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axjhfr82bmo?si=aqbeHSQw7wc0PEe4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3부 변혁적 리더십
House Leadership School
□ 요약(제6-8장 지적 리더십-도덕적 힘으로서의 이념 : magic circle)
①새로운 시대의 어떤 철학자가 자유에 대한 수정된 정의, 친절한 정부라는 확장된 비전, 대중적인 정치적 선동과 정치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동정하는 이해를 포괄하는 이론의 마술 동그라미(magic circle)를 그려 완성할 것인가? 사람들은 ‘벤담’(Jeremy Bentham)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행복의 산술’로 대중의 욕구와 합리화된 정부, 대중적 행동을 포괄하는 하나의 지적 체계를 제시할 것을 기대했음(p288). 그는 영국인들을 위해 자유로운 선택과 실제적인 자유를 최대화할 수 있는 ‘일반 규칙’들을 구성하였고, 뒤에 그는 ‘의회개혁’, ‘비밀선거’, ‘보통선거권’ 및 ‘다수결 원칙’을 지지함(p288). ②그러나, ‘벤담’은 정부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고, 국가의 본질적인 목적과 관련하여 다수의 최대 행복에 유해한 행위들을 제재하는 것이었는데, “모든 정부는 본래 하나의 커다란 악”이라고 함. ‘정부’란 본래 대중을 위해 경제적․사회적 해방을 창출해내려고 하지 않음(p288). ‘형사개혁’, 식량부패를 막기 위한 ‘냉욕장’(frigidarium)과 같은 창의적 제안을 많이 했던 그가 ‘정부’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지게 된 이유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 특히 자유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원자론적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이라는 지배적인 원리의 노예이자 예언자였던 그는 ‘자유’를 본질적으로 정부로부터 수호해야 할 것으로 봄. 인간이 가진 자유와 자기완성의 잠재력을 국가가 확장시켜줄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아무런 비전도 갖지 않음(p289). ③‘벤담’의 젊은 제자였던 ‘밀’(John Stuart Mill)은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지적 생애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정의와 분석, 압제와 편협성(intolerance)으로부터 방어하는데 헌신했으며, 그의 “자유론”(On Liberty)은 아직도 그 주제에 대한 고전으로 남아 있는데, 정부가 침해해서는 안 되는 정치적 영역 즉,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는 자기애적 행위의 영역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밀’을 능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음. 또한 그는 정치개혁가였으며, 시대를 앞서 ‘비례대표제’, ‘부인의 권리’, ‘의무교육’, ‘고율의 상속세’ 등을 옹호함. 그런데 19세기 중엽의 경제적․사회적 발탈과 욕구, 기회들에는 부적절하였음(p289). ④‘힘멜파프’(Gertrude Himmelfarb)는 “자유론”의 특징이 모호함과 모순에 있다고 보았는데, ‘자유’에 대한 ‘밀’의 개념은 ‘벤담’보다는 덜 부정적이었고, 국가의 행동을 통한 자유의 확장에 대해 다루지면 포용하지는 않았으며, 그의 사회적 관대함과 동정심은 교육받지 않은 거대한 대중, 즉 ‘노동조합’에 의해 지배되는 다수의 유권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약화되었을 것임. 이들이 국가기제를 장악하고 자유인들의 자유를 삼켜버릴 것이라고 여겼음(p289).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원리에 많은 예외를 두었으며, 그의 원리들이 적극적 자유와 ‘사회주의’를 향한 ‘영국’의 점진적 운동에 있어 그를 전통적인 인물로 자리잡게 함. 그러나 ‘밀’은 궁극적으로 산업적 인간에게 의미있는 자유를 가져다주는 ‘지적 리더십’은 발휘하지 못함(p290). ⑤누가 이 ‘마법의 동그라미’(magic circle)를 완성했는가? ‘던 배조트’(Walter Bagegho)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으며, 그는 ‘내각제 정부’를 “2개를 연결하는 하이픈, 2개를 연결하는 버클”로 비유했는데 대중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며, 영국 도시의 민주적 환경 하에서 확실하게 사라져가고 있던 시대착오적인 하층계급의 복종에 의존하고자 하였음(p290). ‘액튼 경’(Lord Acton)도 여기에 해당하지는 않았는데, 그는 ‘자유’를 ‘도덕률’에 대한 복종으로 정의하고, ‘자유’는 ‘절대군주제’가 아닌 ‘절대민주제’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주장하였는데, ‘절대민주제’는 복종심에 의해 단지 일시적으로 제지받고 있는 하층계급의 수평파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임. 19세기 말까지 ‘선거권의 확대’, ‘자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창조적으로 결합되지 못했음(p290). ⑥옥스퍼드 철학자였던 ‘그린’(T. H. Green)이 하나의 관념적인 형이상학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자유방임’으로부터 ‘정부의 계획과 통제로의 전환’을 정당화하는 지적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그는 개인의 복지에 대한 모든 위해는 공적인 위해라는 전제를 내세움(p290). 