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34강 리더십강의-19(변혁적리더십의딜레마)

presentlee 2024. 8. 18. 00:10

https://youtu.be/NILCcU5AWJg?si=SKBIMoNoYy4q45CE

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3부 변혁적 리더십

□ 요약(제7-7장 개혁 리더십 : 알렉산드르 2세)


 ①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해방 이후 20여 년간 더 통치했지만, 과연 그가 위로부터의 개혁의 실패를 이해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으며, 그는 또한 어째서 극단주의자들이, 그리고 심지어 분별있는 자유주의자들과 급진파들까지 자신을 믿지 않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의 목숨을 노리는 시도가 잇달아 일어났고, “이 악당들이 왜 나를 노리는가?” 그는 절규하였으며, “그놈들이 왜 나를 짐승 잡듯 사냥하려는 것인가?” 농노 해방 이후 다른 법적 개혁들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로 생각되었음. 1881년 3월, 코사크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눈덮인 길을 달려 동궁(冬宮)으로 돌아가고 있던 짜아르 앞에 한 남자가 뛰어들어 마차 뒤쪽으로 니트로글리세린 폭탄을 던졌고, 짜아르는 박살이 난 마차 속에서 무사하였지만, 그는 부상당한 호위병들의 용태를 확인하려고 현장에 계속 남아있다가, 두 번째의 암살범의 폭탄에 맞아 죽음을 당함(p333). ②위로부터의 ‘개혁 리더십’이 갖는 최대의 약점은 그것이 시간에 잘 견디지 못한다는 점인데, 알렉산드르 2세에 이어 즉위한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는 30년 전 그의 조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정교(正敎)주의‧독재‧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인물이었으며, 새 짜아르는 자신의 옛 가정교사이며, 이제는 성교회의 대집사가 된 ‘포베도노체프’(Pobedonstsev)의 보좌를 받았는데, 그는 탐심이 많고 지칠 줄 모르는 군주주의자이자 개혁의 적이요 반입헌주의자였는데, 절대적 리더십을 요구하였고, ‘로버트 번스’(Robert Byrnes)에 따르면, ‘그는 국가는 맹목적이고, 유기적이며, 역사적인 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러시아  역사는 국가의 역사라고 보았음’(p333). ③비스마르크가 의회에 대해 반대만 일삼는 무리라고 비난하고, 러시아는 절대주의 국가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표했다는 기사를 읽은 알렉산드르 3세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띄웠는데, ‘이 모든 것은 진실되고 올바른 내용이오. 모쪼록 모든 러시아인들, 특히 우리의 각료들이 비스마르크 공처럼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고, 불가능한 환상과 나태한 자유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바이오.’ 짜아르는 자신의 독재적 기질을 감추려 하지 않았으며, 그가 즉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포베도노체프가 작성한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민중의 복지를 위해’ 행사되는 절대권력의 힘과 참됨을 자신이 굳게 믿어 의심치 않음을 천명하는 내용이었음(p334). ④알렉산드르 3세가 자유의 짜아르라는 부왕의 자세를 견지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은-19세기 후반 러시아에 어떤 형태로든 개혁 리더십이 존재했다면-그 과제는 주로 그 나라 자유주의자들의 과제로 되었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여, 그런데 오늘까지도 러시아 자유주의와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을 제대로 규정하기 어려운 실정이었으며, 서구에서처럼, 자유주의는 현상유지 지향자들, 점진주의자들, 행동파들 그리고 보다 좌익에 가까운 사람들 모두를 포괄하고 있었으나, 러시아의 경우 자유주의는 다수의 범슬라브주의자들, 민중주의자들, 경제학자들,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이 자유주의적 목표를 얼마간 공유하며 정치적으로 자유주의를 표방하며 뭉쳐 있어서 더욱 복잡했음(p334). ⑤‘개혁 리더십’의 중요성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세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다시 한 번 중대한 입장의 차이가 노정되었는데, 그들은 개인의 시민적‧법적 권리를 수호함으로써 정부에 맞서 자기 권익의 보호를 꾀하던 자들, 정치적 권리의 신장과 보다 민주적인 대표제를 바라던 사람들, 그리고 주로 노동자‧농민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회경제적 개혁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었음(p334). 