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GCiyeEJT9Go?si=WqnTrmCOVNFyXZN0
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3부 변혁적 리더십
□ 요약(제8-2장 혁명 리더십 : 마티 루터Ⅱ)
①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계층적으로 급속하게 상승하던 가정에서 성장한 젊은이와 교역과 이익 추구로 바쁘게 돌아가던 북부독일 환경의 상관관계를 더 강조하였는데,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론과 인식의 영향력을 중시하였음(p362). 특히, 루터가 ‘패역한’ 로마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들과, 그가 이 수도원에서 저 수도원으로 오랜 도보여행을 하는 도중 만나게 되었던 보통 독일 사람들로부터 받은 인상들을 중시했는데, 몇 년 안 되어(나중에는 거의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임) 그는 보잘 것 없는 탁발승에서 유력한 설교자, 빼어난 저술가 그리고 선동가로 탈바꿈했으며, 초기의 주된 통신 방법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었음(p362). ②‘프리덴털’(Richard Friedenthal)에 의하면, 그는 인간사에 대한 지식의 일각을 획득했으며,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갈수록 풍부해졌고, 읍락과 촌락, 가로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삶의 개념에 대한 그의 인식은 날로 착실해졌음(p363). 그것이 당시 독일 사회를 채우고 있던 다종다양한 사회적 위계들이 불안, 문화, 희망 등으로 비등점까지 끌어올려져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정치는 길거리에서 활발함을 보였으며, 모든 사람이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읍락에서 보통 사람들이 침묵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대로에서 오가는 대화들-농부와 귀족, 탁발승과 말 위에 올라탄 수도원장 그리고 포주와 대학의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은 맥빠진 의회 의사록이나 거기서 발표되는 무책임한 선언들보다 훨씬 당대의 격동을 반영하고 있는, 불타는 듯한 설교의 원천이 되었다.”(p363). ③그러나 그 이전보다 개혁을 향한 힘은 인쇄된 언어에 의해 움직여졌고, 문헌은 신속하게 전파되었는데, ‘루터’의 “기독교인의 생활향상에 대하여”는 불과 몇 주 만에 4천부가 팔렸으며, 적어도 20개 도시의 인쇄소들은 그의 설교록을 손에 넣기가 바쁘게 인쇄에 들어갔고, ‘루터’의 초상을 담고 있던 많은 목판들은 이 새로운 가르침의 효과를 극대화 함(P363). ‘마르틴 루터’에 대해서도 그는 단지 사회변동의 촉매였고, 역사를 흐르게 하는 힘이 한껏 축적되어오다가 단숨에 요원의 불길로 번질 수 있도록 댕겨준 불씨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으나, 사실 16세기 초 당시에 작용했던 여러 가지 동향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당시에는 ‘에라스무스’(Erasmus)와 그 외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배양되었던 인문주의가 만개하였으며, 교황청에 대한 반감도 한껏 고조되어 있고, 곳곳에서 정치분란과 무력충돌이 일어남(p363). ④‘루터’는 이 모든 추세에 반응을 보인 것으로 단지 수동적인 수용자에서 그쳤던 것은 아니고, 그는 민중과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통속적인 독일어를 썼으며,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서유럽 일반 민중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함(p364). 그는 자신의 설교 인쇄본을 일일이 점검하고 인쇄상의 잘못이나 싸구려 용지의 사용 등을 놓고 인쇄업자를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용기와 독립심의 이미지를 앞세워 여론을 이끌어 나갔는데, ‘루터’가 결코 굽히지도 매수되지도 않는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 모든 수사(修辭)나 술수들은 별 소용이 없었을 것임. 다른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자세 역시 결국 어떤 점에서 우경화되었고 심지어 반동적이 되었지만, 그가 혁명에 부여했던 가공할 폭발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음(p364). ⑤사람들의 가슴 속에 일련의 투쟁심을 심어주고, 그리하여 서유럽 전체의 신학적‧정치적 권력을 뒤흔들어놓음으로써, ‘루터’는 그 자신이 최상의 설교자이자 선동가임을 증명해 보였으며, 그는 조직설계자, 집단 지도체제의 리더, 혁명 막후의 전략가 따위는 될수 없었으며, 그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예언자였음. 최고의 조직 설계자들이 그 뒤를 이어나갔으며, 그리하여 종교와 정치의 군대가 진군해나갈 수 있었음(p364). 16세기 혁명적 개혁주의는 이후 두 세기의 ‘계몽’ 합리주의의 길을 열어주었었으며, 다시 2세기가 지나고 나서, 그리고 서방 그리고 나중에는 동방의 체제를 뒤흔드는 혁명의 원천이 됨(p364)
● 비평
필자는 ‘혁명리더십’의 대표적 인물로 ‘루터’를 먼저 언급하면서, 그의 혁명적 성격이 기원을 살피고, 또한 인쇄술의 발전 등 그 당시 ‘루터’가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배경적, 사회적 여건들을 살핌으로 인하여 총체적인 ‘리더십’의 발생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음. 아울러, ‘루터’의 ‘혁명리더십’으로 인하여 그 이후 서구 사회의 합리주의와 동양의 체제가지 큰 변화를 불러 일으킨 대표적인 ‘혁명리더십’이었음을 탁월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리더십’적 기질로 인하여 그가 행하였던 실제 행위들을 묘사하여 ‘루터’자신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짐.
