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33강 리더십강의-18(러시아_위로부터의 개혁)

presentlee 2024. 8. 11. 00:37

https://youtu.be/uO4hP0PAecs?si=QrvV6H_tSCyV_h4D

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3부 변혁적 리더십


□ 요약(제7-4장 개혁 리더십 : 영국-차티스트 운동과 반 곡물법 동맹)


 ①1832년의 개혁법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던 다른 세력은 ‘명사’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길을 가기로 결의한 일부 노동계였는데, 초기의 “민중 급진주의의 분출”을 말하며, ‘매더’(F. C. Mather)는 성인 남자 보통 투표권 부여와 그 외 개혁들의 지지를 통해, 그들은 ‘때때로 보다 상위계급 출신자들의 독주’를 허용하기도 하였지만, 1836년 설립된 ‘런던 노동자회’는 노동자들이 발기하고 수행한 정치운동을 진행하고, 의식적인 ‘리더십’ 기피증에 의해 추동되고 있었음(p319). 창설멤버 중 하나였던 ‘러벗’(William Lovett)은 상원의원, 하원의원, 향사에게 의존하려는 노동계의 성향에 대해 경멸적으로 언급하며, 노동계는 “항상 이러저런 리더십을 존경하고 있었다. 사실 대중들은 정치조직에 있어서 위대한 원칙보다는 ‘위대한 인물’을 따라 움직이도록 되어있게 마련이다.”라고 함(p319). ②1837년 런던 스트랜드(Strand)의 ‘왕관과 닻’(the Crown and Anchor)에서 ‘로버트 하트웰’(Robert Hattwell)은 3천의 노동자 청중들 앞에서 차티스트운동 창립대회의 의장이 되면서, “본인은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의장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집회에는 나오지 않고, 어떤 ‘선생님’을 목을 빼고 바라보거나...그가 주워섬기는 독단적인 주장들을 금과옥조(金科玉條)인 양 받들어 모시는, 노동계급의 찌꺼기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명사’리더십에 대한 경멸은 노동계 일반에서 독특한 풀뿌리 리더들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줌(p319). ‘헤더링턴’(Henry Hetherington)은 ‘식자공’ 출신으로서 자유언론을 지지하는 호소력있는 팸플릿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왓슨’(James Watson)은 요크셔 태생으로 노동자였던 부모는 그에게 읽고 쓰는 것을 가르쳤고, 순회강연자가 되어 활동하면서 ‘자유정신’의 소유자라는 이유로 세 번이나 투옥됨(p320). ③차티스트운동에는 조직 내부의 분파들을 초월하여 승리의 전략을 일구어낼 통찰력있는 ‘리더십’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 운동은 그 같은 ‘리더십’이 가능하기에는 너무나 분열되어 있었을 것이며, 그 실체는 강력한 지역단위의 모임들과 런던의 허약한 연합의 동맹체였고, 전술을 둘러싸고 도무지 결론이 안 나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무장투쟁 또는 무력위협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였으며, ‘리더’들은 단지 차티스트운동의 정치적 목표만을 위해서 투쟁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 문제해결까지 바라볼 것인가 등의 미묘한 문제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외부의 잠재적인 동맹세력과 연대를 이루어내지 못하였음(p320). ④차티스트운동의 ‘리더’들은 노동계급의 감정과 행동을 동원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팸플릿을 찍어내고 군중집회를 개최하며, 600파운드의 무게에 총 길이가 2마일이나 되는 100만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행위를 통하여 영국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현저히 고취시켰는데, 이는 향후 100여년 이상 영국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됨(p321). 그 운동에 참여한 수천의 추종자들은 이 운동에 색깔과 활력을 불어넣고, ‘브릭스’(Asa Briggs)가 언급했듯이 역사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임. 