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YEltQAOQQZA?si=xnYb0T56m8kS6wiz
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3부 변혁적 리더십
□ 요약(제6-2장 지적 리더십-도덕적힘으로서의 이념 : Tension Points)
①‘필로소페’(philosophe)들이 인간의 본성, 이성 및 선에 대한 인간 잠재력에 아무 생각없이 낙관적인 견해를 주장했다고 본다면, 격렬한 지적 전투와 흥분의 시대였던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들을 오인하게 되며, 그들은 토론과 서신을 통해 이 문제와 관련된 고민을 거듭했고, 인간의 도덕적 잠재력에 대해 신뢰한 초기 르네상스의 낙관론이 배태한 아이들만은 아니며, 긴 전통의 극단적 회의주의의 상속자이며, 때때로 구제불능일 정도로 인간 본성을 비관하는 사람들이었음(p257). 이 전통은 ‘마키아벨리’, ‘루터’, ‘몽테뉴’의 ‘반르네상스’에서 절정을 이루며, ‘홉스’, ‘파스칼’, ‘라로슈푸코’(La Rochefoucauld) 및 ‘라신’(Jean Rachine)의 저작들에서 반복되어 나타남(p258). ②‘스피노자’는 인간이 “증오와 질투에 휩싸이는 것은 자연적”이라고 말했으며, ‘푸펜도르프’(Pufendorf)는 인간은 “짐승보다 사악하며”, 법이 없다면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인간의 비합리성, 억제할 수 없는 감정, 난폭한 이기심 등이 서로 어울리면서 18세기 지배적 논조를 만들어 내었으며, 그 시대가 안이한 낙관주의 시대는 아니었음(p258). ‘필로소페’들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환상은 없었지만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큰 희망을 가졌음. ‘크로커’(Lester Crocker)는 “계몽주의 시대의 낙관주의는...사회의 합리적인 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고 썼으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핵심적인 노력은 합리적인 자기이익을 통해 부패한 자기이익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하였음(p258). ③‘니버어’(Reinhold Niebuhr)류의 사람들은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재개하며, 자유주의자들은 특히 그들의 순진한 낙관주의와 이성, 선의를 포기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원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함(p258). 인간본성 중 최악의 요소를 억제하기 위해 최선의 요소로부터 도출되는 제도를 고안하는 것, 합리성과 관용, 대범함으로, 비이성, 잔인성 그리고 이기심의 충동을 극복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삶이 지닌 사회적 맥락을 바꾸는 것 등은 강제적인 이념에 융합됨. 18세기 프랑스의 지적 리더들-‘필로소페’, ‘백과전서파’ 그리고 계몽주의 문필가-은 사회의 주요 병폐에 대해 의견을 같이 했지만 수단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는데, 그들은 전체주의체제를 주장했을 수도 있고, 무정부주의를 주장할 수도 있었음(p259). ④실제로는 어떤 ‘필로소페’도 극단적인 대안을 주장하지 않고 온건주의자였으며, 그들의 대안들은 어쨌든 독자적 논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기대하는 종류의 사회에 대한 ‘대안’과 ‘가능성’이 ‘낡아빠진 것들’(I’ infame)을 대신하여 부상함(p259). ‘필로소페’들은 자신의 목적과 필요한 수단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이 미지의 땅에 자신을 걸었는데, 무엇보다도 그들은 역사와 인간본성의 관계가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만약 교육을 개선하고 확대하며, 정부를 개명시키고 사회협약을 훌륭하게 만듦으로써, 그러한 사회적 환경하에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탄생될 수 있다 해도, 그리고 대부분의 ‘필로소페’들이 동의한 일반적인 명제에 따라 그럴 수 있다 해도 어떻게 현존하는 감정과 인간의 악행, 미개하고 파렴치한 위선적인 제도들을 초월하여 그 사회가 형성될 수 있는가?(p259) ⑤어떤 새로운 사회체제도 현존하는 뿌리깊은 사회악을 수반하고, 그 결과 새로운 사회체제가 형성되는 동시에 더러워지고 왜곡되는 것은 아닐까? 이 점에 있어서 ‘필로소페’ 들의 희망은 대체로 인간이 개명된 이기심에 따라 행위할 수 있다는 그들의 견해에 의존하였으며, ‘자기이익’은 ‘중농주의적 원리’ 아래 모든 인간의 이익과 권리들을 보호하려는 하나의 체계에 의해 실현될 수 있으며, 모든 개인적 이익들 사이의 갈등과 타협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가 떠오를 것임(p260). 