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38강 리더십강의-23(러시아혁명)

presentlee 2024. 9. 15. 01:23

https://youtu.be/-uMGaOwV8qw?si=rRl9aautVF-VTvQD

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3부 변혁적 리더십


□ 요약(제8-8장 혁명 리더십 : 러시아 혁명-레닌Ⅱ)


①러시아에서 사회민주당의 우파가 ‘자유주의 리더’들로, 19세기 러시아 개혁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며, 1890년대의 격동기에 ‘자유주의자’들은 ‘밀류코프’의 영도 아래, 실질적 필요에 대해 관심으로부터 보다 급진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노선으로 전환했으며, 유능한 역사학 교수로서 서구 사상을 교육받고 ‘칸트’, ‘로크’, ‘흄’, ‘마르크스’같은 합리주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밀류코프’는 차르 정부에 의해 투옥되어 고통을 받은 뒤 급진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노선으로 전환함(p387). 그는 다른 자유주의, 좌익세력들과 동맹을 꽤했지만 자유주의 운동이 좁은 범위의 정치개혁에만 목매고 있다는 것을 곤란하게 보고, 그 소박한 개혁 위주의 노선을 넘어서거나 보다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추진하기 위한 자유주의 운동을 이끌어가진 못함(p387). ②‘레닌’은 자유주의자들을 경멸했고 증오했는데, 그들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부르주아적이었기 때문이며,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자들은 계급적‧재산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고, 그들은 차르와 자유 둘 다 원하기에, 둘 중 어느 것도 가질 수 없었음(p388). ‘레닌’은 자유주의자들의 도움을 원하지 않았고, 아마도 ‘레닌’은 자유주의자들이 노동계급 ‘리더’의 경쟁상대가 될 것을 우려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는 경제주의자, 온건파에 대해서 비슷하게 공격하였음. 이 모든 세력과 인물이 1905년에 일대 충돌을 일으켰는데, 그보다 한해 앞서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러시아군은 일련의 육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거듭했으며, 대규모 제국 함대가 의기양양한 기세로 세계를 돌다가 쓰시마 해협에서 몇 시간 만에 격파 당하자 패색이 완연함. 다시 한 번 혁명파의 준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패배와 고난으로 말미암은 정치소요가 일어남(p388). ③1905년 어떤 일요일날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짜아르에게 바치는 청원서와 그의 초상을 들고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다가 차르 호위대의 총탄에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피의 일요일’ 이후 자유주의, 노동, 혁명 그룹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났으며, 차르체제가 저항을 분쇄하는데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던 반면, 자유주의 리더들은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고, 농민조직들이 결성되어 저항에 나서고, 젬스트보 ‘리더’들이 전면적으로 정치개혁을 들고 나왔으며, ‘사회혁명당’은 차르의 삼촌을 암살함(p388). 망명상태에 있던 ‘레닌’은 사회민주당에 조언을 홍수처럼 풀어놓았으며, 그는 러시아에 돌아왔으나 고립된 채 실의의 나날을 보내야 했는데, 이 볼셰비키 ‘리더’는 당시 혁명과정에서 대단치 않은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던 셈임(p388). ④사실 ‘레닌’은 이미 대부분의 사태가 일어나고 나서야 귀국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자발성’을 불신하고 있던 그는 혁명의 예기치 못했던 과실(果實)을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모르고 있었음(p389). ‘페테르부르크’와 그 외의 지역에서 봉기했던 ‘볼셰비키’들은 주로 ‘멘셰비키’의 영향 하에서 그같이 행동했으며, 1905년 말까지 볼셰비키는 저항운동에서 일익을 담당하기는 했으나 결코 주도적 역할은 맡지 못하였고, 하지만 그러한 저항운동은 분쇄되었고, ‘레닌’은 사회민주당의 테러기피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치고 빠지기식의 공격과 은행와 정부기관들에 대한 ‘물자징발’을 행하라고 조언함(p389). ⑤‘레닌’은 이 혁명을 움직이고 있던 세력을 혐오하고 불신하였는데, 허약하고 나약해빠졌지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사관들, 테러리스트들, 인테리들, 소비에트를 주도하고 있던 멘셰비키들 심지어 자발성을 운운하는 노동자들까지도 그의 희망은 점점 농민들과 그들의 혁명 잠재력쪽으로 옮아가고 있었음(p389). 