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37강 리더십강의-22(리더십의사명)

presentlee 2024. 9. 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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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3부 변혁적 리더십

□ 요약(제8-5장 혁명 리더십 : 프랑스대혁명Ⅱ)


①목적과 수단의 상호관계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프랑스대혁명’의 리더들에게는 무리였으니, 그들은 기껏 자유를 성취하려던 노력의 실패를 한탄할 뿐이었으며,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는 그의 마직막 발언에서 “우리는 파멸할 것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 자유를 확립할 기회를 잃고 말았으니”라고 한탄하였음(p375). 당시는 일련의 해프닝에 따라 역사의 방향이 결정되고 있었고 가두의 군중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1792년 6월, 국왕과 국민의회간의 갈등이 재개된 직후, 2개 무장 분대와 무기‧깃발을 손에 든 다수의 군중이 의회 건물 앞에 운집했으며, 그들의 대변인으로 나선 한 세관원은 회의실에서 행정권의 폐지를 요구하기도 함(p375). ②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튀일라궁을 습격, 국왕 부처를 위협하고, ‘루이 16세’에게 ‘혁명모’를 쓰라고 강요하고, 이는 국왕과 혁명파간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외국의 침공에 대한 우려가 더해짐에 따라 갈수록 첨예해졌음(p375). 8월 그 자체의 ‘리더십’에 의해 동원된 가공할 만한 규모의 파리 민중은 튀일라궁을 공격, 궁전을 장악했으며, 이 일과 다음에 일어난 일이 ‘대혁명의 분수령’ 되었는데, 이제 권력을 둘러싼 대립은 주로 의회 리더들과 파리코뮌, 섹션 그리고 군중의 리더들 사이에만 존재하게 된 것임. 아마도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 리더십’은 폭력과 독재로 줄달음질칠 수밖에 없었을 것임(p375). ③국민의회 내의 ‘구자코뱅’당원들은 아직도 ‘브리소’(Jacques Pierre Brrisot)와 ‘당통’(George Jacques Danton)의 ‘리더십’ 하에 있었으며, ‘브리소’는 가난한 빵집 요리사의 아들로 가두의 민중을 신뢰하는 견실한 혁명파였음(p375). 한편, ‘당통’은 한때 ‘법무관보’였다가 뇌물로 국왕재판소의 변호사 지위를 얻은 사람이었는데, ‘당통’의 실력은 대내외의 반혁명파에 맞서 자신을 혁명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있었음(p375). 다음 수 주일 동안 국민회의의 안보위원회와 파리코뮌 ‘리더’들은 검열제 실시, 위험인물 색출, 그리고 애국자들에 대한 무기분배 등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으며, 9월에 군중은 파리를 습격, 천여 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함(p376). ④수개월 동안 ‘브리소파’는 ‘몽타뉴파’와 계속 치고받았으며, 결국 ‘자코뱅당’은 ‘몽타뉴파’에 의해 장악되고 ‘브리소’를 축출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는데, ‘브리소’는 “과거에는 조직파괴자들이 진정한 혁명가들이었다. 공화파는 조직 파괴자들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조직파괴자들은 반혁명가들이다. 그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며 반역자들이다(p376). 가중되는 민중의 압력은 국왕파의 반혁명 움직임의 중심으로 비쳐지고 있던 국왕의 처형이라는 상황으로 몰고갔으며, ‘생쥐스트’는 국왕이 범죄자여서라기보다는 그가 ‘적’이며 군사재판에 처해져야 했기 때문에 국왕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온건책 또는 연기를 꾀했던 ‘브리소파’는 ‘사쿠라’로 몰렸으며,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짐(p376). ⑤국왕파의 저항을 일소하고 난 ‘혁명 리더십’은 극좌로 선회하여, 이전 병사들은 국외에서 점령한 영토 어디서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고, 프랑스는 영국과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불과 몇 달 만에 프랑스는 미국과 스위스를 제외한 모든 주요한 외국과 전쟁상태에 있게 됨(p376). ‘광신주의’는 가속화되었으며 파리에서 외국의 음모가 있던 것을 적발하고, 혁명 리더들은 특수한 공소권을 갖는 혁명재판소를 설립했는데, 모든 반란은 24시간 내에 군의 결정에 의해 진압된다는 법규를 정했고, 또 지역 혁명위원회와 ‘대혁명 리더십’이 핵심이 되는 공안위원회를 설립함(p376). ⑥일반 국민(남성)의 투표로 구성된 최고 헌법기관인 국민공회는 이제 비애국적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고 고발당했으며, 국민공회에 대한 음모를 조사할 12개 위원회가 구성되고 나서, ‘몽타뉴파’는 ‘국민공회’에서 중도파를 몰아내고 자신들의 혁명노선을 공고히 할 수 있었음(p377). 대혁명의 초기 ‘리더’들 중 하나이며 국민공회 숙정에 앞장섰던 ‘마라’(Jean Paul Marat)는 그로부터 몇 주일 뒤 자신의 욕탕에서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의 손에 찔려 죽었음(p377). ‘샤를로트 코르데’가 자기 나름의 리더십 이론-자기의 암살로 급진파가 억제되고 중도파가 고무될 것이라는-에 근거해 그같이 행동한 것이었다면, 1793년 7월의 그녀의 행동은 자가당착이 된 셈임(p377). ⑦그것은 공포정치의 시작을 돕는 결과를 빚었던 것이며, 각 전선들로부터 계속되는 ‘비보’는 열광자들의 입지만 강화시켜주었고, ‘상퀼로드’들로부터의 계속되는 압력은 외국 침략에 대한 편집광적인 반응과 겹쳐 공포와 분노의 기운을 만연시켰음(p377). 새로 제정된 ‘취제법’하에서는 정치적으로 불온하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누구든 즉각 구속할 수 있었고, 결국 30만여명이 이 법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도 처형되었으며, 파리에서는 사형수 호송차가 끊임없이 오갔고, ‘리옹’에서는-다음 세기의 집단학살의 기분나쁜 전조(前兆)로서-수백 명의 사람들이 구덩이 가장자리에 세위진 후 대포알 세례를 받았음(p377). ⑧‘혁명 리더들’은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브리소’와 그의 동료들이 멋대로의 재판을 받은 후 단두대로 향했으며, 권력은 ‘몽타뉴파’와 국민공회 사이에서 요동하며 새로운 희생자들을 계속 쏟아내었고, 좌익의 ‘에베르파’는 고립되고, 반동으로 낙인찍히고, 단두대형이 되었고, 그 다음은 우익의 ‘당동’파였는데, 통제의 고삐가 숨가쁠 때 불타는 급진파였던 사람이 다음 순간에는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히는 지경이었음(p377). 1794년 7월에는 ‘로베스피에르’가, 그리고 ‘생쥐스트’가 단두대에 올랐으며, 일단 공포정치는 종식되었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안도했으며, 이내 운명의 ‘진자’는 혁명에서 반혁명 쪽으로 움직여갔음. ‘프랑스대혁명’이 자신의 아이들을 먹어치우는 신(神)이었다는 평가가 종종 등장했으며, 또는 대혁명은 무서운 급류라는 일단 둑이 터지고 나자 복수와 공포가 휘몰아쳤던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두 은유 모두 당시 ‘리더’들의 통제력을 잃었고 어떤 운명의 힘이나 역사적 필요성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는 가정을 내포하고 있음(p378). ⑨보다 자세히 들어다보면 이 악명높은 ‘리더’들은 그렇게까지 운명의 노예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민중 출신의 ‘준(準)리더들’이 ‘혁명 리더’들과 대중 사이에서 중재역을 담당했기 때문이며, ‘혁명 리더’들은 ‘국민의회’, ‘자코뱅당’, ‘공안위원회’, ‘코뮌’, ‘파리섹션’등과 같은 여러 기관들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음(p378). 모든 ‘리더’들은 그 같은 입지를 찾아내야함은 물론이며, 그런데 그 입지는 일정 수준의 자체적 힘과 견고함, 지속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데, 1790년대 파리에서는 상기 기관들 자체가 공격대상이 되었고, 그것을 장악한 ‘리더’들과 함께 붕괴해버렸던 것임(p378). ⑩그 같은 극단주의의 주요 원인은 파리 군중과 그 리더들에 있었으며, 대혁명 후반기에 들어서면 거의 모든 국면의 전환에 ‘상퀼로드 리더’들이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계속해서 의회나 국민공회를 비판하거나 공격했던 것은 ‘군중 리더십’이었으며, ‘혁명 리더’들은 식품가격과 식량부족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번번히 공격당했으며, 그것은 군중의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희생자들의 목을 베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했음(p378). ⑪‘오텔드빌레’(the Hotel de Ville) 앞에 운집한 군중이 ‘코뮌’ 조달계에게 “우린 약속 따위는 필요없다. 우린 빵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말이다!”라고 외쳤으며, 군중이 자신들의 손으로 법을 집행하고 학살을 자행했음(p379). ‘혁명 리더’들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 죄책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또 좌익의 인물들이 그들의 좌익에 있는 사람들에게 약한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혁명 극단주의의 핵은 ‘군중 리더십’이 된 것임. 이것은 ‘혁명 리더’들이 중산층의 개인주의 자유신조와 노동계급의 복지요구를 중화할 이념도 없기 때문(p379).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프랑스대혁명’ 중의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결국 ‘혁명리더’들의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제도 수립의 실패에서 일어 났으며, 결국 ‘군중 리더십’에 휘둘렸음을 잘 보여주고 있음. 그렇다면 ‘군중 리더십’ 위험에 대한 대책?