또는 ‘루소주의자’들의 용어를 빌자면 ‘자기이익’은 인류의 협동적인 일반이익의 보호와 향상, 강화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인데 1)‘중농주의적 원리’는 사기업체제와 정부 내의 개별적 이익의 대표를 시사하고 있으며, 정부 내의 개별적 이익들은 하나의 입법부에 의해 표현되고, 2)‘루소주의 원리’는 경제에 있어서의 집단적인 결정, 그리고 강력한 행정부를 통해 정부에 있어서 최고의 일반이익의 표현을 시사함(p260). ⑥18세기 후반 여타이 숱한 관념들이 프랑스의 지적인 대지를 떠돌고 있었고, ‘필로소페’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수단과 내재해 있는 전제들에 대해 분열되어 있었으며, 인간 선악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에도 불구하고 ‘대안’들을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음(p260). 이 대안에는 ‘도구적 수단들’(정치전략, 정부구조, 헌법상의 권력배분)이 진술되어야 하고, ‘구체적 수단들’(행정적인 장치, 세밀한 교육개혁)이 상술되어야 하는데, 이 목적들과 수단들은 정교하게 분석되었으나 어떤 체계를 선택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음. 18세기 말경 ‘로베스피에르’같은 ‘필로소페’의 후예가 지혜를 절충적으로 차용하기란 용이한 일이었는데, 그는 ‘몽테스키외’로부터 ‘대표이론’을 끌어와서 ‘입법의회’가 “주권의 본질”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였고, ‘루소’로부터 ‘인민주권론’을 끌어와서 국가는 하나의 단일 의사이자 ‘사회계약’이라 선언함(p261). ⑦‘로베스피에르’는 많은 교육개혁계획으로부터 ‘국민교육체계’라는 자신의 구상을 끌어와 5세부터 계몽되고 갱생시키고 만들어지도록 하였는데, ‘지적 리더’로서의 ‘로베스피에르’는 사회개혁가이며 훌륭한 혁명가였고, 그는 ‘사형제의 폐지’를 호소하고, ‘무시무시한 탄핵원리’와 여타의 테러수단을 비난했음(p261). ‘필로소페’는 참여적 인간들이었는데, 그들 사이의 갈등은 사회적 갈등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이 갈등들은 그들을 그 시대와 공간 속에 위치한 ‘긴장점’으로 이끌었는데, 그들은 싸울 태세를 갖추었지만 고립된 인간은 아니었고, ‘지식인들’-특히 ‘지적 리더’-은 동료를 필요로 했는데, 그들을 격려할 제자들, 후원자, 애인, 적대자 및 세상에 그들의 사상을 전달할 수단을 필요로 하였음(p261). ⑧‘종교교단들’, ‘대학들’, ‘왕립재판소’, ‘두뇌집단’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토론할 보호공간들을 지식인들에게 제공해왔는데, ‘필로소페’의 사회적이고 지적인 서식지는 ‘살롱’이었으며, 여기에서 그들은 ‘디드로’, ‘루소’, ‘콩도르세’같은 이론가들과 함께 자신들의 생각 및 소식, 가십거리를 나누었으며, 외국의 저명인사들로는 ‘흄’과 ‘프랭클린’ 또는 ‘프리스틀리’(Priestly) 같은 사람들이었음(p262). (참조: 17~18세기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성행하던 귀족과 문인들의 정기적인 사교모임을 ‘살롱’이라 함. 귀족 부인들이 일정한 날짜에 자기 집 객실을 문화계 명사들에게 개방, 식사를 제공하면서 문학이나 도덕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과 작품낭독 및 비평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 영향을 받은 프랑스에서 17세기 초에 꽃피웠는데 이는 ‘대화의 정신’이 투철한 프랑스 국민성과 합체되었기 때문임. 이탈리아 출신의 ‘랑부예 후작부인’의 살롱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재상 ‘리슐리외’를 비록한 정치가, ‘말레르브’, ‘크로네유’ 등의 시인등이 방문함. 사랑․정의․재능․명예․야심 등 인간본성에 관한 문제들을 즐겨 화제로 삼았으며, ‘모럴리스트 문학’의 산실이 되어 ‘고전주의 문학’의 형성에도 크게 이바지 함. 신흥계급인 ‘부르주아층 부인들’과 ‘남성’이 주최하는 ‘살롱’도 나타났는데, 그 화제도 ‘과학사상’과 ‘합리정신’을 통한 계몽시대에 발맞추어 철학․과학․정치 등으로 뻗어나갔으며, ‘몽테스키외’, ‘볼테르’, ‘디드로’, ‘루소’, ‘달랑베르’ 등이 그 중심인물이었음. 19세기 이후 ‘살롱’은 쇠퇴하였으나, ‘살롱’의 대화와 사고의 정신은 이어져서 ‘프루스트’ 등의 문학을 낳는 계기가 됨)
● 비평
필자는 프랑스 시대에 ‘필로소페’라고 불리는 지식층에 대하여 ‘지적 리더’의 관점에서 그들의 상황을 분석하고 다양한 그 시대의 인물들을 제시하고, 그들이 활동했던 ‘살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함으로 프랑스혁명 배경을 기술.