1906년 이후 러시아에서는 ‘개혁 리더십’과 ‘혁명 리더십’ 사이에 세기적인 대결이 벌어지게 되는데, 1905년 짜아르는 러시아를 입헌군주제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는데, 자유주의 영수인 ‘밀류코프’는 짜아르의 선언을 환영하면서 혁명투쟁에 있어서 위대한 승리라고 받아들였고, 1905년 ‘혁명’은 ‘니콜라이’ 황제를 두렵게 만들었으며, 입헌민주정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그의 약하디약한 신뢰를 결정적으로 뒤흔들어놓음(p389). ⑥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페어게임이 아니었다고 지적하는데, ‘개혁 리더’들은 지속적인 사회변화를 일구어내는 데 필수적인 시간과 정치적 자원을 결코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음(p389). 이 나라에는 자유주의적 개혁체제에 필요한 인프라가 결여되어 있었고, 젬스트보는 효과적인 의회기구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금세기에 접어든 혼란스러운 시점에서 온갖 정당들이 속출했지만, 그 조직과 ‘리더십’은 형편없었으며, 구체제의 관료제는 이 소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삐그덕대면서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음(p390). ⑦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아직 문맹이었고, 자치(自治)에 대해 논쟁할만한 역량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플로린스키’(Michael J. Florinsky)에 의하면, 자유주의자들은 “대의제 정부의 복잡한 다이내믹스를 성공적으로 일끌어나가기에 필요한 협상의 묘미를 아직도 완전히 터득하고 있지 못했다.”(p390). ‘페테르부르크’ 급진파의 비범한 ‘리더’로 떠오른 젊은 선동가인 ‘트로츠키’는 1905년의 상황을 이와 같이 요약했음. “혁명은 죽었다. 혁명 만세.” 입헌군주정하에서의 자유주의적 개혁 전망은 동시대인들에게는 그다지 비판적으로 비치지 않았는데, 러시아 국민들은 일찍이 산업 동원, 도시화, 중산층 성장, 언론의 자유 증진 등 다른 나라들이 자유주의 헌정수립의 배경이 되었던 여러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고 있었음(p390). 아직도 이론적‧실천적으로 유능한 ‘리더’들이 자유주의 진영에서 많이 출현하고 있었으며, 탄압만 당하지 않았다며 그 ‘리더’들은 전도가 유망해 보였음(p390). ⑧‘국가 두마’를 하원으로, ‘민중’ 의회인 ‘국가위원회’를 상원으로 하는 진짜  의회가 1906년 2월의 선언으로 수립되자, 짜아르가 애써 민주주의에 대해 양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으며, 하원의 선거구성은 대중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가운데, 짜아르가 입법에 대해 절대적인 거부권을 유지하고 있던 상태였으나, ‘개혁 리더’들이 이 때문에 상심하지는 않았는데, 대부분의 자유주의체제가 민중의 의사를 대략적으로 반영하는 체제로 출발했기 때문임(p390). ‘의회의 여왕’이라는 영국 의회의 경우 1905년 당시 아직도 상원의 힘이 강하고 하원은 일반 민중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국왕의 영향력이 상당한 것으로 비쳐지고 있었음(p391). ⑨러시아에서 의회민주주의의 성장은, 그것이 제한적이고 고착화된 ‘리더십’에 미친 영향과 더불어 1905년~1906년의 혁명상황에 좌우되는 것이었던 바 즉, 그 상황이 향후 꾸준한 정부의 자유화‧민주화 경향을 차단하는 것이 되는가 여부가 관건임(p391). 이 점에서 대부분의 ‘혁명 리더’들은 생각이 확실했으며, 그들에게 있어 부르주아 시기는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들이 성숙될 때까지의 역사의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 것임(p391). ⑩사회혁명당은 “농민의 요구에 부응해 활용 가능한 모든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조차 자본주의의 파괴에 전혀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을 가속화하고 농민들 사이의 계급분화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라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레닌’과 다른 혁명가들에게 자본주의 단계의 필요는 날카로운 문제를 던지고 있었음(p391). ‘레닌’은 보다 광범위하고, 결정적이며 일관성있는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날수록,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 가능성도 커지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하지만 러시아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은 초기에는 비록 전도가 유망해 보였지만 결정적이지도 일관적이지도 않았으며, 짜아르가 마지못해 신임 내각 수반으로 임명한 ‘위데’(Witte)는 무시무시한 ‘포베도노체프’를 포함한 일부 보수파 관료들을 과감히 숙청하고 자유주의적이고 젬스트보 계열의 조직들까지 포괄하도록 내각의 문호를 개방하려는 노력을 애써 기울였음(p391).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러시아혁명’ 상황 중에 ‘자유주의자’들의 움직임들에 대하여 잘 서술하면서, 한 국가의 개방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잘 그리고 있음. 그렇다면, 이런상황이 ‘레닌’ 혁명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 요약(제8-9장 혁명 리더십 : 러시아 혁명-4월 테제)


