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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3부 변혁적 리더십
□ 요약(제6-5장 지적 리더십-도덕적 힘으로서의 이념:커피 하우스,클럽)
①18세기의 영국이 계속되는 논쟁과 분석으로 충만하고, 점진적인 정부개혁과 정치적 평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 영국의 ‘지적 리더십’ 때문인데, 17세기 담론은 팸플릿, 소책자 및 대판지로 이루어졌던 반면 18세기에는 커피하우스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장소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2천여 곳 이상이 되었으며, 파리의 귀족적인 살롱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어서 다양한 사람을 끌어들이고, 그들은 원하는 만큼 머물며 이야기하고,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이 읽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입장료는 한 사람당 1페니였음(p274). ②커피 하우스는 이방인이 공석에 앉아서 시인, 정치가, 극작가 등의 이야기를 듣거나, 토론하거나,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는데, 반면 특별한 지적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개설된 런던의 클럽들은 커피 하우스보다 배타적이었으며, 클럽회원들은 영업이 끝난 커피 하우스나 회원들의 집에서 만나기도 하였고 여기에서 지식인들은 권력과 결혼하였는데, 왜냐하면 작가들과 장관들이 정치적인 사안들을 토론하기 위해 주 또는 달마다 만났기 때문임(p275). 어떤 클럽들은 ‘토리’ 또는 ‘휘그당’의 성향을 분명하게 띠기도 하였는데, ‘디포’(Daniel Defoe)나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펜을 날카롭게 했으며 당대 사유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함(p275). ③이론가, 실천가, 정부장관과 학계의 비평가, 설교자와 팸플릿 집필자들은 17세기의 위대한 ‘지적 리더’들의 사상을 실제로 적용하고자 주장하고 그것을 구체화시킨 곳도 이런 커피하우스와 클럽이었음. ‘지적 리더십’의 영향력을 일반적인 말로 측정하기는 어렵다 해도 ‘집단적인 지적 리더십’의 선도적 역할은 널리 알려진 담론구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에 대해 그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지적 리더십’이 정치적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음(p275). ④미국 식민주의자들과 입헌주의자들의 사례는 정치이념의 영향력을 연구하는 데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는데, 이 이념들은 폭넓은 하나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3천 마일이나 떨어진 바다를 건너 이식되어 수십 년 동안 신생국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정치적이고 헌정적인 결정들로 미국인들을 유도 하였고, 여러 환경적 조건들이 결합됨으로써 18세기 미국은 ‘권력에 저항하는 자유’라는 지적‧정치적 투쟁의 장이 되었는데, 자신의 정치적‧종교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영국을 등진 사람의 후손들이 신대륙에서 그 자유를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임(p276). ⑤종교의 다원성과 파벌 내의 복잡한 교리상의 분열은 자유의 의미와 체제의 권위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는데, 식민지들은 영국의 왕정하에서 다양한 정치적 장치들과 상이한 대표 형태를 그들의 식민지체제에 시험해 보았으며, 끝없는 논쟁이 사상가들, 상인, 법조인, 정치인들의 실제적 경험으로부터 길어올려짐(p276). ‘권력에 저항하는 자유’란 잘못된 방식으로 최고의 이슈를 표명하였던 것 같으나, 18세기 미국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마키아벨리’와 ‘홉스’는 권력이 필요하고 불가피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음. 또한 ‘권력’은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려는 영원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p276). ⑥미국의 사상가들은 ‘권력’을 자유를 증진하고 수호하는 수단으로서 생각하지 않았으며, ‘권력’과 ‘자유’는 참으로 반대되는 것이었고, ‘자유’의 천적은 ‘권력’이었으나, ‘권력’과 ‘자유’는 모두 정당한 것임(p276). ‘베일린’(Bernard Bailyn)은 양자의 역할이 본래 대립적이라고 썼는데, “하나는 야수적이고 부단히 활동적이며 조심성이 없다. 