거가 끝난 후 바로 그 계획을 시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으며, ‘윌키’는 흥미로웠지만 의심스러웠고, 그는 ‘루스벨트’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설득하여 선거기간에 공화당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했고, 그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만 선거 한 달 전에 죽고 말았음(p481). ⑤그 후, 민주당 당수와 당수로 추천된 사람들은 ‘루스벨트’의 전략적 곤경을 이어받았지만, 선거에서 항상 승리했던 그의 직감을 이어받지는 못했으며, 그들은 북부에 있는 ‘루스벨트 연합’(보다 많은 흑인들의 참가를 포함하여)을 강화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적인 남부 자유주의자의 지지를 포기해야 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는데, 왜냐하면 “승자 독식제”라는 대통령 선거인단의 메커니즘에 의해 북부의 민주당 당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임(p482). 선거에 승리한 민주당 후보자들은, ‘케네디’를 제외하고는 남부의 대통령 선거인단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나, 선거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남부는 어쨌든 포기되었고, 반가톨릭주의가 ‘스미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것처럼 남부의 주들은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민주당 후보자들을 지원하는 대신 공화당이나 제3당의 후보자들을 지원함(p482). ⑥민주당 당수와 후보자는 선거에 대한 위험보다는 의회에서 자신들에 대한 위협 때문에 남부를 배제시키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보수성향 민주당원들은 상하원에서 투표의 균형을 유지했으며, 하지만 의회다선 의원들의 조작에 의해 그들의 영향력, 특히 부정적인 영향력은 확대되었음(p482).

 

● 비평
  필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통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선거에 승리하는 과정과 사람들이 당을 지지하는 방식에 대하여서 잘 기술하면서, 민주당에 적합한 인물(지미카터)가 나오기 전까지 민주당원들이 공화당원들이나 제3자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재미있는 현상을 이야기함.

 

● 토의
  필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정당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세력이 있는 상황 속에서 정당의 승리를 위해 리더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 요약(제10-10장 오피니언 리더십-민주주의)