 ①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두마 선거’는 입헌민주당과 노동계 연합의 압승으로 나타났으며, 노골적인 보수파 중에서는 당선된 사람이 없으며, 다수의 농민 출신 의원들은 상상 이상으로 급진적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두마’는 이내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이 수십년간 열망해 온 보통선거, 직접선거, 토지개혁 등 고전적 정치개혁들을 요구함(p392). 그러나 짜아르는 이 같은 좌익 편향이 너무나 거슬렸으며 자유주의 정부의 약하디약한 제도화 수준에 지나친 부담을 느꼈으며, ‘위테’는 사임하고 차르에게 굴종하는 고리타분한 관료가 그 뒤를 이었는데, 짜아르는 자유주의 리더들의 정치개혁 요구를 일체 거부함(p392). ②두마 내에서도 다양한 정당분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격렬한 의견대립이 있었고, 그들 중 다수가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여, 결국 제1차 두마는 10주만에 와해되고 말았으며, 납세거부와 징병거부로 수동적으로 저항하고자 선동했던 200명의 좌익 대의원들을 체포되고 투옥되었고, 탄압시대의 막이 올랐으며, 제한투표에 의해 구성된 이후 두마는 갈수록 보수화되었고 많은 사회혁명당 ‘리더’들은 외국으로 도주했으며, ‘사회민주당’은 여러 소집단으로 쪼개짐(p392). 러시아의 자유주의 ‘개혁 리더십’이 이 시기에 그리 특출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혁명 리더십’역시 나을 것이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당 둘 다 1906년의 선거를 보이코트했고, 그에 따라 입헌민주당의 승리를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두 혁명당은 제2차 두마의 1907년도 선거에서는 전술을 바꾸어 사회민주당이 65석, 사회혁명당은 34석을 획득함(p392). ③자유주의 개혁가들에게 적의를 불태우고 있던 ‘레닌’은 혁명가들을 이끌어 입헌민주당을 공격하도록 했으며, 이 좌익으로부터의 공격과 극우파에 대한 황실의 재정 및 기타 지원, 그리고 여론의 보수적 동향 때문에 새 두마 의원들의 수는 반감되었음(p393). ‘자유주의 리더십’을 공격하는 것이 ‘레닌’ 전략의 기본이었으나, 혁명파가 득세하지는 못했으며, 경찰들의 추적과 추방의 고단한 세월에 ‘레닌 정당’내에서 서로 물고뜯는 논쟁이 벌어지게 되고, ‘레닌’은 그의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행태에 비판을 받았으며, 한 줌도 안되는 ‘볼셰비키’ 집단도 경찰의 간세가 숨어 있었으며, 이런 상황 속에서 차르체제는 다시 상승 무드를 타는 듯 했음(p393). ④결국 내부적 혁명 보다 일반적 격동이 체제를 뒤엎었는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레닌’은 휴가 중이었으며, 수년 동안 그는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결정적 전쟁을 예상해왔고, 역시 수년 동안 모든 나라의 열성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수주의적 충동을 초월해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해 국제적 연대에 들어갈 것으로 예측해 왔는데, 그는 그 자신에게 전달된 보고가 믿기지 않았으며, 독일제국의회와 그의 공국의회에서 열성 사회주의자들이 전쟁 지지를 표결했다니!(p393). 