다른 하나는 섬세하고 수동적이고 민감하다.” ‘메디슨’은, “유럽에서는 자유의 헌장이 권력에 의해 수여되었던 반면 미국에서는 권력의 헌장이 자유에 의해 수여되었다”라고 씀. 어떻게 하면 권력이라는 야수를 억제할 수 있을까? ‘영국’은 ‘미국’의 모델이었는데, ‘미국인’들은 ‘자연법’과 ‘인간의 불가양도의 권리’에 대해 영국 형제들의 근본적인 전제를 공유함(p277). ⑦‘미국인’들은 영국의 입헌주의자들이 행정부와 상하원 사이에 정부 내의 권력균형을 이룩한 방법을 보고 경탄했는데, ‘왕족’과 ‘귀족’ 그리고 ‘평민’들 사이의 사회적 평형에 기초한 것이었음. 그러나 미국에는 ‘왕족’과 ‘귀족’들이 없었으며 그들은 이들을 자랑스럽게 축출했는데, 토라주의적 비평가가 말했듯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팸플릿을 불태우고 적들을 격퇴한 것으로 알려진 영웅들 중 한 무리의 후작들과 남작들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프랭클린’과 ‘페인’(Paine)은 공화주의적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여, 자주 교체되는 집행부를 가진 단일하고 강력한 입법부를 통해 일하는 사람들의 분별력과 지혜에 의존하고자 함(p277). ⑧다른 사람들은 투표를 제한하고 종신직을 만들자고 하였으며, 대중들의 격정과 무지의 불길을 억제하려고 하였는데,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세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었음. 1)그들은 영국과 미국의 ‘지도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함께 교육되었다는 점이었는데, 미국에서는 ‘로크’의 ‘단일한 영향력’이 너무 강조되었으며, 또한 식민지의 ‘지적 리더’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버질’, ‘키케로’, ‘카토’(Cato), ‘플루타르크’, ‘시드니’, ‘푸펜도르프’ 그리고 ‘볼링브링크’(Bolingbroke) 역시 알고 있었음(p277). 또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지식인들도 가지고 있었는데, 유명한 ‘프랭클린’, 조금 덜 알려진 ‘와이즈’(John Wise), ‘메이휴’(Jonathan Mayhew), ‘블랜드’(Richard Bland) 등이었으며, 이 모든 사람들은 1776년(독립선언서 채택)과 1787년(필라델피아 제헌회의)이라는 불멸의 시대 이전에 한두 세대 동안 저술활동을 했고, 이 불멸의 작품들은 그들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임(p278). ⑨미국의 정치사상가들이 가진 가장 실제적인 이점은 2)자신들의 이념들을 유포하는 수단이 풍부했다는 것인데, 그들은 팸플릿을 인쇄할 수 있었고, 이것은 런던에서 재인쇄되었으며, 영국의 ‘토리주의자’들은 신속하게 이를 반박하는 팸플릿을 내놓을 수 있었으며, 그들은 신문사설을 쓸 수 있었는데, 이 사설들은 식민지 전역의 지방 주간지에 다시 게재되었음(p278). 대중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많은 신문 중 하나에 글을 쓸 수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이용하기도 했고, 식민지의 교회들 특히, 북부의 교회들은 정치적이고 심지어 폭발하기 쉬운 설교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정치적 분쟁이 지닌 종교적 함의를 목사들이 설교해주길 기대했음. 누구든지 왕과 의회에 공식적으로 진정하거나 호소함으로 자신의 탄원을 비중있게 할 수 있었고, 많은 결의와 청원, 선언 그리고 기소배심원의 고발들이 본국에 적절히 알려지도록 대서양을 건너 배로 수송됨(p279). ⑩다른 이점은 3)미국의 초기 정치사상가들이 ‘철학’은 물론이고 ‘정치적 경험’에 열중했다는 점인데, ‘애덤스’(John Adams)는 파벌적인 매사추세츠주 정치의 베테랑이었으며, 그는 영국에 대항하는 식민지의 항의에 있어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되었고, 1789년 미연방이 수립되기 전 외교관이 됨(p279). ‘제퍼슨’은 과학․발명․건축․교육 그리고 철학에 지적이고 실천적 관심을 가졌고, 버지니아 의원, 대륙회의 의원, 버지니아 주지사 그리고 프랑스 외교사절로 봉직함(p279). ‘매디슨’은 버지니아 의원과 대륙회의 의원이었고, ‘해밀턴’은 군인, ‘디킨슨’(John Dickinson)은 많은 일에 관여하였음(p280). ‘프랭클린’은 가장 실천적인 인물이었으나, ‘실천가들’은 여전히 고금의 ‘이론가’로부터 배우려고 하였으며, 강단과 대학의 ‘사상가들’과 법률․정치․통상에서의 ‘실천적 인간들’ 사이에 실제적인 교류가 있었음(p280).