그는 정부가 건강, 주거, 공장과 광산 규제, 교육상의 적극적 역할을 확대함으로써 개인의 자유가 확대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러나 지적인 마술 동그라미(magic circle)는 ‘차티스트운동’, ‘급진운동’, ‘사회주의운동’, ‘노동운동’ 및 여타 사회적․정치적 운동 속에 나온 일단의 덜 유명한 사상가들에 의해 완성됨. 이러한 사상가들의 뿌리는 초기 수평파와 ‘디거들’(Diggers)까지 거슬러 올라감(p291). ⑦이들은 소극적 자유의 개념이 아닌 사회적 함의를 오랫동안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빈민의 투표권을 위해 싸우고, 만약 올바른 사람들이 정부를 운영하기만 한다면 평민들의 자유를 확대시키기 위한 권력사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음(p291). 19세기의 마지막 10⁓20년쯤 영국 노동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직면한 질문은 광범위한 이데올로기와 일반적 전략 보다는 사회통계와 분석, 산업조직, 정치전술, 정부의 행정에 더 관심을 가졌는데, 분석의 부담은 대부분 스스로를 ‘페이비어’(Fabian)라고 부른 다수의 뛰어난 사상가들이 짊어짐(p291). ⑧그들은 직접적인 정치행위를 사절하고 사회통계를 축적하여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 함의를 오랫동안 토론하는 지적 임무를 하였으며, 그들의 ‘정치전술’은 연설, 책과 팸플릿을 통해 노동조합, 사회주의협회, 개혁협회, 각료회의와 시의회, 런던 상류사회 응접실 등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페어비언’이 미친 정확한 영향력은 ‘콩트’류의 ‘실증주의자’, ‘기독교적 또는 비기독교적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토지개혁가’, ‘조지’(Henry George)의 제자들 등이 미친 영향력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페어비언’의 영향력이 심원했다는 것인 부인할 수 없음(p292). ⑨그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끈기있는 자료수집과 가차없는 선전에 주로 기초하고 있었으며, 때대로 ‘버나스 쇼’의 기지에 영향을 받아,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다툼과 노동계급에 대한 그들의 정서적‧신체적 이질감, 작은 규모, 정치적 무경험에도 불구하고, ‘웨브 부부’(Beatrice and Sidney Webb)와 ‘쇼’(G. B. Shaw) 같은 사람들은 영국사의 결정적인 순간 행동함으로써 ‘자유’와 ‘평등’을 통합시키고, ‘정치적 행위’와 ‘정부구조’에 대해 그들의 이념이 지닌 함의를 이해함[영국의 사회개혁가, 역사가, 경제학자, ‘시드니 제임스 웨브’(Sidney James Webb:1859-1947)와 ‘배아트리제 웨브’(Beatrice Webb:1858-1943)는 1882년에 결혼하였고, ‘시드니 웨브’는 런던에서 변호사가 되고 ‘페이비언협회’에 가입함. 거기서 많은 강력한 소책자를 저술함. ‘배아트리제 웨브’는 일찍이 사회문제에 관여하였으며, 결혼후 사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에 헌심함. 그들은 1913년 정치‧문화 주관지인 The New states mann을 시작했으며, ‘시드니’는 1922년 하원의원, 1924년 상무성 장관, 1929-1931년 식민성 장관이 되었고 1929년 ‘패스필드’ 남작 작위를 받음](p292). ⑩‘웨브 부인’은 “무대 뒤의 지적 리더십”에 매우 기뻐하였으며, 남편인 ‘시드니’가 이 ‘리더십’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집이 노동운동의 지적 본부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그의 ‘페이비언’ 동료였으며, 뒤에 그들과 결별한 웰스(H. G. Wells)는 작은 집단의 효과성에 대해 반대하며,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던 시국소책자(Tracts for the Times)운동의 작은 방을 보시오...스트랜드가로 나가서...교통의 번잡함과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오”라고 촉구함. ‘웨브 부인’, ‘웰스’ 모두 과장되었고, 이 존경할 만한 제도들과 강력한 이념 사이 갈등에서 웰스의 제도는 항복함(p293).