● 토론
필자는 정치학적 혹은 ‘리더십’의 측면에서 ‘루터’의 ‘리더십’이 우경화되었고 반동적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음. 이러한 평가와 관련하여 ‘루터’의 혁명의 모습이 결국은 보수적인 모습으로 현 교회나 사회 내에서 자리잡은 측면이 있지만, 반동적이거나 반항적인 부분은 도리어 좌경화된 막시즘 등에서 더욱 크게 나타나고 있으며, 도리어 ‘루터’의 개혁신학은 체제 안정화와 공고화에 기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바, 이러한 신학적 ‘혁명’에 대한 평가적 입장은?
□ 요약(제8-3장 혁명 리더십 : 프랑스-대(大) 소용돌이)
①1790년대 부르봉가의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혁명과 관련하여서 일부에서는 이 사회적 발작(發作)을 단지 부르봉왕조가 보나파르트로 교체된 한 편의 장대한 연극으로 보았는데, 그러나 역사가들이 당시의 파리나 그 외 도시들의 경찰기록과 문헌들을 탐구하면 할수록, 최소한 파리에서만큼은 그것이 고전적 의미에서의 ‘혁명’이었음이 분명해지고 있는데, 혁명의 첫 단계는 귀족들과 상층 부르주아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대중 속에서 등장한 새로운 리더들이 당초 봉기를 이끌었던 명사(名士)를 뒷전으로 밀어내고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됨(p365) ②1780년대 프랑스는 혁명의 고전적 조건으로 볼 수 있을 상황에 놓여 있었고, 왕정, 국왕의 대신들이 시도한 개혁노력을 좌절시켰던 귀족‧기업‧길드의 공고한 보수체제, 중산층이 명예와 권력을 얻을 통로가 별로 준비되지 않았던 것, 왕실과 귀족‧상층 부르주아들 사이의 상당한 갈등, 그들의 ‘루소’와 ‘백과사전파’의 사상에 대한 심취, 미국의 독립혁명에 자극받은 분파집단이 그것임(p365). 1780년대 말에 상황이 한껏 고조되었고, 1787년 국왕은 150여년 만에 처음으로 명사회(名士會)를 개최토록 했는데, 국왕과 대표성을 결여한 의회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졌음(p365). ③175년간 존속했던 프랑스 최초의 삼부회(三部會)는 상당히 대표성을 지닌 것이었는데, 1789년 5월 베르사유 궁에서 개최된 삼부회에는 농민들과 부르주아의 간소한 차림을 한 600명의 제3신분 대표들에 이어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입장했으며, 마지막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등장했으며, 루이 16세는 특별한 개혁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았고, 의회는 쓸데없는 논쟁만 일삼다가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각 계급의 독자성 및 거부권을 고집하는 가운데 평민들은 단일한 국민의회를 결성하여 논의를 일반화하자고 주장하였고, 제3신분은 새로운 권리를 주장하고, 인민의 일반적인 의사를 내세우며, 자신들이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국민의회의 구성을 요구함(p366). ④이에 국왕이 제3신분 대표자들이 홀에 입장하는 것을 금지하자 제3신분 대표단은 저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선언’을 통해 자신들을 상설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언해 버리고, ‘루이 16세’는 왕권에 대한 그들의 정면대결에 동요해 개혁을 추진해왔던 대신 ‘네케르’(Necker)를 돌연 사임시켰고, 그러자 농촌지역에서 불가사의한 대공포(大恐怖)상태가 일기 시작하면서 파리가 들끓었고, 마침내는 바스티유 감옥에 대한 야만적인 습격이 진행됨(p366). 