이 급진적 애국주의의 촉발은 ‘레닌’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고립무원로 만들었으며, 이제 그는 대부분의 사회주의 조직에서 배척당하고 불신을 받는 처지였으며 좋은 친구들과 동맹자를 잃음(p393). ⑤1914년에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측으로부터 비판받아 매장당하기 직전까지 갔으며, ‘울람’(Adam Ulam)은 당시를 돌이켜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당시 그가 겪고 있던 고립과 그에 대한 맹렬한 공격 자체가 레닌이 1917년에 위대해질 수 있었던 원인을 제공했다. 그토록 선명한 ‘혁명 리더십’을 추구한 사람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설적인 사고뭉치 독불장군은 러시아혁명의 종막에 팽배했던 거칠고 참을성을 잃어버린 분위기에 걸맞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p394). 전쟁 이전과 도중의 고난이 그에게 거인(巨人)적인 자기확신을 심어주고, 그것은 그가 그 주위에 늘어서 있던 거물들을 이끌고 지휘할 수 있도록 힘을 주었음(p394). ⑥1917년 초엽 ‘레닌’은 아직 취리히에 망명해 있었는데 과업과 일대 혼란이 러시아를 휩쓸어 결국 짜아르가 못 견디고 퇴위했다는 소식에 그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으며, 구 체제는 간단히 무너져내림(p394). 처음 ‘레닌’은 상황을 잘못 파악하여 이 혁명이 프랑스와 영국 대사들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으며 차르가 반혁명을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잡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는 러시아로 돌아가려는 열망에 불탔으며 그 귀환은 독일측의 교묘한 정치적 계산에 의해서 실현되었는데 즉 그가 자신을 ‘평화주의’와 혁명열정을 가지고 러시아에 귀국할 경우 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카이젤의 적으로부터 고무적인 결과가 기대된다고 본 독일 정부는 그에게 유명한 ‘봉인열차’를 내줌(p394). ⑦‘레닌’은 아직 소란과 분열로 시끄러웠으나 자유에의 열망이 넘치고 있던 러시아의 수도로 귀환했고, 각종 정당, 도당, 당파들은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적들과 비판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레닌’은 돌연 그의 ‘4월 테제’를 내놓음. 이는 아마도 그의 생에 최대의 놀랄만한 ‘리더십’ 행동이었을 것임(p394). 그는 자유주의자들,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혁명당 등에게 일체 양보하지 않았고, 임시정부에 대한 공격은 훨씬 강화되어야 했으며, ‘사회민주당’의 이름을 ‘공산당’으로 바꾸고, 즉각 부동산 몰수와 농민에의 토지분배를 실시하고, 멘셰비키와 중도파를 축출하며 새 인터내셔널을 수립하는 일이었는데 이 테제는 폭탄과도 같았음(p394).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외부적 격변이 러시아 혁명 수행의 중요한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당시의 러시아 정국과 그 가운데 ‘레닌’의 전략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음. ‘레닌’이 ‘4월 테제’를 통하여 신속히 러시아를 장악한 비결은?