● 비평
필자는 ‘벤담’과 ‘밀’로부터 시작하여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서 ‘적극적 자유’의 개념으로 변화하며, 산업화의 시대에 영향을 미쳤던 다양한 요인(특히 ‘페어비언’)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어 당시의 ‘지적 리더십’ 모습을 조명하였음.
● 토의
우리 현실 속에서 ‘페어비언’이 사용했던 ‘소책자’와 같은 작은 시도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지? 한편, 북한의 ‘오물풍선’과 같은 것의 의도, 영향은?
□ 요약(제6-9장 지적리더십-도덕적 힘으로서의 이념:변혁적권력의지적시험)
①‘자유’와 ‘권력’의 관계와 같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지적 리더십’에 대한 시험은 가혹하고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정치세계에서 그러한 시험은, 권력을 잡거나 정책을 세우기 위해 정치가들과 정당들에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문제임(p293). 그것은 정부와 정치에 직접 개인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적 능력이상의 문제인데, 이것들은 중요한 기능들이지만 지식인들에 의한 ‘정치 리더십’의 궁극적 시험은 아니며, 그러한 시험은 ‘가치’나 ‘목적’을 이해하는 능력임. 이러한 ‘능력’은 ‘목적’과 ‘수단’을 분석적이고 창조적으로 연결시키고, ‘특정의 가치’가 정치적 행위와 정부조직에 대해 가지는 ‘함의’를 명료화시키는 능력임. 그 시험이 ‘변혁적(transforming) 권력’에 대한 시험임(p294). ②이것은 정확히 ‘미국 헌법제정자들’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평가인데, 그들은 특정한 정부구조를 세우고, 적어도 ‘연방주의자 문서’와 여타의 저술들을 통해 ‘소극적 자유’-이 자유는 그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압제적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말함-를 보호하기에 알맞은 ‘정치적 행위에 관한 특정한 전략’을 확립함(p294). 산업화하는 국가에 있어서 ‘지적‧정치적 리더’들이 대중의 욕구에 반응하고 이러한 ‘욕구’에 반응할 수 있는 정부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적극적 자유’의 원리를 구성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까? 1800년 ‘제퍼슨’의 승리와 4년 후 그의 재선과 더불어, ‘적극적 자유’의 체제를 이루는 주요한 요소들 중 하나-농부들과 소규모 채무자들, 직공들, 변경개척민들과 여타의 가난한 사람들의 연합에 의한 다수결원리-가 놀랄 만큼 신속하게 등장함(p295). ③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제퍼슨’은 그의 반대자인 ‘연방주의자들’을 포섭하는데 실패하기도 했지만, 다수 연합을 구축했으며, 재임기간 중 그는 온건한 정책을 선호하고 그가 “공화주의적 연방주의자”라고 지칭한 것을 자신의 진영에 도입해 ‘다수결 원칙’에 핵심적인 중용을 보여줌(p294). 그는 정책에 관한 ‘대통령의 리더십’을 행사하여 지금은 소수당인 예전 ‘연방당’(Federalist Party) 출신의 유임자들에게 피난처 같은 법원을 공격했으며, 그의 공화당 추종자들을 통해 의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함. 