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ZlB_J8C15-M?si=KMgOqev5RKGTGRMU
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4부 거래적 리더십
□ 요약(제12-6장 정당 리더십 : 체임벌린, 윈스턴 처칠)
①의회주의적인 ‘리더십 원칙’은 자유당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휘그당 출신 지도부는 그러한 원칙에 대한 직접적 도전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그리하여 중산계급과 노동계급에서 점점 더 많은 투표권을 얻어감에 따라, 의회의 자유당 의원들은-보수당 의원들과 마찬가지로-그들이 당정책과 웨스트민스터를 주무를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그들은 불가피한 딜레마에 봉착하였음(p533).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내면서 그들에게 정당 정책에 많은 영향력을 허용하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자유당 체제에 대한 도전은 성공한 사업가였다가 급진주의적인 정치인으로 변신한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에 의해 이루어짐(p534). ②미국 민주당의 테머니홀에서 본뜬(그의 비판자들에 의하면) ‘코커스’ 시스템을 버밍햄에 도입했는데, 당시 막 성공한 ‘체임벌린’은 전국자유연합의 수립을 추진하였으며, 이 연합은 자유당의 평당원을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인 조직으로서, 급진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이를 추진할 후보들을 지명하며, 당에 대한 개혁안 실천을 위한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었음(p534). ‘체임벌린’과 연합은 일부 정치적 성공을 거두긴 했어도 자유당의 민주화운동은 ‘글래드스턴’(Gladstone)의 계속적인 ‘리더십’, 당을 양분시킨 아일랜드 문제, 그리고 의회가 우위에 서는 영국 정치전통 등과 계속 뒤얽혀 싸워야만 했으며, 20세기 자유당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 리더십 원칙은 종전 그대로 남아있었음(p534). ③정부 내의 당 소속 ‘리더’들이 당직을 맡고 있는 ‘리더’들보다 계속해서 우위에 서는 일이 불가피한 것일까? 의회 내 당세력이 전체 세력의 움직임을 통제해야만 할까?(p534).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등장한 노동당 ‘리더십’은 그럴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었는데, 그들은 기존 양대 정당들이 의회 내에 진출한 일부 도당들에게 당의 하부 조직이 자신들의 정강을 보조하고 자신들이 선거에서 승리하도록 이끄는 존재쯤으로 치부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사실을 조소하였으며, 그들은 ‘체임벌린’과 ‘처칠’이 중앙집권화된 권력에 반기를 들다가 실패한 것을 섭섭하게 여기는 한편 즐거워 하였음(p534). ④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목표에 대한 신념을 견지하는 노동당 ‘리더’들은 그들의 운동-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정당-목표가 민주주의를 현창하고, 정부 ‘리더’들이 평당원 중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당 리더’들에게 종속되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음(p534). 이는 노동당에서 수립한 두 가지 주요 결정들 중 하나인데,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 사회주의자들, 급진적인 정치결사들이 자유당-그리고 때때로는 보수당-과 연대하려는 시도에 실패한 이후, 노동계의 이익증진을 위해서는 이 양대 정당에서 떠나 그들 자신의 정당을 결성해야만 한다는 결정에 이른 것임(p535). ⑤독자적이고 자율적이며, 민주적이고, 기층을 대표하고, 계급을 기반으로 하며,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당, 말하자면 변혁 운동 세력의 결성은 금세기가 시작될 무렵 대부분 노동계 ‘리더’들의 기본적인 목표였음(p535). 노동당은 보수당이나 자유당에 비하여 그들의 정당을 ‘민주화’하고 의회 내 세력에 대해 평당원의 통제를 기하는 데 훨씬 용이했으며, 노동당 지도부는 먼저 재야에서 활동하다가-개혁운동, 차티스트 운동, 노동조합, 협업운동, 사회주의 운동 등-그 이후에 의회로 ‘진출’했던 것인데, 그들은 결코 의회의 일부 파벌이 외연적 확장을 거듭한 산물은 아니었음(p535). ⑥‘매켄지’(McKenzie)는 노동당이 사회경제적 개혁운동을 의회로 진입시키기로 결정한(그 외의 부문으로 진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노동자 소속 하원의원들과 의회 내 노동당 자체가 애초부터 ‘운동의 봉사자’로 간주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회 내 노동당이 의회 밖의 노동당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운동’의 민주적 구조를 입증하는 증표라는 것이, 노동당 내에서는 하나의 신조가 되었다.”(p535). 