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40강 리더십강의-25(영웅리더십)

presentlee 2024. 9. 29. 00:00

https://youtu.be/43qtlFmWbPQ?si=OoT74jgvbzd0E1st

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3부 변혁적 리더십


□ 요약(제8-14장 혁명 리더십 : 중국-모택동Ⅲ)


①모순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당에서도 지속될 수 있는데, “주관과 객관사이에, 생산력과 생산조건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는 한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모순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지속될 것이고, 그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완전할 수는 없다. 선인과 악인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p412). 누구나가 상대적인 견지에서만 옳거나 그른 생각을 하는 것이며, ‘모순론’은 단지 대립에만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헤겔주의적 ‘합’(合) 또한 포함하고 있으며, ‘모택동’은 “상호 모순되는 구조와 각 측면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밖에 없다. 한 측면에 반대되는 또 다른 측면이 없이는 그 존재성은 상실될 수밖에 없다.”라고 함(p412). ②생(生) 없이는 사(死)도 없고, 상(上)이 없으면 하(下)도 없으며, 행(幸)이 없다면 불행(不幸)도 없는 것인데, ‘모택동’은 계속해서 “상호연관되고 상호침투하며 상호침윤되고 상호의존적인” 일련의 사회적 모순의 존재쌍들을 열거하는데, 지주와 소작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등등을 이야기함(p413). ‘모택동’은 적대적 모순을 비적대적 모순(계급이익과 무관한 모순), 가령 노동자들 사이 또는 농민들 사이의 모순과 구별되는데, 근본적인 갈등과 투쟁을 빚어내는 원천이 바로 적대적 모순이며, 헤겔과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이 교리에서, ‘모택동’은 중국의 농민적 삶이 직면한 사회정치적 환경을 교묘하게 재해석하여 수용함(p413). ③갈등이 점점 증폭되어 적대성의 극대화 수준에 도달하면, ‘변증법적 역전’이 발생하는데 예를 들면, 통치자와 피치자가 서로 자리바꿈하게 됨(p413). ‘모택동’의 이 같은 논증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이로부터 세가지의 강력한 의미가 파생, 제시되는데 사회변화에는 정치갈등이 불가결함. 갈등은 ‘리더’에 의해 관리될 수 있고 계획될 수 있는데, ‘모택동’ 사상의 핵심은 갈등이야말로 변혁과 궁극적 통합에 필수적이라는 이념이며, “이 같은 사고법의 특유한 점은 그 단순성이다.” ‘슈만’(Franz Schumann)은 말하는데, “그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다만 몇 가지 철학적 전제들만 차용하고, 그 기본 개념들을 영구 지속적인 이원구조로 발전시켜버린 것이다.”(p413) ④그 같은 구조에서의 갈등해소는 또 다른 모순, 그리고 새로운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모택동’의 견해로는 수많은 모순이 존재하되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모순-경제적 모순-이 여타 모순을 틀지워주는 것이므로 ‘리더십’ 제1의 사명은 각 역사적 시점마다 주된 모순을 가려내주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힘을 결집시키는 것이 되며, 이것은 ‘리더십’에 엄청난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다름이 아님(p413). ‘리더’란 중요한 사회갈등을 단순히 반영하는 존재가 아니며, 그들은 어느 한편을 끌어올리고, 또 다른 세력은 무시해 버리는데, 그들은 단지 인간적 욕구에만 반응하는 또 다른 리더들의 도전 가능성을 위험요소로 갖고 있으며, 다른 한편, 다원주의적 체제에서는 ‘거래적 리더’들이 자신들의 인식 또는 무시하는 집단과 이해관계에 대해 훨씬 결정적으로 좌우됨(p414). ⑤우리는 이제껏 단순히 “모택동은 지상의 유일한 리더였다”는 식으로 언급해 왔지만, 그것은 사실 전체 ‘리더십’ 구조를 생각할 때 일부분만을 강조한 것이며, 이 책에서 취한 접근법대로 ‘리더십’을 집단적 견지에서 볼 필요가 있음(p414). ‘모택동’은 언제나 완만하게 변화하는 강력한 ‘리더’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들 중에는 세 번째 부인이며 당 간부였던 ‘강청’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규모 중국 공산당 내에서 제도화된 이 ‘리더십 구조’는 중국의 모든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당의 조직을 통한 풀뿌리 차원에서의 공산당 세포 동원도 가능하였는데, 이 당은 통상적인 공산당 패턴을 나타내어서, 인민대회, 중앙위, 정치국, 중앙서기국, 정교한 외곽‧지방조직, 그리고 비자발적이고 엄격하며 의무를 요구하는 당원 자격 등등. 