차티스트운동의 의회 내에서의 실패와 절망적인 총파업에서의 마지막 실패는 목표를 지나치게 높이 설정했던 데 이유가 있을 것인데, 여섯가지 목표들 중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중 한두가지에만 총력을 기울이는 편이 좋았을 것임(p321). ⑤아마도 영국이 선거개혁법에 적응하고, 다음의 위대한 개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 세대가 필요했을지 모르는데, 만약 그 같은 사례를 찾는다면, 매우 다른 종류의 개혁집단이던 ‘반곡물법동맹’은 영국의 경제․사회 정책에서 고정물로 자리잡게 된 곡물세 폐지를 확보하는 데 옳은 전술을 취했던 셈이었음(p321). ‘반곡물법동맹’은 철두철미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긍심 높은 중산층들이었으며, 곡물법 반대라는 단일한 특정 목표의 추구, 그리고 전국적 명사의 ‘리더십’ 선호 및 추종이란 수식어와 연결된 ‘부, 조직, 도덕적 힘’을 기꺼이 사용하려고 했음. ‘곡물세’는 수십, 수백년을 내려온 것이었는데, 이 동맹은 교역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이 세금이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게 될 것이 분명해질 즈음 신속히 조직되어 우파 쪽에서 지지를 끌어모으고, 결국 국회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는 이내 해체되었던 것임(p321). ⑥1842년초 이 동맹은 개혁의 추진을 위해 5만 파운드의 기금을 모았으며, 900만부 이상의 책자가 인쇄․배포되고, 650회의 강연회가 개최되었으며, 150개 이상의 대표단이 각기 구나 카운티에서 집회를 개최했고, 40만부 이상의 논문이 잡지나 광고에 선보였음. 이 동맹은 도덕적 정열을 공공부문에서의 처세술과 멋들어지게 연결해 보여주었는데, 이 동맹은 600명의 성직자를 동원하여 슬럼가의 빈민들을 구호하게 했으며, 이는 대중의 빈곤이 종교생활에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한 것이라고 선전되었고, 동맹의 세력은 그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던 1, 2년간 오히려 감소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그 효과는 후일에 분명 나타남(p322). ⑦차티스트운동과 반곡물법동맹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정치 리더십’의 정도에 있는데, 반곡물법동맹에는 탁월한 기량의 대변자인 ‘컨덴’(Richard Cobden)이 있었고, 그는 능변가였을 뿐만 아니라 통계수치를 나열하며 그럴 듯하게 이야기를 꾸미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음. 매년 그는 하원의석을 가로질러 ‘필’(Peel) 수상의 반대편에서 도덕문제와 수치 문제 등으로 입씨름을 하곤 했는데, 마침내 수상은 컴덴의 열화와 같은 웅변을 듣다 못해 노트를 구겨버리고는 한 동료에게 몸을 돌려 “자네가 이 문제를 답변하게. 난 못하겠어”라고 속삭일 정도까지 됨(p322).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필’ 수상은 자유무역정책을 지지하며 ‘곡물법’을 재고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바꾸고, 그것은 대단히 효과를 발휘해 휘그당과 토리당의 다수가 반곡물법동맹에 동조하는 계기가 됨. 한편 ‘브라이트’(John Bright)는 다수의 대변인들 그리고 지역 ‘전도사’들로 전 영국을 반곡물법운동으로 휩싸이게 한 사람들 중 가장 특출난 사람임(p322). ⑧‘반곡물법동맹’이나 이후 수십 년간 영국을 뒤흔들었던 관용, 교육, 지방자치제 개혁 등 단일 목적의 개혁운동에서 ‘정치 리더십’의 성공은 항상 개혁운동 내부의 정치보다는 외적인 정치에 주력했던 ‘리더’들에게 더 힘겨웠으며, 운동 내부에서 리더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전술적인 차원의 것이었는데, 선전과 동원, 더 나은 조직수단의 개발, 리더와 추종자들이 한결같이 단일문제에 집중하고 관련 문제들로 빗겨가지 않도록 하는 배려, 중앙주의와 분파주의의 조화, ‘리더’ 자신의 라이벌에 대한 위치 고수 등이 문제였음(p323). ‘개혁가’들은 ‘칼렌’의 “비타협적인 독자노선 추구”라는 정의에 항상 부합하며 협소하고 쉽게 규정되는 영역 안에서만 움직이는 경우가 많음(p323). ⑨외적 관계는 보다 복잡하고 선견지명을 