오랜 저항의 세월 동안 이 강령은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통치의 책임, 중재에 나설 필요성, 그리고 권력의 유혹 등을 겪게 마련인 수상이나 각료들을 전혀 배출하지 않았기 때문임(p535). ⑦1924년과 1929년에서 1931년까지의 기간-즉, 연립정부에 참여했던 시절-에 의회 내의 노동당 ‘리더’들은 평당원들의 조직에 대해 자신들의 독립성을 강조한 바 있는데, 그러나 평당원측의 불만이 심했음에도, 당시에는 의회 ‘리더’들을 굴복시킬 수 없었음(p535).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될 당시 남아 있던 실제와 수사(修辭)간의 대립 문제를 들자면, 보수당 수상 ‘윈스턴 처칠’과 유명한 사회주의 이론가 ‘래스키’(Harold Laski)간의 대립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노동당에게 ‘비민주적인’ 행태를 비판받아온 보수당으로서는 수년 동안 노동자 측에 대해 의회 내의 당원들에게 통제선을 두는 것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의회 우월주의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답변함(p536). ⑧이 문제가 당시 과도 정부를 이끌던 ‘처칠’의 뇌리에 스쳤을 때, 그는 노동당의 영수 ‘애틀리’(Clement Attlee)를 초청하여 포츠담 회담에 자신과 동반하도록 함(p536). 당시 당중앙위원장이었던 ‘래스키’는 ‘애틀리’가 단지 옵서버로만 참석해야 한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노동당이 집권층의 책임을 나누어 맡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음. ‘래스키’는 여기에 덧붙여 노동당은 포츠담 회담에서 결의될 사항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할 자격이 없다고 쏘아붙였는데, 이에 처칠은 ‘애틀리’의 회담 참석이 바람직한 것이냐고 묻고, “노동당의 당헌은 중앙위가 노동당 수상을 그들 앞에 세워놓고 평화 협상에서의 행동을 꼬치꼬치 따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고 비아냥거림(p536). ⑨이후 ‘처칠’은 그의 공격 수위를 더욱 높여 ‘노동당 코터스의 독재’를 경고했고, ‘애틀리’는 이 비난에 반박했으며, 그는 중앙위의 권한을 인정하면서도 중앙위가 노동당 수상의 행동을 견책할 권한까지는 없다고 역설했음(p536). ‘애틀리’는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는데, 노동당의 승리 이후 개최된 자축파티에서 ‘애틀리’는 자신이 내각을 구성하도록 국왕의 부름을 받았다고 선언했고, 그는 이 제의를 수락하기 전에 중앙위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으며, 그의 동료들은 이 선언에 경악했는데, 특히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래스키’의 놀라움이 누구보다 컸는데, 노동당 수상을 갖기 이전에는-또는 가질 수 있다고 여기기 이전에는-그 독립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p536). ⑩‘맥도널드’(Ramsay McDonald)의 유년기는 독립적인 행위로 점철되어 있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에서 멀지 않은 농어민 촌락의 방 2개짜리 집의 ‘거실’에서 사상아로 태어남(p536). 소년시절 그는 ‘칼라일’(Carlyle), ‘러스킨’(Ruskin), ‘헨리 조지’(Henry George)를 탐독했고, 결국에는 마르크시즘을 신조로 삼게 되었음(p537). 구직차 브리스톨에서 거주한 이래로, 그는 사회민주연합의 복음주의적 사회주의에 경도되었으며, 이어 런던으로 옮긴 그는 일자리를 찾던 몇 주일 동안 주로 집에서 보내주는 오트밀로 끼니를 이었음(p537). ⑪1880년대 중반 그는 선거정치에 입문, 페비언 사회주의 연맹(영국의 점진적 사회주의 운동. 고대 로마의 장군 ‘파비우스’(Fabius)가 ‘한니발’(Hannibal)에 맞서 지구전법을 썼던 데서 이름을 따옴. 1884년 극작가 ‘쇼’(G. B. Shaw), 사회학자 ‘웹’(S. J. Webb)등을 중심으로 런던에 운동본부를 창립하였으며, 의회정치의 테두리 내에서 점진적 사회개량을 추진하여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음)에 가입했으며 영국의 ‘자유당’, ‘진보당’, ‘노동당’ 수뇌들을 직접 만나보는 기회를 가졌음(p537). 그는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자산가인 여인과 결혼했고, 그녀는 그가 놀고 먹으며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음(p537).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정당 리더십에 대하여 영국의 정치상황 및 시대적 배경과 연관시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체임벌린’과 ‘처칠’을 비교하면서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성격과 그 ‘리더십’에 대해 잘 묘사하였음.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현실 가운데서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을 대표할 수 있는 ‘리더십’이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그 사람은 누구인지?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리더십’의 부재 이유는?