● 비평
필자는 ‘영국’의 ‘정치적․지적 리더십’의 담론구조를 ‘커피 하우스’와 ‘클럽’에서 탁월하게 찾아내고 있음. 또한, ‘미국’의 독립혁명 가운데 나타난 수많은 ‘지적 리더’의 모습을 잘 묘사하며, 그들의 실천적 모습을 그려내고 있음.
● 토의
우리 정치․사회 현실 가운데 정치적 담론을 이끌어내는 ‘커피 하우스’와 같은 장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또한, 미국의 정치사상가들의 실천적인 모습이 우리 정치 현실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는지?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 요약(제6-6장 지적 리더십-도덕적 힘으로서의 이념: 지적리더 메디슨)
①정부권력에 대항하여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적인 견제와 균형이 필요했지만, 사회계급 및 신분에 있어서의 기반이 결여되어 있었는데, 이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은 널리 유포되고 토론된 이념들의 충돌에서 도출되었으며, 그 해결책은 사람들이 서로 교차하도록 분할함으로써 정부 내의 세력균형을 확립하는 것임(p280). 선발과정과 재임기간, 직권 등을 잘 고안하여 사람들 사이의 자연적인 부조화가 정부 내의 충돌과 갈등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정부 내의 세력균형을 이룩하려고 하였음. 그 결과 ‘통치자’들은 질서를 확보하고 일반복지를 위해 부지런히 봉사하지만, 인민의 자유에 반하여 그들의 권력과 에너지를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임(p280). ②영국처럼 균형잡힌 체계 속에서 이러한 정부를 세우는 것이 첫 번째 일이었는데, 이 같은 상황하에서 ‘갈등’이란 너무 예견 가능하며 적절했기 때문에 ‘균형’은 확실하였고, ‘왕족’이나 ‘귀족’이 없는 ‘자유로운’ 인민들 사이에서 경제적이고 파벌적인 권력에 대한 충동 역시 분산되고 통제되어야 하며, 정부는 공화주의적 자유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사고의 혁명’을 가져 왔는데, 이것이 ‘지적 리더십’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보여주는 것임(p281). 이러한 ‘지적 리더’는 ‘매디슨’이었는데, 어느 누구도 이 버지니아 출신의 입헌주의자보다 더 설득력있고 간명하게 ‘견제’와 ‘균형전략’을 말하지 못했음(p281). ③그는 미국 국민의 욕구들의 발전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정치적 경험’과 ‘독서’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아무런 환상도 가지지 않았으며, 그는 ‘갈등이론’을 통해 정치적 상황을 분석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민중에 기초한 정부는 ‘파벌적 폭력’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으며, 그 결과 ‘혼란’과 ‘불안정’ 그리고 ‘부정의’가 수반되는데, 그는 파벌의 근본 원인을 검토한 결과 그 원인들이 피상적이거나 순간적인 힘들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p281). 이 힘들은 ‘종교적․정치적 리더십’에서 분출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경제적인 갈등에 폭발하는데, “인류가 상호 증오의 늪에 빠지는 성향은 너무 강력해서...사소하고 공상적인 구별만 있으면...그들의 가장 강력한 갈등을 자극하는데 충분하다...파벌주의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자유를 없애버린다고해서 근절되지 않는다...모든 시민들에게 동일한 이해”를 갖게 한다 해도 통제가 불가능 할 것이라고 함(p281). ④‘권력’에 저항하여 ‘자유’를 수호하려는 전략은 이 자유를 억제하고자 하는 힘만큼 강력해야 하는데, 파벌의 원인은 제거될 수 없고, 단지 그 결과만이 제거될 수 있음. 