● 토의
우리 정치․경제․문화적 현실 속에서 ‘지적 리더’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지? ‘지적 리더’들이 실제 현실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 이러한 ‘지적 토양’이 되는 ‘살롱’과 같은 곳이 있다면?
□ 요약(제6-3장 지적 리더십-도덕적 힘으로서의 이념 : 프랑스 살롱)
①‘마틴’(Kingsley Martin)은 “만약 당신이 ‘필로소페’였다면, 당신은 월요일이나 수요일에는 현명하게도 ‘마담 쇼팽’(Geoffrin)의 집에서 구세계에 걸맞는 평판을 유지했을 것이며, 거의 매일 저녁 5시와 9시에 손님을 맞았던 ‘마드무아젤 드 레스피나스’(de Lepinasse)를 분명히 방문했을 것이며, 화요일에는 ‘엘비시우스’의 책들에 대해 저자와 토론을 했을 것이다. 금요일에는 ‘마담 네케르’(Necker)를 방문할 수 있었을 것이고, 만약 일요일에나 목요일에 ‘홀바흐’(Holbach)와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주일의 가장 커다란 즐거움 중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다.”라고 서술함(p263). ②총명하고 능력있는 귀부인들은 이런 일을 주관해서, 초대손님을 선별하고 그 행사의 격조를 갖추었으며, 다툼을 중재하고, 때로는 토론의 범위를 정하기도 하였고, 그들은 호스티스로서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의 발견자, 조력자, 후원자로서의 영향력도 행사했고,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직’을 주선하기도 하고 ‘명예’를 갖고자 했는데, 어떤 때는 현존하는 학술원 회원의 절반이 ‘마담 랑베르’에 의해 배출된 사람들이었다고 함(p263). ③그 세기가 가기 전 ‘살롱’에서 중대한 변화가 생겼는데, 이른 시기에는 ‘살롱’은 배타적이고 귀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탈리아적 모델의 ‘살롱’은 귀부인들에 의해 운영되어 상류층에 한정되었고 한 집안에 소속된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귀족들의 인정과 후원에 의존하고, 숙식까지도 의존하였는데, 그 세기 후반에 ‘필로소페’들은 보다 광범위한 후원처를 획득함(p264). 그들은 ‘살롱’에서의 지적인 담론을 위한 그들 자신의 기준을 마련할 수 없었고, 동료집단을 확대시켜 사회적으로 부적격하고 멋대가리없는 떠돌이 무위도식자-‘루소’가 가장 좋은 예이다-도 받아들여지고 그들의 말도 경청됨(p264). ④‘살롱’은 고립된 조그만 세계였는데, ‘살롱’은 18세기 프랑스의 사회현실을 사로잡았던 지적인 내용이나 일종의 정치적 논평 보다는 기지와 총명함, 매력 그리고 지적인 대담함을 더 높이 평가했으며, 호스티스를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살롱’의 중요한 일이었는데, ‘디드로’는 “부인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건조하고 괴로운 주제라도 매력있고 명쾌하게 토론하도록 만들었다”라고 적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과 끊임없이 이야기한다...우리는 그들을 지치거나 지루하게 만들까 걱정한다...우리 자신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것은 대화로부터 문체에까지 통용되었다.”라고 쓰고 있음. ‘몽테스키외’ 역시 “여인들의 사회가 윤리를 타락시키고 취향을 형성한다”고 불평했지만, 밤마다 그들은 자기 패끼리 만나 경구들을 교환하고, 서로의 작품들을 비평하고 평가하며 이것이 ‘문학적 평판’을 형성함(p264). ⑤‘콘저’(Lewis Coser)는 그 때 각광받았던 문학이 “사교적이고 유쾌하며 생기있고 재기가 번득이는 문학이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의 심연이나 철학적으로 심오한 내용은 대체로 기피한 문학”이었다고 하였는데, ‘살롱’은 이념들의 산실이자 보증인과 같았으나, 그 ‘살롱’들은 자기들끼리 선택한 소수에 의해 연출되는 지적인 유희의 냄새를 풍김(p264). ‘필로소페’들이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떨어진 것은 ‘살롱’에서 연유했다기보다 더 좋지 않은 이유가 있었는데, 허가받지 않은 책을 쓰는 것에 대한 처벌은 엄격했으며 1757년의 칙령에 따라 사형죄가 적용됨. 경찰, 스파이들이 인쇄소, 도서관 등에 잠입해 있었고 귀족 저택에서의 책 거래조차 금지되었음(p265). ⑥어떤 책을 금지하면 그것을 보려는 사람들의 욕구는 반드시 더 높아지는데, 프랑스의 비밀신문들은 번창하였고 해외에서 밀수되었으며, 판금된 ‘볼테르’의 ‘캉디드’(Candid) 43판은 프랑스혁명 전에 인쇄됨. 