이 다양한 입장들은 역시 여러 가지의 정치적 전략들을 껴안고 있었거니와, 여기에는 기존 제도의 틀 내에서 점진적으로 목표를 추구해 나가자는 전략부터 국회에게 명실공히 입법부로서의 지위를 보장하며 지방정부의 권한이 강화되는 헌정체제를 수립하자는 전략 등이 두루 포함됨(p335). ⑥자유주의자들은 궁정, 관계, 재계, 그리고 지식인 사회 등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었으나, 그 주된 사회적 기반은 지주층이었는데, “교육, 세계에 대한 지식, 그리고 국가에는 접근 가능성이 19세기 러시아에서 귀족층을 감히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계층으로 만들었다”고 피셔(George Fischer)는 보았으며, 지주층은 오랫동안 군과 행정부의 주된 인력 수급원으로서, 그들의 영향력은 알렉산드르 2세가 지주귀족층을 농노해방 처리과정에 동참하도록 했을 때 절정에 달하였음. 그러나 19세기의 남은 시기 동안 지주층의 사회적‧경제적 영향력은 농노해방의 경제적 영향, 세계 농업 위기, 그리고 중공업 위주의 신국가 산업정책 등으로 감소해갔음(p335). ⑦황실로부터 오랫동안 누려왔던 특권도 빼앗기고, 자유주의적인 반체제인사들로부터 자극을 받으며, 정치권력의 상실을 맥없이 지켜만 보는 처지였던 지주들은 오랫동안 영향력을 갖고 있던 지방정부의 제도화로 힘을 모아갔으며, 그것은 ‘젬스트보’(zemstvo)라 불리는 기관으로, 선출 대표들로 구성되며 연1회 회합을 갖는 의회와 그 의회에서 선임되어 계속적으로 봉급을 받으며 근무하는 행정부로 구성되는 체제임. 이때 대표성은 ‘동산’보다는 소유토지량에 비례하였으므로 대지주들은 젬스트보를 좌지할 수 있어 농민들과 소읍의 부르주아들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었음. 불가피하게도 젠트리 자유주의자들은 이 체제를 짜아르 정권의 권력을 우회하면서 결국 그에 맞설 수 있도록 반(半)자율적인 지방정부로 바꾸려 함(p335). ⑧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큰 좌절에 부딪혔고, 농노해방 이후 30년 만에 중앙정부는 젬스트보로부터 중요한 재정권‧교육행정권‧사법권을 박탈해버렸으며, ‘개혁 리더’들은 의회의 무력화경향으로 인해 젬스트보를 등한시 하였으나, 1870년대 후반부터 1905년의 공산혁명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자들은 젬스트보 의회를 자신들 목적 추구의 수단으로 이용함. 자유주의적 ‘개혁 리더’들에게는 투쟁을 위한 수단이 별로 없었는데, 그들은 강력한 조직도 없고 검열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통신수단도 없었으며, 자신들의 메시지를 작은 촌락에까지 전파할 수 있는 국민적 수준의 조직화된 정당도 없었고, 19세기 말 당시 파국에 이르기 까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2⁓30년이었음(p336).  ⑨알렉산드르 3세 정권의 가혹함과 니콜라스 2세의 폭압적 통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노동자들, 농민들,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적 저항의 씨를 뿌렸으며, 산업화는 경제문제의 갈등을 일으켰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직화가 이루어지고, 젬스트보, 작업장, 대학에서 새로운 ‘리더십’이 성장하고 있었음(p336). 그 결과 젬스트보는 국정문제들에 대해 정부에 대항하는 기관으로 발전하고, 자유주의 ‘개혁 리더’들은 자유주의 조직 ‘해방’을 결성하기도 하며, ‘자유연합’이 구식적인 방식으로만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됨. 일본과의 파멸적인 전쟁, ‘피의 일요일’ 등을 통해 혁명분위기에 힘입은 자유주의자들은 ‘입헌민주당’이라는 자유주의 정당과 일정한 자율성을 가진 의회 ‘두마’를 만듬(p337). ⑩‘개혁 리더’들이 서구적 정당체제를 가졌다면 1917년의 사회․정치적 대학살을 피할 수 있었을까? 와 관련하여 두가지 의견이 있는데, 러시아의 ‘개혁 리더십’이 엄청난 사회․정치적 변혁을 이끌어낼 비젼과 역량이 있었다는 데에는 의문이 없으나, 치명적인 약점은 러시아 민중의 기초적 요구를 파악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점임(p337).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에 대해 시민권의 보장을 추구했으나, 1891년 참혹한 기근 이후 매일 먹을 빵과, 토지, 사회법의 입법, 경제적 안전확보 등을 멀리한 좁은 범위의 정치개혁에만 머무르고, ‘개혁의 성향’, ‘정치조직(정당)’ 및 의회의 제도 사이의 장기적인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음(p337). 또한, 그들은 세기가 바뀐 후 사회경제적 개혁으로의 ‘정치개혁’에 집중하지 못했고,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짜아르파 및 급진파를 포괄하는 갈등구조가 부족함(p338).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러시아 자유주의 ‘개혁 리더’들이 개혁적 전제군주처럼 행동하였고, 정부와 합세하거나 어느 정도 지원을 받으며 정부와의 갈등구조를 유지하지 못한 부분을 실패의 원인으로 잘 보여줌. 갈등 구조를 잘 유지하는 방법은?