□ 요약(제12-7장 정당 리더십 : 맥도널드)
①‘맥도널드’가 정치활동의 수준을 확대했던 시기는 노동당이 보수당과 자유당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던 이 상황에서 하나의 무시못할 정치세력으로 발전하고 있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었음(p537). 그는 1890년대 초 독자적, 사회주의적, 노동계급적 조직으로서 독립노동당이 창립된 후 이 당을 무대로 활약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하원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1천 표도 못 얻고 입후보자 중 꼴지로 낙선했으며, ‘맥도널드’는 독립노동당의 기반이 부실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 당은 중도노선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그리고 모호한 사회주의 이념 때문에 노동조합에 비판받고 있었음(p537). ②노동조합 대표들, 노동당, 사회주의 결사들, 그리고 폐비언 사회주의자들은 1900년 한 영수회담에서 만나 “의회 내 정책에 대해 찬반을 표명할 노동계 영역을 수립할 수 있도록” 노동계 대표위를 구성하기로 합의함(p537). 이 노력에 깊숙이 개입해 있던 ‘맥도널드’는 대표위원회 초대 간사를 맡았고, 그해 그는 다시 한 번 하원의원 선거에 낙선했으나, 이듬해에는 런던 시의원이 되었고, 5년 뒤에는 마침내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06년 그는 노동계 대표위원회를 노동당으로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함(p538). ③‘맥도널드’는 주로 세련되지 못한 노동조합 ‘리더’들로 구성된 노동계 블록에 속한 보통의 의회 내 ‘리더’ 중 하나로 보였는데, 하지만 중도파 노조 ‘리더’ 들과 교조주의적 사회주의자들 모두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그의 능력은 노동운동에서 그가 두각을 드러내도록 해 줌(p538). 이내 그는 의회 내 노동계 세력의 총책이 되었고, 그는 영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했으며 평화론자로서 칭송과 비방을 한몸에 받았으나, 일단 영국이 참전한 이상 승리하리라는 것을 예상한 그는 전쟁 수행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는 전쟁 무드에 압도된 상황에서 선거에 대패했으나, 1922년 다시 하원의원에 당선됨고 동시에 노동당 총재에 취임함(p538). ④한때 막강했던 자유당이 분열‧몰락하고 보수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했으나, 노동당과 자유당의 의석수를 합치면 보수당을 능가했음(p538). ‘맥도널드’는 자유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신정부의 조각 요청을 얻게 되었는데, ‘맥도널드’는 정치경력 초창기부터 자유당과 연정을 주장했는데, 독립적인 제3당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였으며, 이제 그는 양당간의 노선차이가 아직도 극명함을 깨닫게 됨. 