이 과정중 적어도 마지막 단계만큼은 3개 신분의 리더들에 의해 지도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대화에 임하고 협상하며, 선언문을 기초하고, 타협하며, 지배력을 행사하는지 알고 있었음(p366). ⑤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았고, 예의바르고 온화했을 뿐만 아니라 믿음직스럽고 합리적이어서 ‘혁명’의 움직임을 손에 쥘 수 있었으며, 대혁명의 ‘제1단계’에서 서민층과 그들의 리더들은 별 존재가 아니었으나, 설사 그렇다 해도 서민층이 무시될 수는 없었고, 프랑스인들에게 자크리의 난(亂)은 뚜렷이 기억되고 있었는데, 1752년과 1775년 파리에서 빵을 달라는 폭동이 일어남(p366). 양말 직조공들, 날품팔이 모자 제조업자들, 석수들, 제빵업자들은 제각기 파업에 돌입하였고, 이후 보수적 역사가들이 “광인들” “범죄자들”이라고 불렀던 ‘바스티유’를 습격한 사람들은 대부분 소상인, 공인, 임금노동자들이었음(p367). ⑥1789년 4월에 발생한 사건 중의 하나는 군중의 행동방식을 잘 드러내 준 것이었는데, 일부에게는 그것이 혁명의 주목할 만한 시작으로 여겨졌음. ‘레베이용’(Reveillon)이라는 이름의 벽지 제작업자가 있었는데, 그는 평소 친절한 업주이며 선량한 시민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 당시 수백 명의 ‘상퀼로드’들이 바스티유 근방에 집결해 레베이옹의 허수아비를 불살랐으며, ‘레베이옹’의 집을 포함한 가정과 상점을 약탈함(p367). 그들은 위병대의 직격사격에 맞서 막대한 희생자를 치르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후 군중과 주모자들이 대부분 타지 사람들이었다는 고발이 있었으나, 조사 결과 그들은 대부분 인근 주민이었고, 그들은 역사가 ‘텐’(Taine)이 비판했던 것처럼 “도적떼”가 아니었고, 뇌물을 받고 움직인 것도 아니었음(p367). ⑦군중이 쉽게 뭉쳤던 것처럼 리더들도 군중 속에서 어렵지 않게 나타났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행동에 돌입하도록 촉매역할을 하였으며, 우리는 이 ‘리더십’의 형태와 구조, 기원과 성격 그리고 지속성과 역량 등을 알지 못하는데, 군중 리더들에 대한 어떤 보고서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임(p367). 이후 군중 행태분석자들은 이 파리 시민의 기괴한 행태를 자신들의 임시적 대중행동론을 지지하기 위한 사례로 이용했으며, 따라서 ‘르봉’(Gustave Le Bon)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 리더들은 추종자들 대부분과 비슷하게 출발하는 일이 많았다. 그 자신도 이념에 취하여 그 이념의 사도로 나섰던 것이고, 그 이념이 그를 온통 사로잡았던 것이다.” ‘르봉’은 계속해서 이들 리더들이 “병적으로 신경질적이고 쉽게 흥분하며, 반쯤 돈 사람들” 중에서 나왔다고 쓰고 있음(p368). ⑧면밀하게 조사해보면 이같은 파리 군중 폭동의 행태분석에 의문을 갖게 되는데, 군중의 활화산 같은 에너지와 추진력의 근원은 아주 기본적인 것 즉, 굶주림이었으며, 당시 파리 노동자들은 거의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었고, 그들은 임금의 거의 절반을 빵값으로 썼고, 그들의 가족은 빵값이 조금이라도 비싸지거나 병충해 때문에 흉년이 들거나, 수송망이 교착되거나, 정부가 안 좋은 정책을 폈을 경우 믿기지 않을 만큼의 심각한 위험에 처했음(p368). 