이 당은 조직, 선전, 재정, 연구 등의 업무를 담당할 통상적인 부서들도 수립해놓고 있었음(p414). ⑥또한, 당연하게도 온갖 수단의 대중선전을 통제하고, 개인별 대면적 설득에 의존하는 방식을 특히 강조했는데, 구식‧신식의 설득방식들-최대효과를 위한 청자의 고립화, 감정적 긴장의 부추김, 당면과제의 단순화 등-이 대중의식을 고취하고 그들의 정치화를 유도하여 결국 풀뿌리 차원에서의 이데올로기가 될 때까지 동원되었음(p414).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모택동’과 그 외 중국 공산당의 ‘리더’들은 당을 최고 지도자들의 도구로 만드는 보통의 공산주의적 방식을 초월해 있으며, ‘루이스’에 따르면, ‘모택동’은 어떤 행동을 위한 전선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정치 ‘리더’들과 일반 중국 민중 사이의 상호적이고 조직적인 관계”에 의지했던 최초의 ‘중국 리더’였음(p414). ⑦이 점에 있어서 ‘모택동’은 당의 ‘리더’ 들에게 “우리는 결코 모르고 있는 것을 아는 척하지 말아야 하며, 아랫사람들에게 질문하고 배우는데 수치스러워하지 말하야 하고, 하급자들의 말에 주의깊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사가 되기 전에 학생이 될 것이며, 명령을 내리기 전에 하급자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p415) 당의 간부들은 이 “대중으로부터, 대중에게로” 노선을 따르도록 철저한 훈련을 받았으며, 각종 소원과 불만사항들을 수집, 분류, 요약된 후 소관 부처를 경유해서 ‘정치 리더십’측의 반응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다시 적절히 조정되며, 그렇게 수립된 새로운 정책의 설명이 다시 민중에게 행해지는데, 이 변증법적 과정은 무한 반복됨. 이 ‘리더십-팔로워십’의 상호작용과정은 결국 사상 최강의 ‘리더십’을 산출함(p415). ⑧대중의 태도가 정강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한-그 영향력은 심대했는데, 추종자가 ‘리더’가 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일생일대의 목표를 남을 이끄는데 두는 ‘리더’들로 구성된 그 모든 조직 내 부서에서 조직”으로 이루어지게 됨(p415). 모든 수준에서 발휘되는 ‘정치 리더십’의 한 가지 형태의 삶을 틀지웠는데, 공적이고, 가시적이고, 집단적이며, 시간‧정력‧개인의 참여를 한껏 요구하는 방식의 삶을 살도록, 그리고 비판과 자아비판에 막대한 시간이 투자되었고, ‘투쟁집회’와 ‘교정캠페인’은 서방의 시각에서 집단목표를 개인의 의지에 의식하는 ‘세뇌작업으로 비쳤고, 중국 공산당에도 결코 심각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갈수록 노령화되는 지도부, 상층부의 인사 정체, 이데올로그와 전문가 간의 마찰 등등. 그러나 이 당이 ‘리더십 체계로서 보여준 힘과 지속성은 분명 놀라운 것이었음(p415). ⑨‘대중’에게 잠재된 ‘리더십’ 역량을 동원하는데 효력을 보이 않았던 던들, 이 당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무시무시한 무력 앞에 결코 견디지 못했을 것임(p416). 공산당 ‘리더십’이 직면했던 가장 흥미로운 전략상의 문제들 중 하나는 그들이 자리를 빼앗은 구엘리트, 특히 상류 지식인층 들로 지적 수준이 높고 보통 서구적 교육을 받은 전문가 집단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였음. 근본적으로 이들 특권층은 위협적인 세력으로 여겨졌으며, 그들의 여러 특권과 재산의 대부분은 몰수되었고, 뒷조사와 재교육을 통해 기세가 꺾이고, 자식들은 하방(下放) 당해 당해 농민들과 함께 일하도록 되었는데, 일부는 자식들을 해외로 도피시켰고, 일부는 마지못해 공산당의 힘 앞에 굴복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소수의 안락을 적절히 희생해서 일찍이 억압받았던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복지를 마련할 수 있다고 여겨 이 ‘신문화운동’에 동참함(p436). ⑩근본적으로 반지성적인 이 정권의 편벽성은 여전히 그대로였는데, 여기서도 문제가 확실히 규명되어 있지는 않으며, 공산주의자들은 정치기구를 손질하는데 천재적인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공산주의 이론과 교리에 일대 기여를 했고, 중국에 거대한 이념적‧정치적 그리고 놀랄만한 정도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진정 변혁적 혁명이라 할 수 있음(p416).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중국 공산당의 정치 리더십의 모습을 당시의 분위기와 배경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음. 또한,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리더십’ 이론을 통하여 통찰력있게 고찰함. 우리 사회의 ‘정치 리더십’의 현 상황은 어떻게 생각하며, 국민들과 의 소통을 이루는 방법은?