노동당과 자유당의 연립정부는 1년도 안 되어 보수당에 정권을 내주어야 했음(p538). ⑤‘맥도널드’는 수상에 취임한 후 처음 몇 개월간 ‘리더십’ 자질을 과시했으나, 초선의원들 측의 불신을 샀으며, 수년간 노동당은 만약 집권하더라도 당 소속 의원 ‘리더’들은 궁극적으로 재야 운동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해 왔으나, 초선의원들측의 불신을 샀음(p538). 수년간 노동당은 만약 집권하더라도 당소속 의원 ‘리더’들은 궁극적으로 재야운동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해 왔으나, ‘맥도널드’는 그의 내각 인선과 정책 결정에서-마치 자유당과 보수당 ‘리더’들이 그렇듯-독자성을 보였으며, 이 늙은 ‘사회주의자 리더’들이 화려한 런던 사회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으며 ‘귀족주의 세력’에게 당을 넘겨줄 위험마저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당원들 사이에서 나온 지 이미 오래였음(p539). ⑥선거에서의 승패가 어찌되었든, 노동당은 이 시기에 ‘핸더슨’(Arthur Henderson) 같은 인물의 탁월한 ‘리더십’에 힘입어 조직력을 놀랄 만큼 확충하였으며 1929년의 총선에서 조직의 힘은 십분 발휘되었음(p539). 1923년의 선거에서 노동당 지지율은 두배로 올랐으며 결국 보수당을 누르고 다수당이 되었고, 다시 한 번 ‘맥도널드’가 수상직에 취임했고, 그는 이번 내각 인선에서 노동당 지도부 그리고 심지어 노동당 의원들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당 수뇌부의 동료들 중 친분이 두터운 몇몇하고만 의견을 교환해 결정하였음(p539). ⑦한동안 ‘맥도널드’ 수상은 노동당의 몇몇 호전적인 세력-그가 거침없이 비난하는, ‘말로만 번지르르한’ 사람들-과 노동당의 기반이 되고있는 노동조합 세력 사이에서 중도(中道)를 걸으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이 새로운 노동당 수상은 국내문제보다 대외문제에 더 관심을 쏟고 있었음(1924년 그는 수상직과 함께 외무부장관직을 겸임했음)(p539). ‘정부 리더’로서 ‘맥도널드’는 원내 노동당의 지속적인 충성을, 그리고 전체 노동운동의 충성과 불간섭을 요구했는데, 노동계 원로들은 그가 과연 얼마나 당에 충성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심했으며, 거의 시초부터 그는 반대당의 ‘리더’들과 자본가들의 이익에 타협하려는 태도를 취했음(p539). ⑧1929년 그가 수상으로서 처음 하원에서 연설하였을 때, 그는 협력의 필요성, 제반의견의 개진 등을 역설하면서 하원의원들이 “서로 투쟁하는 각개부대의 소속원들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의원들로”행동해야 할 의무를 강조함(p539).
● 비평
필자는 정당 리더와 정부 리더에 대한 비교와 또한 정당의 리더십의 모습에 대하여 ‘맥도널드’와 ‘노동당’의 20세기 초반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잘 설명‧해석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짐. 한편, 현재 영국의 노동당의 집권 및 리더십의 배경 역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생각됨
● 토의
현재 한국 내에서의 정당간의 갈등과 국회와 정부 간의 갈등 가운데에서 영국의 노동당과 ‘리더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나 해결책이 있다면?