겸비한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데, 상이하지만 관련성이 있는 문제들(가령 교회교육과 교육개혁)을 놓고 서로 다른 개혁운동들 사이에 지나친 간섭이나 소외도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 지나친 접근으로 어용(御用)이 되지 않도록 하면서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 무엇보다도 하나 또는 2개의 주요 정당 사이에 접촉을 모색하되, 정당의 포섭경향에 개혁좌표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은 모두 많은 ‘개혁 리더’들의 역량을 상회하는 정치적․지적 능력을 요하는 것임(p323). ⑩자유당은 19세기 중․후반 대중정치개혁에 대한 준비된 지지에 크게 의존했으며, 개혁들은 자유당의 노선에 합치했다는 점에서 별다른 재정상 부담을 주지 않으며 공론화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자유당은 경쟁적 계획을 모두 끌어안아야 했고 국민정당으로 정체성과 신뢰를 상실하였음. 또한 자유당 ‘리더’중 전방위적 개혁지원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보다 정교하게 활성적인 이슈가 당내 분란을 봉합하도록 하려고 했고, ‘글래드스톤’의 찬성과, ‘조셉 체임벌린’의 반대 가운데 쇠락의 길로 나갔음(p324).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차티스트운동’과 ‘반곡물법동맹’을 비교하면서 개혁운동의 성공을 위하여 탁월한 정치적 기술 및 때에 맞는 적시의 행동이 중요함을 실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음. 개혁운동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어떤 요소가 필요한지?


□ 요약(제7-5장 개혁 리더십 : 러시아-위로부터의 개혁)


 ①사회정치적 개혁들이 사회의 중간 또는 하류계층보다는 ‘리더십’ 계층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오랫동안 관찰된 바인데, 영국의 ‘그레이’와 ‘디즈레일리’, 미국의 두 루스벨트 대통령, 독일의 ‘비스마르크’의 사례 외에도 몇가지 다른 사례를 거론할 수 있으며, 귀족 출신의 정당 개혁가는 ‘노블래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와 공공에 대한 봉사라는 도덕률을 교육받고, 경제적 궁핍에서 자유로우며, 종종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그 특권에 대해 대중의 동의를 얻어놓지 않으면 언젠가 위협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존재로서 근대 정치의 한 전형있었음(p325). 그들은 중산층과 노동자층의 영향을 넘어 개혁으로 갈 수도 있고, 냉담한 농부나 적대적인 공장노동자들의 반발에 부딪혀 그들을 위한 개혁에 실패할 수도 있음(p325) ②귀족 출신 개혁가의 비극을 보여주는 것으로 ‘러시아’의 ‘위대한 해방자’이자 ‘자유의 짜아르’로 불렸던 알렉산드르 2세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는데, ‘크림전쟁’ 이후 러시아가 모욕과 타락을 겪던 와중에 즉위한 ‘알렉산드르’는 러시아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농노의 법적 해방이라는 경천동지할 결단을 내리는데, 그의 농노해방은 ‘피터 대제’로부터 러시아혁명에 이르기까지의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놀랄 만하고 의미심장한 정치행동으로 간주됨(p325). 이 놀라운 ‘개혁 리더십’의 행사 결과는 무엇인가? ‘알렉산드르’는 ‘개혁’하는 것이야 말로 ‘보수’(保守)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알렉산드르’의 부왕과 ‘니콜라이 1세’ 당시 ‘러시아 정교’, ‘독재’, ‘민족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질서’였음(p326). 하지만, ‘알렉산드르’의 농노해방 이후 채 70년이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정교’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의해 밀려났고, ‘짜아르독재’는 타도되었으며, ‘러시아 민족주의’는 일본과 독일에 의해 심각하게 도전받게 됨(p326). ③‘알렉산드르’는 결코 ‘개혁가’로 태어나지도, 교육받지도 않았으며, 그는 러시아 짜아르체제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독재로 유명한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자랐으며, 그 아버지는 그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는데, ‘황제’는 “아버지 이상입니다”라고 ‘알렉산드르’는 모후(母后)에게 말했으며, “제게 그분은 자랑스러운 우리 조국이 인격화하신 것입니다.”