□ 요약(제8-16장 혁명 리더십 : 중국-모택동Ⅳ)


 ①중국 공산당들은 어떤 궁국적 목표를 다듬어내고 그것에 일로매진하기보다는 수단과 임시목표의 이론에 더 수완을 보였는데, 이 체제가 수립된 후 지난 사반 세기 동안 제도화된 당의 강령들, 프로그램들, 사회경제정책들로부터 많은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평등주의적 목표는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p417). 그러나 최고 목표들 사이의 우선순위와 상호관계에 관한 심층적 문제들에 있어서-특히 개인의 자유와 전체주의, 사회의 집단적 선(善)문제를-이 ‘혁명 리더십’은 그리 지적이거나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그것을 문제삼는 한, 이 ‘혁명 리더십’의 궁극적 성공 여부는 판단하기가 불가능해짐. 중국의 ‘혁명 리더’들은 이론에서나 실제로나 시민권을 하나의 전통으로 받아들여본 일이 없으며 그들은 그것을 결코 창출해니지도 못했음(p417). ②넓게 보아 ‘혁명 리더십’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열정적이고, 헌신적이고, 일방적이며, 사정 없고, 자기 확신에 넘치며, 용감하고, 지칠 줄 모르고, 유머가 결여된, 대개 잔혹한 것이라 할 것임(p417). 그것은 보통 엄격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지만, 실제 이론을 적용하는 경우에는 유연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은 또한 갈등과 연관되게 마련이며, 선과 악의 대립, 그리고 구원의 믿음과도 연관되며, 그것은 예언자(豫言者)를 필요로 하나, 지속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과 ‘집단 리더십’ 역시 필요하며, 그 원천은 인간적 욕망‧욕구의 마른 장작에 불을 댕기는 불꽃같은 ‘리더십’, 압제, 대중에게 널리 퍼진 불만, 개혁의 실패에 좌절해버린 ‘리더십’인데, 그 성패는 강력한 가치체계에, 민중의 욕구에 대한 대응성에, 그리고 이견(異見)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에 달여있음(p417). ③그것은 이론상으로는 평등지향적이지만 실제로는 항상 그런 것도 아니며, 그것은 치열한 갈등상황에서 ‘상호성’을 띨 경우 ‘리더십’으로 평가받으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야만스러운 힘이 될 뿐임(p417). 프랑스 대혁명 시 ‘리더십’은-그 초기의 윤리적 비전이 자기의 주검을 딛고 일어나 이후 세대에게 영감을 주기는 했지만-단순한 태러로 타락해버렸으며, 러시아 혁명의 ‘리더십’은 개혁운동을 좌절시켰고, 그것은 러시아 대중의 ‘사회질서’, ‘물질적 복지’, ‘국가적 위신에 대한 욕구에 부응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음. 중국혁명의 ‘리더십’은 셋 중에 가장 변혁적이었으나, 그 또한 대규모의 잔인한 처사와 희생을 남김(p418). ④혁명의 인본주의적 목표-가치는 대개 모든 계급에 의해 공유되며, 그것은 곧 혁명의 힘이 되는데, 혁명이 ‘행동양식가치들(moral values)을 일부 훼손하기 때문에 –투쟁을 진행하며 드러내는 잔혹성과 약속깨기 등-공포와 반혁명운동이 배태됨(p418). 