□ 요약(제12-8장 정당 리더십 : 영국의 정당(노동당)을 통한 리더십 구조)
①영국이 점차 불황의 늪으로 빠져듦에 따라 ‘맥도널드’는 이 같은 유의 지지에 필사적으로 매달렸으며, 실업 확산과 금보유량이 급속한 감소에 직면하여, 그는 사회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의 몰락을 이용하려들지 않았음(p539). 대신 기업들과 금융계 인사들, 그들의 동맹세력인 보수 정치인들의 협력을 원했으며, 경제위기는 파운드화 방어를 위해 지출삭감, 특히 실업보험예산의 삭감문제를 제기하도록 했는데, 의회와 정당에서 수상에 대한 충성은 매우 강력했으며, 맥도널드는 노동당이 보수주의적인 재정정책을 취하도록 하는 데까지 거의 성공했음(p540). ②그러나, 마침내 노동당 지도부의 주력이 그의 노선에 단지를 걸었고, 자기 자신의 당에서 수모를 겪은 ‘맥도널드’는 국왕에게 사임의사를 표명했고, 국왕이 그의 사표를 반려하자, ‘맥도널드’는 신속하게, 그리고 비난을 감수하면서 그의 옛 노동당 동지들을 버리고(그와 행동을 같이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반대당에 접근, 새로운 ‘국민’ 정부를 구성하였음(p540). 노동당 당직 ‘리더’들은 그들의 옛 ‘리더’가 자신들을 버리자 ‘망연자실하여’ 멍하니 있었으며, 그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을 밝히면서, 맥도널드에 대해서 “내일이면 런던의 모든 공작님네들이 내게 입맞추기를 원할걸”이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음(p540). ③그는 정치가로서의 경력 내내 ‘변혁적 리더십’의 전도사에서 ‘거래적 리더십’의 실천가로 가끔씩 변신하곤 하였는데, 한동안은 마르크시즘을 가지고 주물럭거린 후 좌익 정강정책을 실현할 생각으로 좌익이 일단 집권한 후 그 변혁적 영향력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연대에서 태도를 분명히 하기도 함(p540). 그러나 그 이후 그와 그 외 노동당 ‘리더’들은 자유당과의 연정에 동의했으며 그리고 1931년에는 다시 보수당과 연대하였고, 그는 1914년에 전쟁무드를 힐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했으며 생애의 대부분을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데 바치고서도 정작 그 위기가 도래했을 때는 그것을 구하려 애썼으며 사회의 재구성을 이끌 신당창당에 힘을 기울였으면서도 사회의 재창조자보다는 정상배(政商輩)로서 활동했음(p540). ④‘맥도널드’의 정치경력은 이념상으로는 사회변혁을 꾀하되 실천적으로는 부르주아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거래를 행하는 서구 좌익 정당들의 딜레마를 체현하고 있는 것임(p541). 스스로 보다 철저하게 결속함으로써 이 딜레마를 해결한 공산당측의 비웃음을 사면서 노동계 인사들은 ‘맥도널드’의 배반에 대해 오랫동안 비난했지만, 그들도 ‘정당 리더십’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평당원측의 궁극적 우위를 주장하면서도, 노동당 내에서는 원내 노동당측의 우위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역설적이게도, 이 정당은 최소한 여타 서구 민주국가들의 정당들에 비해 계속 당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이유는 노동당 정책은 토론에 따른 결정의 대상이 되고, 노동당 지도부는 노동계로부터 선발되는데 이때 후보자와 정책대안에 대한 평당원들의 폭넓은 참여와 상당 수준의 풀뿌리 ‘리더십’이 실현되기 때문임(p541). ⑤이는 부문‧지역별 경향들과 전당대회와 전국 평의회에서의 이념,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앙당 지도부 내각부문에서와 이들 지도부 부문들과 원내 당세력간의 효과적인 조율에 의해서 지지됨(p541). 상당히 특별한 영국 정당들 특히 노동당의 ‘리더십’ 구조의 성격은 이 정당체계를 여타의 것들과 비교할 때 분명해지는데, 프랑스 중앙당들의 ‘리더십’은 오래 전부터 자유로운 독립성, 강령의 취약성, 그리고 사적인 정치활동의 재간 등으로 유명하였고, 이 같은 성향이 가장 풍부한 정당은 급진적인 사회당-보통 급진당이라고 불리는 정당-이라 할 수 있음(p541). ⑥프랑스 정식 정당 중 최고의 역사를 지닌 급진당은 1930년대의 비극적인 시기에 영향력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전략적으로 우익 정당과 좌익 정ᄃᆞᆼ의 중간에 자리잡고, 프랑스 혁명의 전통 대부분을 이어받았으며, 초기에 격렬한 반(反)교권 노선을 취했던 까닭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p541). 또한 급진당은 1930년대 당시 프랑스를 휩쓸고 있던 국내외의 우환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정치 리더십’을 행사할 가능성을 갖고 있으리라 기대되었는데,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정상배들 즉, 권력이 있으되 지도력은 발휘하지 않는 ‘리더’들의 정당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음(p542). ⑦이 정당의 ‘정부 리더’들은 ‘정당 리더’들에 대해 우위를 지켰지만, 그것은 대체로 당조직이 너무 취약했기 때문이었으며, 지방 당위원회들은 자기 당의 하원의원들에게 거의 힘을 쓰지 못했음(p542). 