문제는 ‘정부의 내적 구조를 설계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함. “분리된 정부의 구성부문들은 부문간의 상호관계를 통해 각각의 부문이 적절한 본분을 지키도록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라고 함(p281). 그러나, 이러한 장치는 정부의 각 부문이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면 작동하지 않을 것인데, 이같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의지’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각 부문들이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유권자들에 반응하도록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라고 보았음. “정부의 동일 부문에 여러 권력들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안전책은 각 부문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헌법적인 필수 수단들과 개인적인 동기들을 부여하여 타인의 침해에 저항하도록 하는 것이다. 야심은 다른 야심에 의해 좌절되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인간의 이익은 각 위치에 부여되는 헌법적 권리와 연계되어야 한다.”라고 함(p282). ⑤이 모든 것이 인간이 본성에 대한 고찰이지만, “정부란 무언인가라는 고찰은 인간본성에 대한 모든 고찰 중 가장 위대한 것이지 않을까? 만약 인간이 천사라면 정부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라고 ‘매디슨’은 말하고 있음(p282). 그는 그 문제를 이처럼 현명하게 진술했듯이, ‘해밀턴’, ‘애덤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전략을 착상하고 실행했으며 방어했고, 후대 사람들은 1776년에, 특히 1787년에 정치적 천재성이 폭발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볼 때 미국 헌법은 여러 세기에 걸친 엄중한 정치사상과 정치분석, 직접적인 정치적 경험 및 미국 식민지의 특별한 인간적 욕구와 정치환경에 그 근원을 가진 ‘사유의 절정’으로 이해할 수 있음(p282). ⑥‘베일린’의 말처럼 1787년의 ‘해결책’은 고전적 유산과 17세기 영국 및 대륙의 사상 그리고 ‘매디슨’적 분석에 가교를 놓은, “지적 발전과 정치적 경험이 지속적이고 꺾이지 않는 직선”을 따라 도달한 절정이었던 것만은 아니었으며, 그것은 ‘지식인’에 의한 ‘정치 리더십’ 권력에 있어서 대표적인-아마도 유례없는-실례였음(p282). 인간 본성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확고하고 현실적이었으며, 전대의 사유에 대한 그들의 파악은 넓고 정확했고, 자신과 타인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그들의 능력은 유별났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들의 본질은 명료하게 묘사됨. 권력을 제한하고 인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했는데, 그 문제에 있어서 철학적이고 실제적인 결정에 필요한 시간과 상황이 성숙하였음(p283).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매디슨’의 말을 통하여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해의 확고함과 정치적 경험 및 과거의 사상가들의 사유 등이 합쳐져서 미국의 헌법 제정을 통해 헌법적 각 기능이 인간의 욕구와 연결되면서 국가의 각 기구가 갈등을 통해 권력균형을 이루는 과정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음. 우리의 입법 현실 속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권력 균형을 통한 자유의 수호가 이루어지는지? 그 해결책은?