□ 요약(제7-8장 개혁 리더십 : 미국에서의 개혁-변혁 리더십의 딜레마)


 ①개혁에의 막연한 성향은 가지고 있되 입장과 선호가 천차만별인 사람들을 일정한 개혁운동으로 결집, 동원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의 개혁을 어떻게 관련성은 있지만 분명 별개인 다른 개혁에로 연관시킬 것인가? ‘개혁가’들은 어떻게 정치가들․정당들․정부와 협상하여 복합적이고 일반적인 수요와 태도들에 대처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미국의 개혁가들을 괴롭히는 문제였음(p335). 많은 미국인들이 1830년대와 1840년대의 개혁무드에 영향을 받았으며, “세계 역사상 개혁론이 오늘날처럼 팽배했던 적은 없었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1841년 보스턴의 기술자 견습생 독서회 모임에서 “나라, 마을, 법령, 관례, 직업, 남자, 여자를 불문하고 모두가 이 새로운 정신에 의해 뒤흔들리고 있다...개혁가가 되지 않을 바에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것을 다시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을 바에는, 인간의 가치가 무어란 말인가?”(p340). ②스타일과 노선에 있어 미국의 ‘개혁가’들은 외국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에 비해 크게 다른 것이 없었으나 ‘네빈스’(Allan Nevins)가 언급한 것처럼. “미국, 그곳에서는 ‘다우’(Neal Dow)가 금주법에 맞서고, ‘스탠튼’(Elizabeth Cady Stanton)이 여권신장을 위해 싸우고, ‘랜토울’(Robert Rantoul)이 10시간 노동을, ‘맨’(Horace Mann)은 보다 낳은 학교를 위해 투쟁하고, ‘버니’(James G. Birney)는 노예해방, ‘그릴리’(Hrace Greeley)는 자유농가, ‘파커’(Theodore Parker)는 종교의 정화를 각각 추구하였으니, 제퍼슨이 인류의 무한한 완전성을 믿었던 곳이다.”(p340). 일부 개혁 리더들은 그들이 직면한 정치적 딜레마를 제도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개혁속도에 대하여 필립스(Wendell Philips) 다음과 같이 적었는데 “개혁가는 숫자에 무신경하고 대중성을 무시하며, 단지 이념, 양심, 상식만 중시하는 사람들이다...자신도 자신의 추종자들이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정치가는 항구적 ‘현재’충실하다...그의 소임은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의 개혁과 콥덴은 개혁무드를 일으켰고, 정치가 필은 그것을 법률로써 구체화했다.”(p340). ③1853년 ‘바워리’(Bowery)에서 모든 개혁 그룹들을 하나의 대규모 조직하려는 개혁대회가 열렸고, 같은 날 밤 뉴욕에서는 여권신장대회, 노예제폐지대회, 그리고 세계 관용대회 등이 열림. ‘부차적인 문제들’로 대회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 ‘비회원’ 개혁가들의 참여가 배제되었지만,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몇 가지 목적의 개혁가들의 동참이 허용되었고, ‘단결’을 강조하는 가운데 같은 도시에서 ‘개혁가’들 나름대로의 목적하에 집회개최도 용인됨(p341). ‘노예제폐지운동’은 단일쟁점의 열광자들과 다수쟁점의 통일지향자들, 점진주의자들과 즉각주의자들을 모두 포괄하여 ‘개혁가’들 사이의 이원성을 깊이 배태시켰음.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은 정치운동의 ‘리더’이자 남부 노예제구조에 대한 신학적인 접근법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발간했던 ‘해방지’(The Liberator)지의 창간호에서 그는 “나는 진리와 같이 가혹할 것이며, 정의와 같이 타협을 모르리라”고 외쳤는데 그는 무상(無償)의 즉각적 노예해방을 요구하는 목적과 수단 두 가지의 성격을 규정하는 ‘도덕적 절대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음(p341). ④‘개리슨’의 다른 태도와 관심이 무엇이었든간에 압도적으로 강렬했선 것은 노예제라는 단일하면서도 중대한 문제에 대한 그의 자세였으며, 그는 헌법을 “죽음과의 언약이요 지옥과의 계약”이라 매도하고 합중국의 해체를 주장함으로써 그 같은 극단적인 자세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는데, 그는 남부가 북부로부터 분리, 독립하거나 그 반대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 듯 하였고, 그는 노예제를 근절하기보다는 추방하려 했는데, 그는 그것을 암흑의 외계로, 그의 인식과 양심의 범위 밖으로 던져버리면 된다고 여겼음(p341). ⑤‘개리슨’은 다른 개혁그룹들과 연대하려 하지 않았고, 당연히 정당활동에도 몸담지 않았음. 