그런 면에서 미국혁명은 심각한 상처를 남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워싱턴’과 ‘애덤스’ 같은 ‘혁명리더’들의 근본적 성실성과 미덕에 있음. 혁명은 단지 최종목적을 대표할 뿐 아니라 그것을 구체화하는 제1세대의 ‘리더’들을 낳는 경향이 있는데, 도대체 누가 ‘레닌’, ‘모택동’, ‘볼리바르’, ‘카스트로’, ‘호지명’이 없는 상태에서의 혁명가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는가?(p418). ⑤‘스탈린’은 바로 이 점에서 실패했는데, ‘윌슨’과 같이, 그는 행여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이미지를 어떤 이상적인 것으로 재구성함(p418). 이 이상적 이미지는 그가 지고(至高)한 정치 ‘리더’라고, 또 지적세계 에서도 태두(泰斗)라고 아랫사람들의 아첨이 쇄도하게끔 하고 그 속에서 백일몽에 잠기게끔 만들었는데, 더욱이 ‘레닌’은 그에게 문제있는 유산을 남겨주었으니, 그것은 최종국면에 혁명수단을 혁명목표 위에 두도록 하는 노선이지만 그러한 유산이 없더라도 이 그루지야인이 유년기에 겪은 참담하고 심리적 상처가 컸던 경험들을, 그리고 수세기 동안 러시아를 짓누르고 있던 압제를 끝내 극복해내기란 어려웠을 것임(p419). ⑥1941년과 1942년 ‘스탈린’에게 자신은 민중이 살아남기 위해 가장 절박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도왔지만, 그는 러시아 민중의 혁신, 창조성, 자유로운 의사표현에 대한 갈구를 결코 인식하지 못했으며, 일단 그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 수많은 옛 동지들과 적들을 그의 또 다른 숙적-아돌프 히틀러-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냉혹하게 학살해버린 이후부터 그는 더 이상 ‘리더’가 아니라 한 사람의 ‘독재자’일 뿐이었음(p419).
● 비평
  필자는 혁명 리더십에 대하여 ‘프랑스’, ‘러시아’, ‘중국’을 비교하면서 그 특징들을 잘 열거하고 있음. 그의 견해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결국은 테러로 끝이 났으며, ‘러시아 혁명’은 ‘스탈린’ 이 후로 단순한 독재자로 그 리더십이 전락해 버렸고, ‘중국 혁명’이 이 셋 중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보고 있지만, ‘중국 혁명’도 결국 수단이 목적을 대체해버린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짐. 또한, 공통적으로 이 3가지 혁명의 특징은 많은 인명 살상과 피해를 낳았다는 것인데, 이에 비하여 미국 혁명의 경우는 이러한 희생이 발생하지 않은 점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리더십’의 자질 역시 ‘혁명’의 과정에서 성장한 경우라고 평가하는 것으로 생각됨
● 토의
  결국, 필자의 견해를 살펴보면 인명 살상과 희생을 최소화하고 수단이 목적을 추월하지 않는 한에서, ‘리더십’의 역량을 함께 성장시킬 수 있는 ‘혁명’의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보여짐. 우리의 정치‧사회적 현실 속에서 이러한 ‘혁명 리더십’과 관련하여 적용할 점이 있다면? 또한, 우리의 시대상황이 이에 맞는지?