□ 요약(제6-7장 지적리더십-도덕적힘으로서의이념:지식인과자유의본질)
①‘로크’가 주장한 정부이론의 승리와 힘, 그리고 그에 앞선 사람들 중 혁신적이었으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상가들,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미국’의 위기상황에 적용시킨 뛰어난 이론가‧실천가들에 대해 경탄한다 해도, 19세기와 20세기에 깊숙이 뿌리내린 정치사상과 행동에 밀접하게 영향을 미쳤던 ‘지적 리더십’의 실패 또한 주목해야 함(p283). 17세기 ‘지적 리더’들이 ‘혼합정부’ 또는 ‘균형정부’의 원리를 ‘권력분립’이라는 매우 다른 원리와 조화시키는 것에만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급속한 정치적 변화를 겪고 있는 사회에 어느 한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만도 아니었으며, 지적인 문제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었는데, 사상가들이 당면한 커다랗고 명백한 주요 문제는 ‘공적 권력’에 대항하여 개인의 시민적‧정치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었음(p283). ②그들의 결론은 ‘혼합헌정’이나 ‘권력분립’ 또는 양자의 결합에 의해 안정된 하나의 제한 정부였는데, 이러한 구상들은 군주‧기성 교회‧귀족 또는 개인들에 의한 압제에 대항하여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의 잘 드러나지 않은 큰 문제는 단순히 정부권력에 대항하여 사적인 자유를 수호하기보다 ‘정부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자유를 집단적으로 확대하려는 인민의 능력과 관련이 있었음(p283). 소극적으로는 사적 권력의 거점을 억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는 정치적‧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제조들과 과정들을 그들의 자유가 최대한 확장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공공기관을 이용해야 하는 문제는 비평민뿐만 아니라 평민의 능력에도 좌우되는 것이었음(p284). ③17세기 사상가들이 3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방해하는 지적인 문제들을 정복하지 못했다고 오해해서는 안되며, ‘소극적’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자유가 검토되고 만들어지며, 분배되는 방식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제도들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는데, ‘이론가’들의 실천적인 정신을 사로잡았던 가장 큰 두가지 정부장치는 두 종류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극대화시키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었으며, ‘순수’한 권력분립 아래서, 입법권을 독점한 입법부는 이를테면 의원 선출방식을 통해서 인민의 이익을 직접 반영하는 식으로 설치될 수 있음(p284). ④또는 국회구성원에 대한 왕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통해, 입법부는 인민의 이익을 저지하기 위해 조직될 수 있으며, ‘혼합정부’는 다수 인민들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또는 소수 집단이나 기존의 ‘리더십’에 의한 권력의 보유와 행사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집행권․행정권․사법권을 결합할 수 있음. 17세기의 ‘지적 리더’들은 장래의 정치적․사회적 장치들이 내포하고 있는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적 리더십’과 ‘정치권력’에 대한 핵심적인 의문들에 직면하게 되며, 실제로 그들은 리더십 이론의 가장 광범위한 함의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리더십’이라는 용어가 아닌 훨씬 덜 개념화된 용어를 구사하면서 ‘리더십 이론’들을 사용하는데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견해는 그들의 시대와 장소에서는 정말 어쩔 수 없었으나, 다른 대륙에서의 역사적 상황이 충분히 무르익자 이들의 견해는 미국의 헌법제정자들에게 심원하고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됨(p284). ⑤‘영국’에서는 17세기의 이념들이 18세기에 적용되고 있었지만 역사적 상황이 급격히 변동하고 있었는데, 다음 세기에는 ‘산업혁명’이라는 고통스러운 도정에서 ‘자유’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될 특정 형태의 권력이 성장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임. 과거의 사제권력이나 여타의 ‘사적인’ 권력을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바로 ‘자본가의 권력’이었음. 이것은 사적 기업가들의 수중에 놓여 있었으며, 만족과 박탈에 대한 통제력을 급속히 증가시켰음.