□ 요약(제8-10장 혁명 리더십 : 러시아혁명-볼셰비키)

 

①‘레닌’ 입장에서 ‘혁명 리더십’에 있어 4월 테제는 최초의, 최대로 결정적인 입장수정이었는데, 당 지도부에서 그의 세력은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혁명 와중에 허다한 라이벌들이 당권 장악을 엿보며 등장해 있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위기, 요령부득의 문제들, 실천에 있어서의 선택문제들이 튀어나왔으며, 마르크스주의의 교리에 대한 끊임없는 변설(變說)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음(p395). ‘레닌’의 전술은 그날그날 바뀌었으며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임시정부에 대한 직접 공격을 날리기 위한 준비와 추종자 선동에 보내었고 어쩌다가 7월에 병사와 노동자들이 ‘자발적인’ 봉기가 혁명의 속도를 지나치게 높이려 했을 때 ‘레닌’이 혁명열기를 억제해야 하기도 하였음(p395). ②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근본적인 정책상의 차이가 ‘레닌’을 여러 동료들로부터 떼어놓았고, 그의 오랜 동료이자 라이벌인 ‘지노바예프’(Zinoviev)와 ‘카메네프’(Kamenev)는 당장 혁명봉기에 들어가는 것은 섣부를 짓이며, 사실상 자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p395). ‘레닌’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던 ‘트로츠키’조차 그에게 이견을 보였는데, ‘도이처’(Issac Deutcher)는 “레닌은 최종 목표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반면 ‘트로츠키’는 그 정치적 맥락에, 대중의 분위기에 그리고 주저하는 세력을 독려할 필요 등에 보다 주의를 기울였다.”(p395). ③1917년 가을, ‘케렌스키’(Kerensky)의 임시정부는 군사적 위협을 회피하기 위해 붉은 친위대의 재무장과 그 지휘관들의 석방을 용인했으며, 9월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되었고, 얼마 안 있어 모스크바에서도 그렇게 되었음(p396). ④10월에 ‘레닌’은 아직도 행동을 독려하면서 중도파가 이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던 가운데, 무장봉기를 준비할 혁명위원회를 수립하도록 했으며, 18세의 청년이 지휘하던 사회혁명당 좌파가 볼셰비키와 손을 잡았고, 그 어느 때보다 참을성이 없어진 ‘레닌’은 그의 최측근들로부터 왜 결행을 미루느냐고 독촉을 받으며 행동을 개시하려 했으나, ‘울럼’이 지적하듯이, ‘레닌’이 선동했던 일부 볼셰비키들은 “자신들의 리더를 저버리느니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대체로 비장한 심정이었다.”(p396). 사태는 절정으로 치달았고, 임시정부가 그토록 무능했고, 정치의 공백이 너무 만연되어 있었기에 무장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 볼셰비키가 정권을 탈취할 수 있었고, 단 몇 시간 만에 ‘레닌’은 최초의 볼셰비키 정부 성명을 써 내려갔는데, 전쟁 중단과 토지 분배에 대한 것이었음(p396). ⑤승자의 편을 들게 마련인 역사의 판단은 1917년에 ‘레닌’이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하였는데, 그 성공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엇갈리며, 그것은 마르크스 혁명론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는가? 자본주의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승리를 말하고 있는 교리가 ‘레닌’의 신념 그리고 일반노선에 지침이 되기는 하였지만, ‘레닌’은 이론가로서 구체적인 역경에 처하여 기본노선을 변경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줌(p396). 그는 한때 거의 무정부주의를 포용하는 듯했고, 또 다른 경우에는 테러리즘을 수용하는 듯 했으나, 실제 이론상으로는 두 가지 모두 배척하였고, 2단계 혁명론에 대한 고전적 문제들을 놓고 계속 태도를 바꾸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는 넒은 범위의 노동계급이 혁명을 위해 단결해야한다는 데는 마르크시즘적이었으나 프롤레타리아의 의견을 구하기에 앞서 멀리 나가 있었음(p396). ⑥‘레닌’의 강철 같은 자기통제, 전설적인 영도력(領導力), 그리고 절대적인 자기 확신에 기여한 것들은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있는데, ‘레닌’은 종종 자신의 동료들과 추종자들 사이에서 인자하지만 권위적인 가부장처럼 행동하였음(p397). ‘볼펜슈타인’(Vicor Wolfenstein)에 따르면, 그는 심리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채워주고 있었으며, “레닌은 의식적으로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리더’가 되기를 열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는 그는 ‘리더’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볼펜슈타인’은 일단 최고 지위를 노리는 사람에게는 동료와의 관계는 문제가 많을 수 밖에 없다고 하며 “그러나 그 자신이 ‘리더’일 때는 즉, 그가 자신의 혁명과정에서의 아들들에게 아버지처럼 행동할 수 있을 때, 그 희열은 압박을 상회하게 된다.” 