그러나 19세기의 미국에서 ‘다수결원칙’은 하나의 지적 개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했는데, ‘제퍼슨’은 그것을 합리화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실천하는데 더 능숙하였음(p295). ④어떠한 ‘지적리더’도 18세기 이념과 영국의 정치사상 및 실제 그리고 미국의 상황과 가능성에 ‘다수결원리’를 연관시킬 수 있는 ‘이론’과 ‘해석’을 진전시키지 못했으며, 그 반대로 19세기 ‘지적 리더십’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작업은 ‘반다수결주의자’인 ‘캘로운’(John C. Calhoun)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는 자신의 생활방식과 남부, 고유한 제도들을 옹호하기 위해 ‘매디슨’ 모델 속에 훨씬 많은 견제와 균형을 구축하고자 함. 그래서 ‘캘로운’과 다른 ‘반다수결주의자’들은 그 신생국에 ‘다수결원칙’에 반대하는 감정의 깊은 원천을 열음(p295). ‘하츠’(Louis Hartz)가 주장하고 있듯이 이것은 분명한데, 이 나라는 어떠한 다수도 실질적인 소수를 파괴할 정도로 그들을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로크적인’ 원칙 아래 공고하게 단합되어 있었기 때문임(p295) ⑤‘하츠’는 “현대 정치이론에서 가장 비굴하고 온순하며 가장 상상력이 없는 다수 중의 하나로 생각되는 ‘대중’은 그들에 대한 광적인 두려움에 의한 일련의 속박들에 의해 제약되어 왔다”라고 썼는데, “미국의 ‘다수’는 사자를 묶는 가죽끈으로 영원히 묶여 있는 고분고분한 사냥개였다.”라고 함(p296). ‘반다수결주의’적인 ‘휘그파’에게 경고했던 ‘잭슨주의 운동’은 모두 본질적으로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보다 적극적인 정부의 목적을 이해하고 실현하기보다는 법원과 은행 등을 공격하는 데 더 효과적이었음. 19세기 중반과 후반에 도래한 대단히 급속한 산업화와 더불어 ‘미국의 지식인’들이 영국의 상대들보다 ‘자유 개념’의 실질적 기반을 바꿀 필요성에 더 성공적으로 대응했는가의 여부가 문제였는데, 많은 요인들이 그 가능성을 흐릿하게 만듬(p296). ⑥다윈적 사고의 혁명에 따라, 미국인들은 공개 경쟁과 개인주의 그리고 자유방임원리를 고무했던 “사회” 다원이즘에 이끌렸으며, 초기의 노동운동은 막대한 해외 이민과 서부 변장으로의 노동자 유출에 의해 계속해서 재형성되고 있었고, 이들은 전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행위에 있어서의 성공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기업 조합주의’를 통한 자본가적 기풍 및 관습에 ‘합류’하는 데 보다 직접적인 성공을 거움(p297). 사회주의 운동과 여타의 급진주의 운동들은 19세기 후반의 정치문화에서 어떠한 기반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일반적으로 ‘개혁자’들은 ‘문민 옹호자들’, ‘열렬한 주류판매 반대자’, ‘반트러스트주의자들’, ‘은화주조 자유론자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주의자들’로 나뉘어 있었음(p297).
● 비평
필자는 ‘다수결의 원칙’에 대한 당시의 미국의 분위기를 미국 초기의 여러 인물들을 통한 잘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원칙이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와 관련하여 당시의 ‘로크’적인 개념이 크게 지배를 하고 있었음을 통찰력있게 제시하고 있음.
● 토의
현재의 지배적이며 모든 의사결정의 최고의 가치가 되는 ‘다수결의 원칙’과 관련하여, 이 원칙이 모든 원칙을 넘어서는 최고의 ‘원칙’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다면 ‘다수결의 원칙’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적 방법은?