한편, 검열은 그 자체로 효과가 있어 해적판의 가격이 매우 높아 가난한 중산계급은 책을 사 볼수 없었음(p265). ‘코저’가 지적하듯이 검열은 “의도하지 않은, 그러나 강력한 격리장치”가 되었고 검열자들의 변덕스러움과 그 뒤에 자리잡고 있는 정권의 적대감은 저자들을 격분시켰음. 하지만 ‘필로소페’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독특하고 특별한 계급을 이룬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성향으로 고립된 면도 존재함(p265). ⑦‘프랑켈’(Charles Frankel)에 따르면, 한 인간이 진정으로 지적인 경우, 그 같은 믿음에 의해 그는 하나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으며, 대표적 ‘필로소페’인 ‘달랑베르’는 “자신이 존중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 단합하여 살면서 자기들 사이에서 거의 침묵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식인들이 결국 인정하게 된다면,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단합에 의하여...국가의 다른 성원들을 감복시키게 될 때,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라고 함(p266). ⑧‘테인’(Taine)은 ‘백과전서파’가 역사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종합적인 사회를 구성하려 했던 유토피아적 공론가들이었다고 반대하였는데, ‘백과전서파’들과 모든 ‘필로소페’들은 교육, 범죄자의 교도 등 개혁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그들의 거창한 이론들을 보통 사람들의 욕구와 잠재력에 연결시킬 정치철학과 제도적 수단들이었음(p266). ‘토크빌’은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지식인’들이 잘못된 부분을 고치려하기 보다 헌정체제를 재구성하려는 욕망에서 혁명가들과 동일했다고 함(p266).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살롱’에서 활동한 ‘필로소페’나 ‘백과전서파’ 등 ‘지식인’들이 프랑스 혁명 당시 국가로부터 고립된 상황을 다차원적(성향․살롱․통제)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이것이 혁명의 씨앗임을 밝힘. 우리 사회는 ‘지식인’에 대해 개방적인가?
□ 요약(제6-4장 지적 리더십-도덕적 힘으로서의 이념 : 자유와 권력)
①영국의 경험은 프랑스와는 현격하게 달랐는데, 지식인들은 거의 사회와 그 시대 전체의 정치이념만큼 현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지식인들은 거의 없었을 것임. 그들 역시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들을 사로잡았던 인간본성과 여타의 철학적 문제들에 관하여 숙고하였는데, 그들은 영국 해협을 건너 사상가들과 만나, 권위의 세속적인 기초를 새롭게 마련하기 위한 최고의 문제들과 씨름했고, 이 문제들은 교회의 왕권의 전통적인 입론들이 붕괴된 이후 야기된 것들임(p267). 한편 영국인들은 그들에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단 하나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는데, 정부의 권력에 대항하여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었으며, ‘자유’란 언제나 권력에 굶주린 자들의 위협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자유의 수호’는 불침번을 필요로 했음(p267). ②‘니덤’(Marchamont Nedham)은 1650년대 중반에, “자유에 대한 호기심은 모든 사람이 꺾고 싶어하는 처녀에 대한 호기심과 같은 것이다”라고 씀. 대의제 정부가 없다면 “지배를 향한 인간의 정욕은 너무 크기 때문에 기회만 닿으면 능욕하려 할 것이다.”라고 함(p267). 그래서 하나의 명백한 필요에 의해 권력에 대한 조사와 자유의 추구가 요청되었으며, 그 ‘필요’란 군주와 평민 모두가 느끼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영국’은 절대주의 통치와 공화주의 정부, ‘호국경’(Lord Protector), ‘왕정복고’, 그리고 외국 출신의 온전한 군주제를 모두 경험했기 때문임(p268). ③1698년 ‘시드니’(Algernon Sydney)는 두 세기에 걸쳐 힘겹게 도달한 사상과 그보다 더 힘겨웠던 경험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는데 “인간은 악덕과 감정에 너무 취약해서 모든 조건하에서 언제나 일정한 제약을 필요로 한다. 