그에게는 자신의 개혁주의의 순수성을 흐리게 할 의도가 추호도 없었으며, “그들은 마치 무식한 사람이 체리를 다루듯이 이념을 다룬다”라고 ‘로웰’(James Russell Lowell)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에 대해 말하며, “그들이 돌이든 뭐든 온통 삼키지 않고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라고 함(p342). 많은 노예 폐지론자들은 그 같은 단일문제 중심의 청교도주의를 거부했으며, 1840년대와 1850년대를 거치며 갈수록 그 같은 태도가 강해졌음. 그들은 북부에서 일고 있던 노예제폐지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하며 그룹별 전술을 다듬고, 제3당 창설의 모험을 조직화하고, 양대 정당의 정치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싣기 위해 노력했으며, 마침내는 1850년대 중반경 미국의 정치전략사상 가장 대담한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는데, 기존의 두 정당에 도전하고 그들 중 하나를 대체할 수 있는 신당의 창당이 그것임(p342). ⑥노예제 철폐론자들은 자신들의 오랜 원칙과 도덕성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인 ‘섬너’(Charles Sumner)는 “진정한 정치”란 단지 “공공 문제에 적용된 도덕”이라고 설명함. 그러나 ‘섬너’는 제휴와 타협의 정치술에도 능숙했고, 그와 또 다른 노예제폐지 ‘리더’(펜실베니아의 ‘스티븐슨’(Thaddeus Stevens)들은 의원직을 따내기도 함(p342). 결국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새로운 노예제반대 정당, 공화당이 야당의 분열상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인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수 있도록 정치환경을 조성하는데 한몫을 함(p342). 그들은 중도파인 ‘에이브러햄 링컨’을 내세워 승리했으나, 이 중도파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신당에 부여해 준 도덕적 힘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으며, 그가 그 사실을 망각했다면, 개혁가들은 그에 대한 지지를 이내 철회했을 것임(p342). ⑦‘링컨’ 대통령은 그의 장기인 인내력으로 개혁 도덕주의의 곤고(困苦)룰 견뎌냈으나, 그가 사용한 것은 개혁자들의 방법이었음. ‘링컨’은 급진파에 대해 이렇게 말했는데, “그들은 완전히 무법자들이다. 도무지 같이 일을 해나갈 수가 없는 추잡한 악마들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의 얼굴은 시온을 향하고 있다.”(p343).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마음이 교조주의적이었다면, 그들이 두 가지 근본적인 목표-노예들과 그들의 소유주들-에 어필하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임. 이점에 대하여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는 결론짓기를, 그 같은 성향 때문에 그들이 갈수록 “내향적이고, 주지주의적이 되고”그 결과 점점 신학적이고 종말론적인 사고로 전환되었다고 함(p343). ⑧마침내 노예해방이 ‘애프로매톡스’(Appromattox)’에서 성취되었는데, 이 승리에 임하여 개혁적 노예 폐지론자들은 어떻게 행하였는가? ‘개리슨’은 남북전쟁 이후 ‘전국 반(反)노예제협회’의 한 집회에서 헌법 제13차 수정으로 그들의 목적이 달성된 만큼 협회를 해체하자고 제안하였음. 그러나 이 제안은 한때 그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웬델 필립스’에 의해 비토되었는데, 그는 해방노예들에 대해 적극적이고 합리적인 재건정책을 수립할 것을 염두해 두고 있었으며, 이에 협회는 표결을 통해 존속을 결의했을 뿐만 아니라 ‘필립스’을 회장으로 선출하였으며, 그는 흑인 예속의 종식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토지와 교육 그리고 투표권을 부여해주려는 자신의 재건계획을 추진할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던 것임(p343). ⑨노예해방으로 인한 ‘소극적인’