□ 요약(제9-1장 영웅과 이데올로기 : 모세, 잔다르크)


 ①‘프로이트’(Sigmund Freud)는 19세기 말엽에 로마 여행 중 빈콜리의 외진 곳에 위치한 상 피에르토 교회에서 우연히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을 보았는데, 당시의 인상을 잊지 못한 그는 몇 년 후 다시 그 교회를 찾았고, 이번에는 모세 상을 3주간이나 관찰하며, 십계명 판을 들고있는 모세의 모습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스케치했음(p421). 금송아지 상을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차갑고 분노에 찬 얼굴과 긴 수염을 늘어뜨린 방향까지 세밀하게 관찰했으며,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에 ‘프로이트’는 모세 상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 깨닫게 되었는데, 모세가 우상 숭배자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기 보다 자신의 감정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자제하고 있다고 ‘프로이트’는 결론지었음(p421). ②‘프로이트’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었는데, 마침내 ‘프로이트’는 그 내용을 책으로 써서 익명으로 출판했으며, 전기작가인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는 “프로이트가 자신을 모세와 동일시했다”고 회상했으며, ‘미켈란젤로’가 작품에 담아내었던, 절제된 감정의 모세 모습을 “프로이트가 열심히 모방했다”고 밝힘(p422). 우상을 숭배하는 타락한 백성을 향해 모세가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처럼, ‘프로이트’는 당시 ‘아들러’(Adler)와 같이 자신의 이론에 반기를 든 그의 제자들에 대한 분노를 참아내기 위해 무척이나 애쓰고 있었으며, ‘프로이트’는 후에 익명으로 출판한 책을 ‘사생아’라고 비유하며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년이란 세월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소비했다”고 말했는데, ‘프로이트’는 노후에 ‘모세와 유일신’이라는 책을 출판했으며, 이 책에서 모세가 역사적 대의를 지키기 위해 당시의 체제와 관습을 초월했다며 그를 ‘위대한 행동가’로 평가함(p422). ③‘모세’는 뛰어난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들 중 으뜸가는 인물이었으며,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세’는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풍성과 옳다고 믿었던 사상을 통해 서양문화사에 기념비적인 영향을 미침(p422). 모세의 위대성과 모호성이 ‘카리스마’라는 개념 속에 함께 내재해 오늘날까지 ‘역사의 영웅’이란 인물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고 있다고 ‘프로이트’는 지적함. ‘모세’와 같이 ‘카리스마적인 리더’는 국민의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지주이자 권위의 원천이며, 입법자이자 정치가라고 볼 수 있음(p422). ④‘모세’는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종교적, 정치적인 이상을 위해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였으며, 또한 그는 그의 백성에게 우상이자 기적을 만들어내는 자, 예언가, 마술가, 또는 실체적인 법과 사상이 아닌 그의 주술이 가진 후광 효과로 국민들을 자극시키는 인물로 비쳐질 수 있음(p422). 그러나 모세는 이 두 가지 역할을 모두 다 해냈으며,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지적처럼, 그는 예언자이자 입법자로서 국민을 이끄는 ‘리더’였으며, 왕자로 태어났고 신의 계시도 받았는데, ‘마라’(Marah)의 쓴 샘물 맛을 달콤하게 하기 위해 그 샘물에 지팡이를 던졌고, 바위를 치자 불이 뿜어져 나왔으며, 신의 대리인으로서 그가 선포한 법과 가치체계는 그 형식에서 너무나 명확했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너무나도 보편적인 방법을 사용함. 서구의 정치사상과 행동양식에 모세만큼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도 드물며, 우상이자 이론가로서, 또 영웅이자 입법자로서 시대가 부여한 역할을 동시에 그렇게 잘 수행할 수 있기는 매우 어려움(p423). ⑤ ‘모세’와는 달리, 1420년대 후반, ‘뮈즈’(Meuse) 계곡의 아름다운 목초지와 신비스러운 참나무 숲에서 입법자 아닌 영웅으로서의 놀랄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 나타났는데, ‘잔 다르크’(Joan of Arc)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음. 평화스러운 농촌 생활을 방해하는 적군과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전쟁터에 나섰음(p423). 그녀는 18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태자에게 왕처럼 행동하라”고 권하고, 전쟁터에서 보인 용기, 순교자로서의 고난, 그 후 이어지는 명예회복, 그리고 그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그 후에 성자로 인정받음. 