□ 요약(제6-9장 지적 리더십-도덕적 힘으로서의 이념 : 윌슨, 루스벨트)
①몇몇 매우 재능있는 ‘지적 리더’들은 보수주의적‧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이었는데, 사회 다윈주의자인 ‘섬너’(William Graham Sumner)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리카도의 경제학’, 그리고 ‘자연도태이론’을 종합하였으며, ‘홉스타터’가 지적했듯이, 남성의 재산과 여성의 명예를 지키는 것 이외의 어떠한 정부의 역할도 인정하지 않은 ‘사회 결정론’을 발전시킴(p297). 법학자인 ‘필드’(Stephen J. Field)는 ‘다윈이즘’과 ‘고전경제학’ 및 ‘스펜서’의 ‘개인주의’를 결합하여 사회적으로 파괴적인 개인주의를 국가가 혁신적으로 통제하게 될 ‘사회입법’을 무효화시켰는데,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뉴욕주의 법률을 둘러싼 ‘로크너’와 ‘뉴욕시’의 판례에서 나타남(p297). ②‘민주주의의 승리’의 저자 ‘카네기’(Andrew Carnegie)는 과도한 평등주의를 비난하고 무자비한 경쟁을 실천하였으며, 엄격한 개인주의와 빈민에 대한 자본주의적 수탁자들의 사회적 책무를 기묘하게 조합해서 설교했고, 이러한 지적무대를 지배한 것은 ‘스펜서’(Herbert Spencer)였음(p298). ‘소극적 자유’ 개념은 1882년 가을에 최고점에 도달했음이 틀림이 없는데, ‘스펜서’는 미국을 여행했고 그의 환영현은 ‘델모니코 레스토랑’에서 열렸는데, ‘섬너’, ‘슐츠’(Carl Schulz), ‘비쳐’(Henry Ward Beecher) 등 미국의 사상계, 기업계, 정치계 지도자들이 참석하였음(p298). ③‘적극적 자유’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인식할 만한 사상가가 거의 없는 풍경에서 한 사람이 눈에 띄게 되었는데, 사회비평가 ‘워드’(Lester Ward)였으며, 그는 정부의 목적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사회 다윈이즘에 고개를 돌렸고, 그는 인간의 진화는 목적적인 행위에 의해 결정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자연과 인간사회에서의 경쟁은 생산적이기 보다 낭비적일 수 있다. ‘소극적 자유’는 전시대의 권위주의적 통치에는 적합하나 대의정부하에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함(p299). 그는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고, ‘지식인’들이 지도해야 한다고 믿었으나 사회학에 값하는 정치전략을 구상하지 못했음. ‘부정적발자들’, ‘개혁자들’, ‘진보주의자들’, 공정거래(Square Deal)를 지지하는 ‘공화당원들’, 신자유를 주장하는 ‘민주당원들’(New Freedom Democrat), ‘라 폴레트 진보당원들’이 오로지 새로운 세기의 첫 10여 년 동안만 권력을 잡고 영향력을 행사하였음(p299). ④이 시기 미국은 공적인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자유를 확장시킬 필요성에 직면했으나, 그러한 공적인 행위는 ‘지적 리더십’이 그 과제에 부적절했기 때문에 기우뚱거리고 변덕스러웠으며, 여러 영역에서 아직 공적인 행위가 도달하지 못했고, ‘지적 리더십’은 하나의 해결책을 발견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은 산업사회와 도시의 여러 악들을 공격하기 위해, 적절한 방향과 내용, 정당성을 제시할 수 있는 ‘사회사상’과 ‘정치사상’을 가지지 못했고, 그 시대의 거의 어떤 사상가들도 ‘목적’과 ‘정치’ 그리고 ‘정부’를 통합시키기 위해 필요한 지적 기초를 제공할 만한 포괄적인 이론에 관심을 가지거나 발전시킬수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소수중의 한 사람이 ‘윌슨’(Woodrow Wilson)이었음(p300). ⑤반대중적이고 반다수결주의적 성향을 지닌 ‘배조트’의 일부 문학적인 정부이론에 잠시 흥미를 가졌던 이 젊은 정치학자는 곧 평생 자신을 지도하고 유지시켜줄 이론을 구성했는데, ‘레니’(Austin Ranney)에 따르면, 그는 남북전쟁 후 미국의 많은 저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책임있는 정당 정부가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조직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원리를 진착시킨 인물이었고, 그는 확고한 ‘다수결주의자’가 되었는데, ‘윌슨’은 “다수가 아닌” 어떤 집단의 사람도 “나는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고 나에게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함(p300). 그는 분립된 정부를 통합시키고, 유권자들에게 명료한 대안들을 제시하며, 여당에게 활기찬 반대활동을 펼칠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정당 체계를 원하였음(p301). ⑥‘윌슨’은 향상시키는 힘으로서의 ‘리더십’의 소명에 주목했는데, 그는 위대하고 천부적인 ‘리더십’은 파편화된 권력과 작은 왕국들로 이루어진 ‘의회’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처음에는 통상 타협적인 대통령 역시 그렇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사상이 성숙하고 ‘루스벨트 대통령’(Theodore Roosevelt)의 적극적인 지도력을 목격한 이후, ‘윌슨’은 책임감있고 민주적인 정당체계에 기초한 활기찬 대통령의 ‘리더십 원리’를 수용함(p301). 