라고 함. 그의 가정교사들은 교육적 배경이나 외모가 모두 서구적이었지만, 궁정의 분위기는 가부장적이고 군국주의적이었음(p326). 소년시절 상냥하고 게을렀던 ‘황태자’(czarevitch)는 장애물이나 혼란에 부딪힐 때면 무기력한 안일 속으로 도피하곤 했는데, ‘알렉산드르’는 러시아와 유럽을 널리 여행하였으나, 궁정 관려들에게 둘러싸인 채 리셉션, 의례적 시찰, 각 지역의 친선모임과 교회의 예배참석 등의 수행으로 바쁜 일정을 보냄(p326). ④‘알렉산드르’는 이중적인 인간으로 자라고 있었는데, 그는 내무(內務)를 처리할 때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나, 국가 비상사태에 부딪혔을 때 경직되고 불안한 모습을 보였으며, 그는 아버지의 “더 나쁜 복제품”이 되었는데, 그는 친구들과 병사들에게 잘 대했으나, 짜아르로서는 억압적인 자세을 취했고, 나중에 그는 각료들에게 의지하였지만, 장관들을 임명했다가 미심쩍어 주시하다가 무시해버리다가 돌연 파면시켜버리곤 했음(p327).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알렉산드르’는 그의 위대한 ‘해방령’을 돌연 거침없이 내놓았으며, 단독으로 그 일을 해냈다고 하는데, 사실 그러한 행동은 왕좌의 내외에서 작용하는 힘 때문었다고 할 수 있음. 즉, 그 결정은 집단적인 것이였으며, 수십 년 동안 서구의 개인주의, 근대성, 자유주의가 러시아에 조금씩 유입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유럽여행과 유럽식 교육을 마친 코스모폴리탄들을 통해서였음(p327). ⑤러시아인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기술진보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구의 사고방식은 관료, 지주(젠트리), 그리고 궁정에까지도 서서히 스며들어갔으며, 서구식 이념들은 범슬라브주의 ‘리더’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기도 했지만, ‘윌리엄 체임벌린’의 말한 대로, 그들은 “농업국 러시아가 개인주의적이고, 도시화되고, 무신론적인 서구에 대행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가부장적으로 날뛰는 사람들이었다.” 또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에 대해 러시아 종교의 우월을 고집했는데, 그러나 러시아의 영구적인 정체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아픈 숙제였으며, 일부 민족주의자들에게도 그러했음(p327). ⑥‘알렉산드르’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서구사상에 노출된 바 있으며, 그는   소요, 급진주의, 혁명 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온건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비친 일이 있고, 무엇보다고 그는 ‘크림전쟁’에서 자신의 신하들과 외국의 적들에게 허약성을 깡그리 드러내고만 러시아 군대에 실망했고, 그의 군사문제 자문관들, 특히 유능한 국방상 ‘밀류친’(Dmitrii Millutin)은 근대적이며 기동력있으며 준비태세가 충분한 군대를 육성하는데 농노제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조언했고, 결국 이 젊은 짜아르가 자신의 위대한 개혁을 시도한 이유는 대체로 국력문제 때문이었던 셈임(p327).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러시아의 짜아르 ‘알렉산드르’의 어린 시절과 당시의 가정적 분위기 및 러시아의 대외적 환경을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그가 ‘농노제도’의   폐지라는 개혁을 이루어내게 된 배경 및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개혁 실패의 원인에 대해 잘 분석해내고 있음. 우리 현실 가운데 여러 사회적 개혁안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극복할 방법은?