 ①주와 지방차원에서는 민주당 후보자를 지지하지만 전국적 차원에서는  지지하지 않는 남부민주당 수장들을 비겁하고 위선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제3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부의 흑인과 자유주의적 활동가의 출현으로, 위대한 뉴딜 재편성 시대는 그 시행과정의 중간 시점에 좌초된 것처럼 보였으나, 여전히 주나 지역적인 차원에서 재편성은 아주 느린 속도로 지속되었음(p482). 대부분 주와 지방의 ‘리더’와 ‘하부 리더’의 결정이 걸림돌이었는데, ‘전국적인 리더십’이 부재한 가운데, 당의 재편작업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계속 진행되었으며, ‘트루만’, ‘케네디’, ‘존슨’을 비롯해 다른 ‘리더’들의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일단의 ‘하부 리더’들은 민주당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였음(p482). ②많은 젊은 사업가들은 공화당을 지지했고 낮은 세율, 저비용과 최소한의 사업규제를 내건 공화당의 정책을 선호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소속이 되거나 제3당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공화주의를 받아들였고, 남부를 가로지르는 변화는 불완전하고 평탄하지 못했는데, ‘트루먼’시절 민주당의 시민권 운동 전개 이후 24년간 보수적인 민주당은 의회내 상당수에 달하는 남부 지역의 의석수를 차지했고, 여전히 민주당의 연장자들과 의회에서의 반다수당의 정책으로 인해 호응을 받아왔는데, 공화당과의 어지러운 대립이 계속됨(p483). 세 번째 대대적인 재편성은 앞선 두 기간에 비해 왜 지지부진하였을까? 그것은 진보주의자들에게 노예제도 폐지론자들과 폐지반대론자 또는 ‘윌슨’, ‘루스벨트’, ‘폴레트’(Robert la Follett, Sr.)와 같은 용기 있고 초월적인 ‘리더십’이 없었던 것에 기인하였으며,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이유일 뿐이었음(p483). ③주된 이유는 20세기 동안 미국의 정당체제를 정복해 왔던 변화에 기인하는데, 그 이전 정당은 비교적 잘 조직되어 있었고 통합했기 때문에 전국과 주 및 지역의 정당 사이에 상당한 일체감이 존재했음(p483). ‘선퀴스트’에 따르면, “19세기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휘그당, 민주당, 혹은 공화당원은 주와 지역 정치에서 자동적으로 같은 정당에 소속되었고, 그 역도 마찬가지였지만, 1932년 이후, 유권자들은 지방선거의 경우보다는 대통령 선거에서 매우 다르게 행동했는데,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의 뿌리는, 이상한 일이지만, 두 번째 재편성 기간, 즉 1896년, ‘브라이언’(Bryan)을 둘러싸고 벌어진 첨예한 지역적 균열에서 찾을 수 있으며, 전국적으로 상당한 지역에서, 그 선거와 후속 선거를 통해 ‘굳건한 남부’와 ‘굳건한 북부’에서 수없이 많은 일당지배의 경쟁없는 선거구가 탄생했을 때, 정상적인 정당 균형은 무너지고 말았음(p483). ④선거에서 항상 승리하는 강력한 정당과 승리의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는 군소정당의 결합은 타락하고 생기 없는 정치를 고무시켰는데, 이같은 상황 전개는 거칠고 단정치 못한 정당 정치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강력한 공격과 함께 비당파적이며 독립적인 정치행위에 대한 선호와 일치함(p483). 그리고 이같은 경향은 선거구 보수와의 ‘담합’(trust)과, 당기구(machine). 그리고 독점주의자를 몰아낼 수 있었는데, 개혁가들은 자신의 행동이 갖는 함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치료법은 더 나은 민주주의다”라는 전제하에, 정당구조를 해체해 나가기 시작하였고, 많은 주에서 직접적인 예비선거제도가 실시됨(p484). ⑤이는 후보자 ‘지명’에 대한 통제권을 당조직이나 정당으로부터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유권자 대중에게로 이동시켰는데, 몇몇 주에서는 투표자에게 정당별로 후보자 명단을 적는 칸을 폐지함에 따라, 동일 정당에만 계속해서 기표하는 연속 기표가 줄어듬(p484). 당의 지명을 받은 후보자는 선거에 출마할 수 없는, ‘비정당적’선거가 많은 도시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무원법은 정당의 후원을 근절시키고자 했으며, ‘무소속’은 쟁점(issues)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도 ‘인간적 리더십’과 당의 강령에 충성하지 않는 시민적 덕성으로 각광을 받았음. 19세기에 활발했던 당파적 신문은 20세기의 비당파적이며 독립적인 신문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출현은, 분명 비당파적이었으며 정부에 의한 정치적 편향성을 차단해 나감(p484). ⑥후보자는 당조직의 개입없이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게 되었는데, 주와 지방 선거는 정당에 대한 연속적인 투표를 더 어렵게 만들기 위해, 대통령 선거의 경우보다 수년이 더 걸려 정착되었으며, 중앙집권적 ‘정당 리더십’은 이른바 황제법령(Czar Canon)의 폐지에 따라 하원에서 급격히 약화됨(p484).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 정당체제의 대대적인 해체를 야기했는데, ‘번햄’(Burnham)은 “정당들이 유권자에게 통제력을 급속하게 상실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요약했으며, “지난 수십년 동안 두당, 특히 민주당이 겪었던 손실은 주로 자신들의 수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정치권 내에서 활동하던 계층에 집중되었고, 이것은 선거선택과 다른 정치적 행위에서 정당이 중재자로서 점진적으로 해체되는 방향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분할투표(split-ticket) 증가와 스스로 무소속이라고 분류하는 사람들 수의 현저한 증가는 이러한 경향의 주요한 지표임(p484). ⑦다른 지역에서처럼, 미국에서 ‘여론 리더십’은 많은 차원을 포함하는데, 다시 말해서 필요, 요구, 태도,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본질의 다양성에 따른 여론의 구조, 다양한 차원의 조직, 재편성 또는 해체, 그리고 이러한 변수들의 결과로서 선거 승리와 패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부의 구성과 권력의 배분을 포함함(p485). 이와 같이 상호작용하며 균형을 만들거나 해치는 가장 역동적인 힘은, 강력한 ‘리더’가 반대편에 서 갈등 상황에서 대립되는 세력을 수용해서,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인데, 본질적으로 보면 정당은, ‘리더’와 ‘하부 리더’의 조직인데, ‘위대한 리더십’을 위한 조직화된 여론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음. ‘리더십’은 결과적으로, ‘리더’가 여론을 동원하고 지도하며, 정당을 조직해 재편성하고 다시 조직하며, 우연히 선거에서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선거를 이기도록 하는, 커다란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제기함(p485). ⑧정당의 ‘여론 리더십’은 ‘리더’와 당원들의 유동적이고 자발적인 결사체를 결합시켜 상호 공동의 목표에 헌신하도록 하는 특정한 형태의 ‘상호 거래적 리더십’임(p485). ‘리더’가 유권자들의 피상적인 여론이나 자질을 반영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위대한 리더’가 그 나라의 심장부가 아니라 뒤처진 시골이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지역에서 탄생했다는 정도에 의해 더욱 극대화되는데, 예를 들면, ‘히틀러’의 기원인 오스트리아와 ‘스탈린’의 기원인 조지아를 제외하더라도,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이고, ‘로이드 조지’(Loyd George)는 웨일즈 출신이며, ‘맥도널드’는 스코틀랜드 출신임. ‘디즈레일리’(Disraeli),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드골’(de Gaulle), ‘레닌’, ‘마르크스’,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혹은 중하위층 계층의 자손임(p485). ⑨어떤 ‘리더’는 그들의 추종자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그 자신의 인간됨 속에서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리옹’(F.S.L. Lyons)이 지적한 것처럼,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였던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은 중산계층의 당을 이끄는 귀족이었고, 가톨릭을 동원한 신교도였으며, 지주를 혐오하는 정당의 당수이면서도 그 자신이 지주였음(p486). 이슬람교의 추종자들에게 ‘위대한 리더’로 알려진 ‘지니’(Jinnah)는 그 자신이 이끈 운동의 가장 오래된 관습의 몇몇 항목들을 스스로 위반했으나, 이러한 리더들은 자기 자신과 동료들이 가지고 있던 대의명분의 올바름에 대해서는 뚜렸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대의명분에 대한 ‘리더’와 추종자의 결함(engagement)은 ‘리더십’이 피상적으로 표출된 여론의 전통적인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었음(p486).

 

● 비평
  필자는 역사 속에 나타난 다양한 인물들의 ‘리더십’ 속에 나타난 ‘거래적 리더십’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으며, 특히 ‘여론 리더십’을 통한 ‘거래적 리더십’의 한시적인 한계점에 대하여 ‘리더십’과 추종자들의 대의명분의 합치를 통하여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잘 설명하고 있음

 

● 토의
  우리 정치 현실 속에 찾을 수 있는 리더십, 추종자의 ‘대의명분’이 있는지?

리더십강의(제임스맥그리거번스)_24하우스(이현재)_여론형성리더십.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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