평균적인 파리 건축노동자가 빵을 사기 위해 임금 중 지출하는 비율이 1788년 8월의 50%에서 1789년 2⁓7월 사이에는 80퍼센트까지 치솟았고 빵가격이 천정을 뚫고 올라간 시점은 바로 바스티유 습격이 있기 직전이었음. 실질적인 빵 부족량에 대한 루머와 실제 보도는 상퀼로드들 사이에 공포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음(p368). ⑨가두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투표권도 없었고, 군복무도 할 수 없고, 국민의회에서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서는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임(p368). ‘뤼데’(George Rude)는 “이 기간중 혁명으로 군중을 추동했던 가장 기본적이고 지속적인 동기는 싸고 풍부한 식량을 얻고 싶다는 욕구였다”는데 동의하고 있으며, 농민들은 수도의 “불상놈들”에 대한 경멸까지 포함해서 불가사의한 ‘대공포’에 자극을 받아 귀족의 성채를 습격하고, 지방을 떠돌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떼강도들을 공격함(p368). 1789년 여름의 격동이 지나가자 개혁, 축하, 상대적인 평온의 시대가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이제 그의 간악한 고문(顧問)들로부터 놓여난 듯한 ‘루이 16세’는 들뜬 군중으로부터 프랑스의 국부(國父), “자유민의 왕”이라는 환화를 받음(p369). ⑩그는 삼색기(부르봉을 뜻하는 흰색에 파리시의 적과 청을 결합한, 점진적 개혁주의를 상징하던 깃발)를 수용하고, 국민의회를 입법부로 승인했으며, 새로운 국민위병 총사령관으로 ‘라파예트’(Lafayette)를 임명하는 것도 받아들였고, 국민의회가 결의했던 “봉건제 전면 폐지”가 그대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귀족층의 조세면제에 대한 비판, 공직자의 공공재산 사취금지 등을 촉발하였음(p369). 비록 많은 예외와 보상, 타협이 개재되기는 했으나 이는 재정‧행정‧사법 제도들의 더 심층적인 개혁을, 그리고 교회개혁을 위한 출발점이었음. 계엄령 사용은 제한되고 통일된 국세(國稅)가 선포되고, 교회 재산이 국유화되었으며, 정복전쟁이 ‘폐지되고’, 지방정부가 조직되며, 국왕의 지위가 아직 비정형적인 것으로 남아 있기는 해도 프랑스인들 사이에 서로 적대적인 요소들간에 휴전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보였음(p369)
● 비평
필자는 프랑스 혁명의 주된 원인이 ‘삼부회’의 소집과, 그들의 스스로의 국민의원으로서의 지위 획득, 굶주림에 기한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 등으로 보며 혁명의 세력이 사실상 식자 층이고 그 지역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프랑스 혁명의 배경적 원인을 당시 상황을 재현해 구성하고 있음
● 토의
결국 프랑스의 개혁의 지체가 프랑스 국민의 가난을 불러일으키고, 혁명으로까지 치달았다면, 점진적 개혁 통해 사회를 유지시켜나가기 위한 방안은?