□ 요약(제7-6장 개혁 리더십 : 농노해방)


 ①‘알렉산드르’는 정치체제의 핵심적 부문들의 지도자들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는데, 고모 ‘엘레나 파블로브나’(Elena Pavlovna)는 궁정에서 그를 격려해 주었으며, 그녀는 니콜라이 1세가 실패한 농노해방을 ‘알렉산드르’가  이어받아 성취해줄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리하여 관료와 지주, 지식인층의 지지를 동원하기도 했음. 당시 지식인들은 서구의 여러 자유주의 사상가들과프랑스의 ‘생시몽’, ‘푸리에’, ‘프루동’ 등을 신봉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농노해방을 영원함(p328). ②수백만의 농민들을 농노로 부리던 지주층(젠트리)은 둘로 나뉘었음. 대부분은 농노제를 고스란히 고수하려 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사회적 헤게모니와 경제력을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농노해방을 받아들이려고 함. 그러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상당수의 젠트리들은 농업경제의 후진성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가정교사들이나 여행을 통해 서구를 알고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공유하고, 농노제가 완만한 도시화 산업화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우려하며 농노해방을 수용할 자세를 보이고 있었음(p328). 사회적 피라미드의 맨 하단에는 ‘농민’(muzhik)이 있었는데, 그들은 완고하고 문맹이며 굴종적이었음. 그들은 제대로 행동하면 보호와 총해를 받고 그렇지 못하면 채찍질을 당하는 등 잔혹하게 취급당함. 산발적인 농민봉기는-잔인하게 진압되었지만-혁명의 기운을 불러일으킴(p328). ③가능성과 문제점들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던 ‘알렉산드르’는 조심스럽고 우회적인 길을 택하였고, 그는 1856년 ‘크림전쟁’ 종전협정 선언문에서 머지않아 러시아는 민중들은 수고의 보람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함. 그러나 그의 언급은 매우 애매모호하여 냉소주의자들은 이를 대단치 않게 여겼으며 지주층의 리더들만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음(p328). 며칠 뒤 짜아르는 한 모스크바 젠트리 지도자들에게 행한 유명한 연설에서, 그가 농노를 해방하려 한다는 소문이 적어도 현재로는 낭설이라고 일소에 부쳤음. 하지만 그는 “물론 그대들이 지금과 같은 농노제가 불변할 수는 없음을 이해하고 있으리라 믿네. 그것은 밑에서부터 자연적으로 붕괴되기를 기다리기보다 위에서부터 파괴해 나가는 것이 더 좋지”라는 말을 하기도 함(p329). ④이러한 짜아르의 점잖은 협박도 젠트리 지도층의 별반 반응을 얻지는 못한 것 같음. 궁정과 관료들 중에서 농노해방 협력자들 쪽으로 물러선 짜아르는 농노해방을 위한 비밀위원회를 민들었는데, 위원장은 그의 동생이며 개혁의 지도자였던 ‘콘스탄틴’(Constantine) 대공이었음. 이 위원회는, 감히 농노해방이라는 말을 쓰지 못했는데, 대신 ‘농노의 생활조건 향상’이라고 부르던 과제가 달성되는 기간을 10년으로 잡음. 그러나 이 위원회의 임무수행 도중 귀족층과 젠트리 지주층의 강력한 반동에 부딪힌 ‘알렉산드르’는 신속한 농노해방이라는 쪽으로 선회함(p329). 1857년 12월 농노해방을 추진한다는 정부계획의 발표는 두 가지의 즉각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희망과 기대가 홍수처럼 쏟아졌고, 동시에 관료들과 지주층 사이에서는 태도의 양극화가 나타남(p329). ⑤농노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재산의 소유와 매매, 결혼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는데, 그러나 농노들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어려웠으며, 이전에 농노였던 사람들에게 허락해줄 토지소유의 규모, 이전 지주들에 대한 보상과 그 보상에 대한 농민들이 분담해야 할 몫, 농촌 자체의 문제, 그리고 농민에 대해 이전의 지주들이 갖고 있던 지배력을 마찬가지로 압제적인 존재인 ‘마을코뮨’(village-commune)에 양도하는 정도 등 골치아프고 당황스러운 문제들이 제기됨. 이러한 문제들과 그 외 문제들에 대한 해결은 이후 수십년간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결정짓게 될 것이었음(p329). 얼마 안 되는 관료들, 규모가 크고 열의가 없는 젠트리들, 빈약한 경제자원, 원시적인 사회자료와 연구결과를 가진 러시아의 차르로서는 위로부터의 심대한 변혁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제는 수행하기가 극히 어려운 것이었는데, 알렉산드르 자신도 오류가 많았고 주저했으며, 의심이 많았음(p330). ⑥‘알렉산드르’는 그의 노력이 일부 관료집단의 ‘리더’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는지, 또 지주들 가운데에서 농노해방의 뒤처리과정에서 개혁에 반대하도록 공작을 벌이는 자들이 있었는지를 가장 의심스러워 했는데, “통상적인 의사소통과 행정관리채널은 국가관료와 재향 ‘젠트리’들 사이에 존재했으나, 나눠놓고 보면 둘 중 어느 쪽도 짜아르의 의지를 수행할 리더십, 조직, 열의를 갖고 있지 못했다.”