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영국의 ‘지적 리더십’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인식론적이고 분석적인 짐은 막대하였는데, 그 시대의 ‘지적 리더’들은 단순히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처럼 자유의 본질을 ‘이해하지는’ 않았으며, 그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들이 경험한 압제적 권력에 대한 정신적 유산을 쉽사리 떨치지 못하였음(p285). ⑥정치적‧사회적 그리고 사회적인 사적 자유(사유재산의 권리에 대한 옹호)의 지위를 개척하고 정당화하는 것만으로, 그 시대의 지적 자원은 실질적으로 고갈되었으나,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자유의 새로운 잠재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지적 리더’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어야 했으며, 평민을 위한 실질적 기회를 발전시키고 극대화하기 위해서 교육‧주거‧건강 그리고 취업에 있어서 국가의 잠재적인 자원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는데, 결국 ‘조건의 평등’이라는 일반적 개념에 대해 ‘기회의 평등’이라는 급진적인 함의를 다루어야 했으며, 그것은 개념의 도전이었고, 정부와 정치적 제도 구성에 반드시 무엇이 갖추어져야 하는가라는 과제는 지적인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문제였음(p285). ⑦적극적인 자유의 창출과 확대는 적극적 자유를 위해 대중의 잠재적인 지지를 동원할 수 있고, 그 지지를 정부의 제도와 연계시키고, 분기하는 대중의 원망과 욕구들에 반응하도록 정부체제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그러한 압력에 반응하는 결정을 내리고 집행하는 정치체제가 만들어진 다음에야 가능해졌음(p285). 이러한 정치체제는 적어도 세 가지 사항이 요구되었는데, 1)대중적인 정치권력을 지닌 민중, 2)그 권력을 정부에 연계시키는 수단 및 3)적절한 법률과 결정을 입법화하고 집행할 정부 내의 구조가 이에 해당함(p286). ⑧18세기 영국의 ‘지적 리더’들이 전시대의 사람들에게 압도되지 않고 자신의 지적 자산에 의존하면서 이러한 문제들과 기회들을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탐구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러우며, 자유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확대시키는 동시에 적어도 그것들을 다루는 대안적 방법들을 제안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스러운데 대체로 18세기 ‘지적 리더’들은 이 일에 실패하였음(p286). 그에 대신하여 단편적이고 멋대로 제도들이 만들어졌는데 실제적인 실무가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이 개발한 제도들 중 첫째는 ‘내각제 정부’로서, ‘이론가’들은 여전히 ‘권력분립’과 ‘균형정부’의 훌륭함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실무가’들은 입법과 집행행위를 연계시킬 수 있는 수단을 만들고 정당화시켰으며, ‘몽테스키외’, ‘블랙스톤’(Blacstone),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통합적이고 효과적인 정부인 내각제의 잠재적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음(p286). ⑨‘내각제’는 제한정부와 권력분립의 원리에 여전히 사로잡힌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는데, ‘권력분립’의 대표적인 지지자였던 ‘카트라이트’(John Cartwright)는, “우리는 한 사람이 공직을 만드는 권력도 갖고 있고, 보수를 주는 권력도 갖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라고 썼음(p286). 또한 “그들 스스로 병참을 공급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지배의 탐욕을 가진 도당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라고 함. ‘내각’은 그것이 대중의 열망에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가에 따라 평민들을 위해 자유를 고무하는 것보다는 억누를 수 있으며, 19세기의 여명에 투표권 확대를 위한 상당한 선동이 존재하였는데, 이 선동은 1830년의 ‘영국’의 ‘대개혁법’(the Great Reform Bill)에서 절정에 달하였음(p287). ⑩소극적 자유와 정부의 분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참정권 확대에 함축되어 있는 ‘섬세한’ 균형과 조화의 가능성을 이해하였으며, 단순히 정부와 사회의 민주화를 두려워했던 보수주의자들 또한 시끄럽게 외쳤는데 적극적 자유의 필요성을 인정하던 ‘이론가’들은 이러한 비평가들에 응답하지 않았음. ‘적극적 자유’는 결국 이 자유와 그것에 불가결한 대중선거권을 자각하고 있는 대중들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으며, ‘권력분립’을 선호했던 다수의 사람들은 그로 인해 정부의 능력이 교착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변화의 필요성을 원하고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는 어떠한 지적인 갈등도 없었는데 왜냐하면 후자는 능동적이고 대중적인 정부와 사회변화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임(p287).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산업혁명’의 발생과 더불어 ‘자본가 권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소극적 자유’를 넘어서는 ‘적극적 자유’가 중시되는 변화의 시기에, ‘영국’이 내각제로 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음. 그렇다면, 현 우리나라의 상황 속에서 ‘영국’의 내각제로서 성립되는 정부의 모습이 적용될 여지가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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