자유는 사회․경제․심리적 자유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 꼭 보스턴 급진파들의 강령만은 아니었으며, 남북전쟁 도중 공화당 리더들의 권유로, 전쟁성은 해방 노예들에게 법적․정치적․경제적 보장을 해줄 방안을 강구할 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이 위원회는 남부의 플랜테이션 토지를 몰수하고 이를 해방노예들과 백인 영세농가에 분배할 계획을 검토하였으며, 다수의 급진적 공화당 ‘리더’들은 이 생각에 찬성하였고, ‘스티븐슨’에 의하면 그들은 40에이커의 토지와 움막 한 채가 투표권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음(p344).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미국에서의 ‘개혁 리더십’에 대하여 다루면서 19세기 중반의 다양한 개혁적 분위기를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잘 설명하고 있음. 특히 ‘노예제도의 폐지’와 관련하여 실제적으로 당시 정치적 분위기 및 흑인 노예들의 욕구들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논증하고 있음. 미국의 ‘개혁 리더십’들의 활동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며, 특히 노예해방의 개혁 성공의 이유는?


□ 요약(제7-9장 개혁 리더십 : 미국의 개혁 리더들)


 ①남북전쟁 이전의 개혁가들 다수가 순수한 재건계획에 찬성할 것인지가 중대한 관건이었는데, 그들은 찬성하지 않았고, 해방노예들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방정부의 조치에 반대함으로써, ‘개혁가’들은 공화당 대통령들과 의회가 남부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실시하려던 의지와 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고, 백인 소수파의 지배가 다시 성립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게 만듬(p344). 남부 흑인들의 생활의 기초를 재건할 수 있는 정책이라면 보수파, 중도파, 그리고 구 남부연방 리더들이 반대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던 일이었고 ‘개혁가’들이 점점 손을 떼면서 남부 흑인들의 기회에 대한 희망은 사라져갔음(p344). ②‘개혁가’들의 후퇴이유를 통해 그들의 ‘리더십’이 갖고 있는 제약들을 알 수 있는데, 대다수의 ‘개혁가’들은 사회의 필요를 특이하고 제한된 방식으로만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랜트’(Grant) 행정부의 잇달은 추문(醜聞)은 부패와 간계에 대한 그들의 뿌리깊은 혐오감을 자극하였으며, 그 혐오감은 개인의 성실성과 의무에 대한 기독교 도덕률, 공공예산에 의존하여 밥을 먹고 사는 빈민층에 대한 계급적 편견, 사유재산의 불가침성에 대한 열렬한 믿음 등에서 연유함(p344). ‘개혁가’들은 경기의 등락에 민감히 영향을 받으며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감내하는 ‘노동자’들과, 가뭄이나 유통 독점, 중간 상인 등에 휘둘리는 ‘농민’들의 필요 같은 보다 근본적인 필요에 대해서는 이해나 동정을 갖지 못했음(p344). ③도시 상류층으로 구성된 ‘개혁가’들은 출생, 교육, 도덕률, 사회적 지위 면에서 미국의 대중들과 유리되어 있었고, 모든 ‘개혁가’들은 경제적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하고, 정부가 자유민에 대한 일정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그러한 사람들이 어찌 강제 토지재분배로 사유재산권을 침해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겠는가?(p345). 