대체로 정당인들은 자당 의원들이 파리에서 자기 지역 또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당인들을 돕기 위해 행정부에 간섭하는 한, 그들의 원내 의정활동에 대해 참견하지 않았는데, 이 정당 조직원은 매우 많은 편이었지만 강력한 전국적 지지를 이끌어내기에는 충분히 많지도,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았고, 이 정당의 고위 결정기구는 ‘리더’들보다는 ‘정부 리더’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음(p542). ⑧1935년, ‘라무르’(Peter Lamour)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정당의 중앙위는 2,388명의 멤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중 1,406명은 전‧현직 하원의원, 상원의원, 시장, 장관 또는 그러한 고위직 후보자 출신이었음(p542). 전당대회는 이보다 좀 더 평등지향적이었으나, 그 진행절차는 사전에 중앙당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 과정에서도 역시 원내 ‘리더’들의 영향력이 막대했으며, 간혹 당 중앙위에서의 반발이 일어났어도 대체로 교묘한 협상과정을 거쳐 무마되곤 했음(p542). ⑨표면적으로는 이러한 힘의 분산이 ‘원내 리더’들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도 한계를 갖고 있으며, 원내의 급진파 ‘집단’은 단순히 도식적으로 보면 좌파, 중도 좌파, 중도파, 보수파로 분류될 수 있는 일단의 이념상의 분파와 파당들로 구성되어 있음(p542). 역사, 지역, 이익집단들에 의한 균열들이 이 분파들 위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따라서 의원들을 당의 통제에서 해방시키는 중앙‧지방당으로부터의 바로 그 자유가 원내 ‘리더들’, 각료들 또는 수상의 의회 초재선 의원들에 대한 통제력 행사를 어렵게 만듬(p542). ⑩정당의 느슨함은, 정당의 원칙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로 나뉘어 나타나는데, 원내 급진당 ‘리더’들 뿐 아니라 급진당 파벌의 ‘리더’들도 구성원 각각이 ‘리더’들, 동급자들, 추종자들, 타정당의 리더들, 중앙‧지방 당직자들, 그리고 외부의 경제 관련 이익집단들과 흥정과 거래를 하며 이합집산을 되풀이함에 따라 그들의 원내활동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음(p543). 가장 큰 문제는 급진당이 만년 소수당으로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좌든 우든 다른 정당과 합작해야만 한다는 점에 있는데, 급진당 ‘리더’들에게는 당 노선의 선명성을 추구하다가 고립의 서러움을 맛보느니 일부 각료를 배정받으면서 정치적 성과와 이익을 향수하는 편이 더 바람직해 보일 수 밖에 없음(p543). ⑪이 모든 조건들이 협상적이고 전술 위주이며, 정치제도의 제세력들을 극복하기보다는 조정하려고 하는 ‘리더십’에 유리함을 주는 것들이었는데, 이는 대승(大乘)적 움직임과 교묘한 균형의 ‘정치’였으나, 결국 비활성과 정체성의 ‘정치체’만 남기고 끝나고 말았음(p543). 아마도 ‘라무르’가 결론지은 바로는, 많은 ‘리더’들 자신이 “의아할 정도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대부분은 정직했고, 많은 사람들은 대단히 성실했다. 일부는 심지어 훌륭한 프랑스인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교양과 재능을 놀랍게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공화 귀족주의의 즉, 그 표면적인 무용성(無用性)에도 불구하고 공화정에 상당한, 그리고 지속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념의 일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정당도 더 나은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는 못할 것이며, 이는 그들의 실패를 더더욱 의미심장하게 만든다.”(p543)
● 비평
필자는 ‘정당 리더십’에 대한 설명을 프랑스 정치를 통해 풀어가며 당시의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통해 당시 ‘리더십’의 정황들을 살필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짐
● 토의
‘원내 리더’와 ‘원외 리더’ 사이의 차이점 및 ‘정당 리더’의 적정 위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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