고 ‘엘프리드 리버’(Aflred Rieber)가 말함. 관료들과 젠트리들 사이의 적대감은 개혁을 더욱 어렵게 했으며, ‘짜아르’는 그의 개혁을 지지하는 젠트리들을 위해 대표기구를 설치하자는 제안을 묵살했는데, 그는 그 같은 기구가 개혁의 실체와 과정에 일정한 영향력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차르’가 인식했기 때문임(p330). ⑦결국 ‘농노해방’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동으로 남았는데, 그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법적 권리를 인정했으며, ‘젠트리’와 농민들간의 관계를 바꾸어 놓았지만, 러시아 농촌생활을 구성하고 있던 사회‧경제적인 기초를 변혁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러시아의 근본적 자유화나 근대화를 촉발하지도 못함. 그리하여 ‘램퍼트’(E. Lampert)는 “농부들은......이전에 비해 별로 나을 것이 없는 가혹한 계약으로 내몰렸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수혜한 것이 아니라 자유를 요구하도록 강요당했다. 러시아 역사상......경제부문이 인간의 예속에 더 크게 작용했던 일은 없었다.”라고 함(p330). 농노해방이 이루어지고 12년이 지난 뒤 정부의 한 위원회에서 대다수의 농민의 생활 수준이 이전과 같거나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고 보고하였고, 농민들은 해방되었지만 자유롭지 않았음(p331). ⑧러시아 개혁 ‘리더십’의 실패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하나는 농민, 그리고 국민의 필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었으며, 범슬라브주의자들은 농민들이 자신들의 토지, 교회, 국가와 불가분의 유대를 맺고 있다고 여겼고, 자유주의자들은 농민들이 정치적‧시민적 자유를 염원한다고 생각하고, ‘젠트리’들은 농민들의 질서와 안전을 바란다고 생각함(p332). “아니오. 아니오!” ‘투르게네프’(Turgenev)의 소설에 나오는 귀족은 젊은 니힐리스트 ‘바자로프’(Bazarov)에게 이렇게 말하는데, “러시아 민중은 당신이 상상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성스럽게 여기오. 그들은 가부장적 질서에 사로잡혀 있고 신앙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란 말이오.”라고 하였는데, 그러나 ‘진정한 자유’가 목표일 때, 러시아 농민들이 원했던 것은 법적인 해방을 인간적인 성취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그 무엇, 즉 농업기술을 익히며 더 나은 도로‧보건‧영양상태를 가지는 것이었음(p331). ⑨러시아 개혁 실패의 두 번째 요인은 근본적인 역사적 이슈를 제기하고, 그것에 대처하여 해결하는 데 있어서 사회‧정치적 갈등구조가 미비했다는 것이며, 러시아 국가의 가장 큰 신화는 ‘짜아르’와 ‘민중’이 하나라는 것이었는데, ‘알렉산드르’는 “주권자를 민중에게 묶어놓은 러시아의 결속이야말로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며, 신께서는 이를 결코 거둬가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적었음(p332). ‘짜아르’의 이같이 순수하고 깊은 동질감은 정쟁의 바깥에 서 있게 했을 뿐 아니라, 정쟁 자체를 없애버리게 만들었고, 제대로 된 의미의 정당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창조적 형태의 갈등들도 자유주의 단체를 적발하는 첩자, 밀정들에 의해 무산됨. 위로부터의 ‘리더십’이 개혁을 좌절시키게 한 세 번째의 요인은 최우선적 목표 또는 초월적 가치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알렉산드르’는 정치적 자유 그 자체나 사회적 기회부여 같은 주요 지침과 다름없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음(p332).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위로부터의 ‘리더십’을 통한 개혁의 맹점을 러시아의 개혁과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러시아 개혁의 실패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탁월하게 밝혀내고 있음.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개혁을 이루기 위한 ‘리더십’ 모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