특히 권력을 잡고 있을 때 그러하다...온건했던 사람들이 대개는 가장 야만적인 괴물임이 밝혀지는데, 그것은...분노에 대항할 존재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p268). ③정치권력에 대항하여 개인 자유의 수호수단을 발견하려는 이러한 탐색에서 가장 주목되는 측면은, 그 문제와 직접 대결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실제로는 잊혀진 많은 뛰어난 사상가들이며, 가장 중요한 인물로부터 두 번째 세 번째 인물로 내려감에 따라 정치지도자들의 명성도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는 ‘명성의 법칙’이 지적 리더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됨(p268). ‘위대한 인물들’의 결정적인 생각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전해져 왔는데, ‘영국 정부’는 전제적이고 군주제적이어야 한다는 ‘팔머’와 그의 이론, ‘홉스’와 ‘절대주권’에 대한 그의 신념, ‘로크’와 대의정부에 대한 그의 옹호임. 오늘날 ‘헐’(Charles Herle), ‘펀’(H. Ferne), ‘헌턴’(Philip Hunton), 그리고 ‘댈리슨’(Charles Dallison) 등의 이름은 영국 학생들의 입에 거의 거론되지 않지만 ‘찰스 1세’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는데, 왕과 의회의 권력공유의 필요성을 능란하게 방어했기 때문일 것임(p269). ④그의 방어논리를 세운 두 명의 비밀고문(brain truster)인 ‘포크랜드’(Viscout Falkland)와 ‘콜페퍼’(Sir John Colepeper) 경의 이름은 알려져있지 않고, ‘로크’와 ‘홉스’에 관한 책과 논문은 수백권이 있지만, 이차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10여편 정도일 뿐이고, 지지와 반대, 갈등과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형성했던 ‘평론가들’, ‘법률가들’, ‘목사들’, ‘의회주의자들’ 및 ‘인쇄업자들’에 대해서는 한줌도 안됨. 이러한 사유들에 대한 필요가 긴박하고, 지적 반응이 집단적이었다면 17세기의 영국이라는 무대는 새로운 사유들이 개화할 수 있는 갈등의 환경을 제공한 것임(p269). ‘귄’(W. B. Gwyn)에 따르면, ‘제임스 1세’가 즉위하고 내전이 발발하기 전의 여러 해들은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에게 있어 이념의 빈곤기였음(p270). ⑤‘영국’은 ‘주권’과 ‘기본법’(fundamental law)이라는, 16세기의 프랑스에서 발전하고 있었던 새로운 사유를 채택하는 것에서조차 느렸으며, “그러나 일단 내전이 발발하자 정치적‧헌정적 사유가 영국에서 개화했다...이 사유들은 영국, 영국의 식민, 그리고 주변국들에게 많은 이념들을 제공했으며, 이것들 중 다수는 헌법 논의에서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왕과 의회 사이의 공공연한 갈등은 지적인 능력을 날카롭게 하였으며, 논객들은 권력통제에 대한 자신들의 제안이 서구 전통에 있어 근본적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음(p270). ‘홉스’는 귀족적 통치자의 교사였으며, 전투적인 사상가였고, 평화의 교란자로서 그의 저작은 무신론으로 의심받았으며, ‘반의회주의 이론가’로서,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대륙으로 도주하였는데, ‘권위’에 대한 그의 요청은 그를 둘러싼 무질서에 대한 반응일 뿐 아니라 통제와 질서에 대한 내적 욕구를 보여주는 것 같았음(p270). ⑥‘로크’는 ‘평민파’에 복무하고 있던 한 엄격한 청교도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훗날 “내가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나 자신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폭풍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썼으며, 그가 수학한 ‘웨스트민스터 학교’(Westminster School)는 의회주의운동의 본부에 위치하고 있었음(p270). 