그는 “강하고 의로운 리더. ‘아이들’의 사랑과 공포, 존경을 한몸에 받는 사람이 된다.” 이 ‘리더’는 추종자들에 대해 비인격화를 통해 자신의 양면적 감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데, 즉, 객관적 규칙과 절차를 수립하고추종자들에게 대한 중앙집권적 통제를 유지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이는 보통 규율잡힌 정당을 통해 이루어지며, ‘레닌’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했음(p397). ⑦이념적‧심리적 요인들보다는 정치적 요인들이 더 중요했을지 모르는데, 그 중 하나는 ‘레닌’이 러시아의 대중, 그 중에서도 특히 농민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는 점이며, 자유주의 개혁가들이 민중을 위하여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고 있을 때 이 ‘볼셰비키 리더’는 대부분의 농민‧노동자들이 진정한 자유를 수립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기반이 되는 경제조건의 개선과 사회변혁을 원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p397). ‘부르주아’ 정부가 과거에 존재했던 러시아 농민, 노동자, 병사들의 맹목적 애국심에 전쟁의 계속이라는 희망을 걸었을 때(1917년 봄과 여름), ‘레닌’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느끼는 것처럼 잘못된 전쟁 수행방식에 대한 저항보다는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저항이 증가하고 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볼셰비키는 수없이 많은 강령, 논문, 플랭카드를 통해 빵과 토지와 평화를 약속했으며, 그리하여 러시아인의 가장 절실한 욕구에 호소하였음(p398). ⑧‘레닌’의 ‘리더십’ 전략에서 이와 비슷하게 중요한 것은 혁명상황에 적합한 자세로 정치투쟁의 전선에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갈등이론’이었는데, 중도파, 자유주의자, 좌익이 단결하면 선거와 원내에서 반대파를 제압할 수 있었으므로 자유주의 개혁가들이 항상 합종연횡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데 비해, ‘레닌’은 보통 그 같은 협상을 일소에 부쳤음(p398). 그 이유 중 하나는 기질 탓이었는데 정치 뒷거래에만 익숙한 무기력한 의회주의자들 떼거리에 대해 ‘레닌’이 소수정예의 전위정당으로 규율과 원기를 다잡으려 했던 데는 단지 냉철한 계산 외에 감정적인 요인이 있었는데, 그는 혁명전량상 충실한 지지의 강도를 높일 수 있도록 갈등의 전선을 재수립하는 것이 지지의 폭을 좁힐지언정 절실하다고 보았음(p398). ⑨그가 그토록 지지를 목말라하는 상황에 감연히 지지를 뿌리치고, 고집스럽게 그렇게 하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10월 혁명 전야 기회주의에서 다른 리더들이 볼셰비키에 붙을 채비가 되었을 때, ‘레닌’은 그의 절친한 동지 중 일부를 잃으면서 중도파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음(p398). ‘레닌’이 민중의 욕구를 파악하고 있었던 점, 갈등을 더 첨예시켰다는 점은 그가 포용한 가치들과 밀접히 연관되는데 그는 계몽주의를 계승하고 있기도 하였음. 비록 그의 자유개념이 앞서 부르주아 혁명가들의 자유‧평등‧박애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이 궁극적 가치들이 과연 언제나 혁명의 도구적 가치 자체를 지배하는 것인지는 계속 의문이 있어왔음(p398). ⑩‘레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해주는 마지막 요소는 ‘혁명 리더십’의 소명(召命)에 대한 그의 존중이었는데, 그는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혁명이 이룩하려는 유형의 자유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는 사회주의 기본교리에 어긋나게 농민들의 토지소유욕을 양보하고, 권력확보수단이 개인의 자유, 정치적 자유를 침해하도록 허용했는데, 여기서 러시아 체제의 왜곡이 발생하였음(p399). ‘레닌’의 전위대 정당론은 체계적이었고, 봉기 직전 그는 혁명방법론을 분석, 교수하였으며, “일단 봉기에 들어갔다면, 최종 목표에 달성할 때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고 굳세게 나가야만 한다...그래야만...도덕적 우월성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함. ‘아르킬로코스’나 ‘이사야 벌린’에 따르면 ‘레닌’는 “꾀가 많은”여우인 동시에 “한 가지 꾀에 밝은” 고슴도치였음(p399). 하지만 ‘자유’에선 멀리 나아갔음.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레닌’의 리더십과 관련하여 최종적으로 ‘혁명가’로서 ‘전문가’였고, ‘혁명’ 자체를 숭상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음. 한편, 볼셰비키 혁명에서 그의 역할을 사실적으로 통찰력있게 분석함. 그렇다면, ‘혁명’‧‘자유’의 관계 및 우선순위?

 

리더십강의(제임스맥그리거번스)_24하우스(이현재)_러시아혁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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