□ 요약(제8-4장 혁명 리더십 : 프랑스 대혁명)
①국민의회의 권한이 최고의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국왕이 개혁안에 동의하는 것은 법적으로 필요하지 않았고, 단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중도파가 국왕이 신법에 동의 또는 심지어 공포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었을 뿐임(p369). 초가을 파리에서 단기간 동안 빵 부족사태가 있어났을 때, 그들은 국왕으로 하여금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로 향하게 하였으며, ‘루이 16세’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자, 여성들이 파리 중앙 시장에 모여 비와 진흙탕 속에서 대포를 밀고 베르사유로 행진해 갔음. 베르사유에서 국왕에 동정적이던 대표단을 국왕에게 파견, 국왕과의 면담기회를 얻었고, 국왕은 수용을 거부하였으나, 파리의 국민위병이 베르사유로 행진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결국 파리 귀환을 승인하였는데, 엄청난 수의 의기양양한 병사들, 귀족들, 시민 대표자들, 여성들의 무리가 왕실 마차를 파리까지 호위하며 따라감(p370). ②늦은 수확에서 풍작을 거두고, 국왕을 일종의 연금상태에 두고는, 프랑스는 몇 개월의 사회적 평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러나 바야흐로 프랑스의 정치지도자들은 점점 심각해지는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으며, 법적‧헌법적‧행정적‧재정적 개혁이 체제를 완전히 관통하여 실질적인 사회변혁을 유발‧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급증하는 욕구‧필요‧기대‧수요 등은 개혁주의의 실제 사회적 영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이 같은 급박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많이 주는 사회는 거의 없음(p370). ③자유주의적 정치개혁과 평등주의적 사회변혁은 폭넓은 국민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만, 혁명의 진행에 따라 사회적 갈등은 증폭되게 마련인데, 각 계급 또는 계층, 신분이나 집단간에는 뿌리깊은 갈등이 내재되어 있으며, 빈민층과 농민층에 맞서는 통일된 ‘상류계급’도, 또 일치단결한 ‘하류계급’ 공화파도 존재하지 않았고, 일부 귀족들은 호전적인 ‘자코뱅’이었고, 일부 상퀼로드들은 광신적인 ‘국왕파’였음. 도시민들은 농민들과 연대하는 듯하였으나 장인과 날품팔이들, 공장 소유자와 노동자들 사이에는 분명한 분열이 있었으며,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교구사제들이 보통 주교들보다 혁명이념에 더 긍정적인 경향이 있었고, 왕실이 부여해준 독점권과 기타 특권을 누리던 기업들은 제조‧매입‧매출의 자유를 요구하는 신흥 기업인들과 첨예하게 대립하였음(p370). ④프랑스대혁명의 진행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유럽 전반에 걸친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간의 적대감 상승이었는데, 혁명정신은 프랑스 국경에 구애받지 않아 파리에서 불붙은 횃불은 벨기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폴란드, 아일랜드 등의 급진파 ‘리더’들 가슴에 옮겨붙었고, 프랑스의 혁명파는 해외의 혁명파들과 연대했으며, 프랑스 국왕파도 마찬가지였는데, 양쪽 어디에도 공동전략은 없었으며, 심지어 어떤 조정조차 없었음(p371). 그러한 파리의 혁명파들이 ‘루이 16세’를 위협하면 할수록, 왕정 지지자들도 그를 지원하기 위해 앞다투었으며, 반면, 외국의 ‘리더’들이 왕정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프랑스로 침공하는 것을 좀더 깊숙이 논의 할수록 대혁명은 애국적인 활동이 됨(p371). ⑤바스티유 함략 이후 6주가 지나서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을 발표했는데, 1789년 여름의 유명한 정치봉기를 겪어가며 논의를 계속했던 국민의회는 이 선언이 충족 불가능한 기대수준의 상승을 초래할 것이라는 반대를 묵살해 버렸고, 이 ‘인권선언’은 ‘파머’(R.R.Palmer)의 분석으로는, 제1급의 위력을 가진 정치행동이었음(p371). “혁명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긍정을 통해 구질서의 도덕적 기초를 부정해버렸다.” 그것은 대체로 한 변호사의 불평불만 리스트라고 할 수 있었던 미국의 ‘독립선언서’보다는 1776년도의 ‘버지니아 인권선언’에 더 가까웠는데, 인권선언은 혁명에 몇 가지 두드러진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p371). ⑥인권선언서에는 스탠더드의 제시, 방향의 설정, 도덕적 목적의 표명 등이 포함된 장황한 서문 다음에 일련의 공리(公理)들이 제시되어 있었는데,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살며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모든 정치적 결사체의 목적은 천부의 또한 불가침의 인권-자유권‧재산권‧생존권‧억압에 대한 저항권 등-을 보장하려는 것이며,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유로운 사고와 의견교환은 가장 소중한 인권 중 하나이다. 