시대적 영웅이란 만들어지며, 역사적산물로도 간주할 수 있는데, ‘잔 다르크’가 들었다는 천사의 목소리는 그녀를 주저하게 만드는 저항 요인이나 반대 세력을 단기간 내에 극복할 수 있는 확신과 자신감을 주었음(p423). ⑥그녀의 명성은 갈등을 통해 커 나갔는데, 영국군과 프랑스 동맹군은 그녀를 위안부나 창부로 취급했고, 심지어 마녀라고 부르며 저주했으며, 교회는 그녀가 말한 천사의 ‘목소리’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역사가들은 아직까지 ‘잔 다르크’라는 전설적인 영웅이 어느 정도까지 존재했는지 논란을 벌이고 있지만, 그녀가 경험했다는 ‘목소리’와 ‘계시’는 일반적인 환영의 패턴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음(p423). 살아있는 동안 ‘잔 다르크’를 지탱해준 힘, 그리고 화형 당한 후에 전설 속에서 그녀를 지탱해 준 힘은 전쟁터에서 그녀 주변에 모여들었던 추종자라고 볼 수 있음(p423). 그녀의 소규모 추종자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거리를 행진했을 때가 영웅 출현의 서막이라 볼 수 있음(p434). ⑦평범한 프랑스 농민에게 당시는 계시의 시대였으며,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던 평민에게 ‘잔 다르크’는 대중의 우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궁정과 교회가 두려워하는 대상으로 변화함(p424). 어떤 농가의 소녀도 ‘잔 다르크’와 같은 대담함과 확신을 갖지 못했으며, ‘잔 다르크’는 영웅이 될 기회와 행운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초기 이단교인의 운명이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에 못박힌 채로 화형을 당하는 박해를 통해 그리고 그녀의 부활에 대한 국민적 희망을 통해 ‘잔 다르크’의 이름이 일반인의 의식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남게 되었음(p424). ⑧그러나 의문이 남아있는데,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리더십’이 지속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가졌는가?(p424). 그녀가 죽은 후 공공영역에서 그녀의 이름은 일단 사라졌는데, 국민적 요구 보다는 그 당시 정치적 상황에 의해 ‘잔 다르크’ 사후에 재심과 복권이 이루어졌고 그 명성도 회복할 수 있었으며, 프랑스에서 영국군을 몰아내려 했던 그녀의 희망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루어 졌음. 그러나 평민의 자식으로 ‘잔 다르크’는 인민의 감정을 고취시켰으며,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프랑스적인 것들이 ‘잔 다르크’로부터 형성됐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음(p424). ⑨프랑스 애국주의의 기수로서 그녀는 중요한 시기마다 프랑스를 재생시킬 수 있다는 인상적인 이미지를 남겼으며, 프랑스인은 지금도 ‘잔 다르크’를 눈부시게 생각함(p424). 프랑스는 그녀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왜냐하면 “자유를 갈구하는 화신으로,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시대적 욕구와 염원의 표현이기 때문”이라고 ‘라이트보디’(Lightbody)는 그 이유를 들고 있으며, ‘잔 다르크’는 정치적인 정책이나 제도의 형성, 또는 기본적인 법의 형태로서 프랑스에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녀 생의 마지막 순간처럼 ‘잔 다르크’는 지금도 프랑스를 억누른 반대세력과 맞서 싸운 역사의 영웅으로 기억됨(p424). 
● 비평
  필자는 ‘프로이트’가 ‘모세’에 대하여 바라본 시각을 통하여, ‘모세’의 ‘리더십’에 대하여 분석한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모세’가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대중들에 대하여 분노하였지만 그 분노를 초월적으로 인내하고 있음을 ‘프로이트’가 발견하고, ‘모세’와 같은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자 노력했다고 언급함으로 인하여, ‘리더십’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로 ‘인내’의 요소를 심리학적 측면에서 다루고 있음. 한편, ‘잔 다르크’라는 프랑스의 여성의 대명사가 된 인물을 언급하면서, 그녀가 비록 역사적으로 남겨놓은 유물이나 유작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리더십’이 역사적으로 남아있어 프랑스의 정체성을 찾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녀의 ‘영웅적 리더십’에 대하여 다루고 있음. 이처럼, ‘모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잔 다르크’의 ‘영웅적 리더십’을   통하여 ‘리더십’의 ‘카리스마’적 요소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음.
● 토의
  필자가 ‘리더십 강의’를 통하여 본 장인 ‘변혁적 리더십’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과거에는 ‘변혁적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로 제시된 후, 독재자의 이미지가 덧씌워져서 그 긍정적 이미지가 퇴색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여짐. 우리 사회 현실 속에서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긍정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여지는 없는지? 있다면 ‘카리스마적 리더’에 대한 적용 영역이나 범위는?

리더십강의(제임스맥그리거번스)_24하우스(이현재)_영웅리더십.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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