또한 그는 이 모든 제도들을 ‘목적’과 ‘원리’ 그리고 ‘정책’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는데, 그는 한 정당에 “원리 대 원리의 공개적인 전쟁을 통해서 획득된 리더십”을 가진 리더들이 존재할 때, “그 정당은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명확한 정책들을 가지게 된다. 리더 없이는 원리도 없다. 원리 없이는 정당도 없다.”고 하였음(p301). ⑦그들이 강단에서 요청했던 그런 종류의 ‘리더십’을 입증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으며, 거의 어떠한 사람도 ‘윌슨’이 했던 것처럼 잠시 동안만이라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공격했던 바로 그 파편화와 상호좌절 세력에 의해,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패배당했으며, 그는 당을 재정비하려 하였고, 그가 1920년대에 떠났던 그 정당은 희망없고 야비한 보수주의에 빠져 ‘뉴딜’때까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음(p301). ‘윌슨’은 승리한 다수의 원리들을 실천할 강력한 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그가 떠났던 당은 너무 취약해서 1920년에 역사상 최악의 패배 중 하나를 당했으며, 이 에피소드는 최고의 ‘리더십 테스트’중 하나에 속하는 것이었음. ‘윌슨’이 다른 지도자들을 다루는 데 있어 실수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그가 그의 당, 그 주위와 아래의 ‘리더십’ 구조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1920년대의 미국에서 지적으로는 불가능하나 정치적으로는 가능한 하나의 대책을 요구했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음(p302). ⑧‘윌슨’의 첫 대통령 선거가 있고 20년 뒤 한때 그의 보좌관이자 오랜 찬양자였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미국이 경제불황의 밑바닥일 때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국민과 새 행정부는 경제적 실패를 정의할 수 있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며, 무엇보다도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진척시킬 ‘지적 리더십’을 필사적으로 요구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대통령의 자문단이 되었으나, 이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대적 조건에서의 자유의 본질과 그것을 실현시키는 데 필요한 경제적‧정치적 수단에 관해 발전되고 정교한 사상이 결여되어 있었음(p302). 그것은 미국 사회에서 정치적 헌신을 엄격한 지적 정교성과 결합시킬 만한 집단이 부재한 데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반트러스트주의자들’, ‘경제 집산주의자들’, ‘균형예산주의자들’, ‘적자재정주의자들’ 등이 ‘루스벨트’ 주위로 몰려들었거나, 접근을 요구하였음(p302). ⑨‘루스벨트’의 자랑스런 실험은 그 자신의 지적 관습에 대한 반성이었던 만큼이나 이러한 지적 혼합물들에 대한 불가피한 반응이기도 했는데, ‘루스벨트’가 가장 만나야 할 필요가 있었던 지식인인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뉴딜’ 후반까지 그를 피했다는 점은 매우 통렬한 사실임. ‘루스벨트’를 자유에 대한 충격적인 재정의에 도달케 한 것은, 어떠한 ‘지적 리더십’의 힘 보다도 ‘불황’과 ‘전쟁’의 가혹한 압력이었는데, ‘자유’에 대해 자신만의 강경한 정의 개념을 가지고 있던 적대자 ‘히틀러’에 직면하여,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 알기 원하는 민중들의 움직임에 직면하여, ‘루스벨트’는 한 세기 반 이전의 인권헌장을 보충하고 확대시키는 ‘경제권리헌장’을 발표함(p303). ⑩‘루스벨트’는 미국인들이 “모두를 위해 안전과 번영의 새로운 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소위 제2의 권리헌장을 받아들였다”고 말하였고 직업, 식량, 의복 등 구체적인 것들이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부터 도출되었는데, ‘영국인’들에게 지배적인었던 그 원리를 ‘미국인’들이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예를들면, ‘다수결원리’의 채택을 30년 동안 늦추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윌슨’의 첫 위임연설에서 ‘다수결원리’가 지지되었는데, 이에 대한 여러 이유 중 어떠한 것도 ‘지적리더십’의 실패는 아니었음(p304).
● 비평 및 토의
‘해리슨’의 1)뛰어난 정신들이 친분관계로 묶여있고, 2)그들이 입법 프로그램을 제공할 정도의 풍부한 원리에 도달하고, 3)이것을 도달해야할 조직이 있으며, 4)최고권력과 접촉, 5)정당침투 등 직접 행동이 있어야 지적 집단이 성공할 수 있다는 말로 미국상황을 해석하는데 우리의 지적집단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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