법 앞에서 모두 평등한 시민들은 모든 공직에 대해 선임과 임용의 평등한 기회를 가지며, 그의 능력과 덕성, 재능 이외의 어떠한 차별대우도 받지 않는다.”(p372). 이 같은 명제들은 17세기와 18세기의 부르주아 혁명이 추구했던 최고의 가치들을 구성하고 있으나, 인권선언은 이 점에 있어서 양면적이고 분열적인 면까지 지니고 있었는데, 즉, 거의 모든 개인적 자유에 대한 약속은 질서잡힌 사회의 필요에 의해 대칭되고 있었던 것임(p372). ⑦다양한 사회적 특수성은 그것들이 공동선(公同善)에 이바지하는 한 가능하였고, 모든 주권은 근본적으로 국가에 귀속된다는 원칙 때문에 어떤 개인도 국가로부터 ‘명시적으로’ 유출되는 권한 외에는 어떤 권한도 지닐 수 없었으며, ‘심지어 종교에 의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제한받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의 표명은 법에 의한 공공질서를 저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음. 모든 시민은 말하고, 쓰고, 그것을 인쇄할 자유를 갖고 있으나 “법이 정한 경우에 따라 이 자유를 남용할 경우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p372). ⑧잠재적인 가치갈등은 혁명기간 내내 이론과 실천을 갈라놓고 있었으며, 1793년 공포정치가 시작되기 직전 작성된 새로운 인권선언의 초안은 “인민의 주권을 침해한 개인은 즉각적으로 자유민들에 의해 처형된다”는 조건을 첨부함으로써 개인과 사회 사이에 첨예한 구분을 두었음(p372). ‘생쥐스트’(Saint-Just)는 이 이율배반성을 간명하게 요약하여, “자유는 법에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러한 조건만 없었던들 이 두 번째 인권선언은 첫 번째의 것보다 훨씬 평등주의적인 문서가 되었을 것이고, 인민의 사회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국가의 의무를 보다 강조하고 있는 점도 높이 살 만했음. 단, 재산권은 두 인권선언에서 공히 기본적으로 보장되고 있었음(p372). ⑨‘프랑스 인권선언’은 ‘급진주의자’들과 ‘혁명가’들에게 수세대에 걸쳐 소집의 나팔이 되었고 역사상 전형이 되었으며, 파리의 거리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쏘아대던 머스캣총의 총성은, ‘렉스턴 그린’(Lexington Green)에서의 민병대들의 일제 사격소리보다 더 크게 “전세계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재난으로 끝나고 만 프랑스대혁명은 세계사에 큰 획을 그었던 반면, 대성공이었던 미국의 독립혁명은 단지 국지적 중요성만을 지니는 사태로 남고 말았다.” 만약 프랑스대혁명이 모든 시대와 국가의 ‘리더’들에게 고귀한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남겨주었다면, 그것은 또한 그러한 가치들간의 갈등이라는 유해한 유산도 남겨준 것임(p373). ⑩상퀼로드들과 농민들은 각기의 ‘리더’들에 의해 동원되어, 정부가 평등주의 신조를 지켜주기를 요구했고, 일자리와 빵을 마련해주고 근로조건을 개선시켜주도록 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열망하였으나, 중산층의 경우는 계몽주의의 자식들로서 난폭한 개인주의자들이었는데, 그것은 대중민주주의체제를 창출하여 그 체제가 존속하는 한 그들 스스로 운명을 형성해 나가도록 함이 아니었던가? ‘아렌트’의 견해로 진정한 자유는 인간의 권리를 상퀼로트의 권리로 바꾸고, 진정한 자유를 욕구의 뒤로 돌려놓았던 혁명가들에 의해 타락했다고 함(p374). ‘천민’들의 봉기에서 얻어진 것은 정치의 무력화였으며, 근본적인 열망이자 목표는 ‘자유’가 아니라 ‘행복’이었다고 주장함(p374). ⑪사회혁명에 대한 이러한 환멸은 날카로운 비판을 받아왔고, 그 때 모색된 것은 절망으로부터의 자립과 해방이었으며, 혁명가들이 빈곤층과 그들의 문제에 급급했던 것이 ‘타락’이었다 하더라도 춥고 배고픈 이들에게 달리 무엇이 더 중요한가? 참여적인 민주주의의 창조야 말로 자유(freedom)의 궁극적 정의가 아닌가? 아니면 궁극적 목표에 대한 수단인가?(p374) ‘아렌트’는 혁명의 딜레마를 극적으로 제시하였는데, 혁명과정에서 실제적인 수단, 제도적 구조요인과 궁극적 목표를 구분하긴 어려움(p374).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프랑스혁명을 통해 혁명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아렌트’의 견해를 빌어 잘 설명하고 있음. 혁명이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혁명이라 생각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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