그들이 민중의 태도나 흑인들의 필요와 관련된 사회적 가치를 선호했다 하여도, 그들은 정부에 영향을 미칠만한 정치적 술수나 자원을 갖고 있지 않았고, 자신들이 속한 중산층 그룹에서 개혁성향을 일깨우는데 익숙해있었지만 저임금에 시달리고 기회를 박탈당하는데 분노하고 있던 하층민과 노동자에게, 또는 미국의 농촌사정에 대해 점점 반항적이 되어가던 영세농민들에게는 거의 어쩔 수 없었음(p345). ④자유주의 ‘개혁가’들은 이들 그룹들을 “위험한 계급들”이라고 정의했는데, 거기에는 ‘이민자’, ‘무정부주의자’, ‘파업노동자’, ‘사회개혁가’, ‘정치선동가’, ‘선동가’, ‘반란자’ 등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으며, ‘자유주의 개혁가’들은 강력한 동맹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노동조합’과의 연계에 특히 취약했는데, ‘개혁가’들은 노동자들의 사정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리더’들은 “그들에게 자본과 노동 사이의 이해관계 대립에 대해 가르치는 대신 사용자들에 대한 맹렬한 비난으로 그들을 선동하고 위험한 계급적 적대감을 부추길 뿐이다”라고도 느끼고 있었음(p345). ‘스프로웃’(John Sproat)에 따르면 “노동자들에게 경제의 일시적 불균형을 교정하는 ‘자연의 법칙’을 진득이 기다리라고 설득하는 대신, 선동가들은 기업인들로부터 ‘부자연적인’ 양도를 얻어내고자 무지한 선동만을 행하고 있었다.” ⑤‘자유주의 개혁가’들은 일반이익의 메커니즘에 따라 다른 집단들과 연대하는 고전적인 방법-정당-역시 사용하지 못하였는데, 그들은 ‘정당’을 기피하고 혐오했으며, 정당식 사고, 당리당략, 정당의 부패, 그리고 정쟁(政爭) 등은 도덕주의, 개인주의, 순수주의에 반하는 것이었고, ‘뉴욕 개혁클럽’(The New York Reform Club)은 시작부터 정당인은 회원자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분명히 하였음(p346).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로지’(Henry Cabot Lodge) 같은 젊은 ‘개혁가’들은 그들의 소속 정당을 내부에서부터 개혁하려다가 고식책(姑息策)에 머무는 기회주의자라고 매도당함. 그 정당은 급진성을 띠어서는 안되며 ‘젠트리’에 의해 공평무사하게 영도되어야 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정당’은 필히 공개적으로 비판되어야 하는 것으로 봄(p346). ⑥정당식 사고는 ‘진정한 공공정신’에 양보해야 했고, 영향력있는 ‘개혁 리더’의 한 사람이었던 ‘스토레이’(Moorfield Storey)는 갈등이 첨예한 시기에 ‘정당’이 유용한 수단이 되지만, 평상시에는 정직한 정부 같은 간단한 목표조차도 성취할 수 없게 된다는 흥미로운 이론을 개발하였는데, 미국 정치의 압력요인들-특히 대통령직 또는 의회 과반수를 획득해야 할 필요성-은 ‘개혁 리더’들이 양대 정당과 행보를 같이하거나 아니면 제3의 당을 만들도록 강요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대체로 별 성과가 없었고 무력하였음(p346). ⑦1872년 ‘그랜트’ 제1기 행정부의 정실주의(情實主義)와 부패에 넌더리가 난 자유주의 공화당원들은 독자적으로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이 장군 출신 대통령의 재선을 저지하기로 결의하여, 대부분의 개혁파 리더들이 참여했고, ‘개혁가 슈르츠’(Carl Schurz)는 “이 나라의 인류 국민들이 자랑스러워 할 정부”를 탄생시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러나 다른 대의원은 ‘권모술수’와 정치적 거래를 탐닉하였고, 의심스러운 개혁성향의 ‘그릴리’(Horace Greely)가 지명되었으나, ‘그랜트’는 가을 선거에서 그를 쉽게 눌렀음(p347).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미국의 ‘자유주의 개혁가’들의 분위기를 잘 재현하고 있으며, 실제로 ‘개혁가’들이 정당의 활동에 친숙하지 못하였고, 이상향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으나, 실제 정치 속에서 그들의 개혁적 성향이 발현되기 상당히 힘든 상황이었음을 잘 묘사하고 있음. 우리 정치 현실 속에서 개혁에대한 성공가능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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