그가 다닌 ‘옥스퍼드 대학’은 그 시대의 ‘정치적․지적 투쟁’의 전선 중 하나였으며, 그는 뒤에 ‘섀프츠버리 백작’(the Earl of Shaftesbury)이 된 ‘애슐리’ 경의 가정교사 겸 고문이 되었고, ‘섀프츠버리’의 생애를 둘러싼 음모와 반음모 속에 깊이 연루됨. ‘레스릿’(Peter Laslett)의 말에 따르면, 그는 “세심하고 노련한 논쟁가”였음(p271). ⑦영국의 사상가들의 커다란 업적은 그들의 지적 재능을 정치철학자들에게 제기된 가장 필요하고 곤란한 문제들 중 하나에 집중했다는 점이었는데, 그 문제란 ‘자유’와 ‘권력’의 관계를 해결하는 것이었음. 이 문제는 사회계급, 신분 또는 정부의 여타 요소들을 대표하는 특정 수단들과 연관시켜 정부 내의 권력을 배분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정부의 근본적인 목적인 ‘정의’와 ‘질서유지’를 실현함에 있어 정부의 효능성을 훼손시키지 않고 개인적인 자유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과 관련되어 있었음. 오늘날 우리는 혼합적이고 분권적인 헌법장치들의 작동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이러한 체계의 지적구성을 어느정도 당연하게 여김(p271). ⑧17세기 지적 혁신가들에게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들이 엄청났는데, 1)사회의 기본적인 계급들-군주정적 집단, 귀족정적 집단, 민중적 집단-사이의 균형에 의한 자유를 보존하고 권력을 견제할 혼합정부 또는 ‘균형적 헌정’(balanced constitution)과 2)정부의 각 부서들이 자신의 적절한 기관들 사이에 정부기능을 분할하는 권력분할체계였음(p272). 이러한 장치들이 영원히 변화해가는 사회에서 무슨 목적, 무슨 기준에 의해 작동되고 시험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며, 각각의 장치는 다양하게 조합되어 여러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행정‧입법‧사법), 그렇게 분할된 것은 입법부가 양원으로 분리된 것처럼 나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나, 가장 중요한 지적 작업은 각각의 대안적인 장치들-모두 다양한 판형을 가진 혼합정부와 권력분립-을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음(p272). ⑨17세기 ‘지적 리더’들에게 ‘혼합정부 이론’을 개발하는 일은 그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날카로운 지적 자산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소 쉬운 것이었는데, ‘플라톤’은 사회계급들의 균형을 위해 ‘혼합정부’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계급들 간의 광범위한 균형의 가치를 이해했음(p272). ‘폴리비우스’ 등 로마인들은 그 논의를 진전시켰고, ‘아퀴나스’는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에 기초한 혼합정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재확인하였음. 권력분립 이론과 메커니즘을 고안하는 것은 영국의 사상가들에게 어려운 문제였는데, ‘법을 만드는 것과 집행하는 것 사이에 말 그대로 어떻게 선을 그을 것인가? 등의 문제임(p273). ⑩더 큰 문제는 정부의 각 기관과 부서들이 서로 독립적이면서 어느 정도 상호 의존적이어야 하는가? 의 문제인데, 실행가능한 타협을 발견했으며, ‘혼합정부론’과 ‘계급균형론’에 ‘권력분립론’을 지적으로 접목시키는 일이 있어났는데, 협력적이면서 동시에 대립적인 계급체계에 분립된 정부기관들을 접목시키는 것이었음. ‘바알’(M.J.C Vile)은 ‘권력분립’이 부차적인 이론이 되었다고 기술하였으며, 이 부차적인 이론이 균형적 헌정론의 계급을 넘어 입헌군주론으로 부상했다고 함(p274).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민중세력은 입법부, 군주는 행정, 귀족은 사법으로 나뉘어지는 입헌 군주제의 사상적 배경을 통찰하여 기술함. 현실 정치 속에 나타나는 모습은?
'리더십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우스리더십학교] 제31강 리더십강의-16(변혁적권력의지적시험) (0) | 2024.07.27 |
---|---|
[하우스리더십학교] 제30강 리더십강의-15(커피 하우스) (2) | 2024.07.20 |
[하우스리더십학교] 제28강 리더십학교-13(변혁적리더십) (0) | 2024.07.07 |
[하우스리더십학교] 제27강 리더십학교-12(정치적기회구조) (2) | 2024.06.30 |
[하우스리더십학교] 제26강 리더십강의-11(야심의배태) (0) | 2024.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