□ 요약(제8-6장 혁명 리더십 : 러시아-리더십의 사명)


 ①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50년 전, 아마도 이 기간중 발생한 몇 안되는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로, 일단의 남녀가 역사의 진행과정을 이해하며 사회행동의 레버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하나의 학파(學派)였으며, 런던에서 뉴욕까지, 시베리아의 멀고먼 변방까지 흩어져서 경찰에 쫓기고 밀정등의 공작에 괴롭힘을 당하고, 국외추방을 당했지만 탈출해 돌아오곤 하던 ‘마르크스 혁명가’들은 사회 갈등과 변동의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열렬한 대륙적 접근법을 사용하고 있었음(p380). ②그들은 일시적인 집회를 통해서만 하나의 학파로 뭉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신문을 통해 여러 사회 관계를 부정하고 배격하며, 세세하게 분석하고 파괴하고 재건하였으며, 예수회 수사들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 혁명론을 갈고 닦음(p380). 그들이 언론기관을 이용한 목적은, ‘트레드골드’(Donald Treadgold)에 따르면, “완전히 진지한 것이었다. 매 기사, 매 단어 하나하나가 뼈를 깎는 듯한 성실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세계관, 대전략 그리고 전술기획을 각각 하나씩 마련해 두고 있었음(p380). ③이 혁명 이론가들, 논객들, 행동가들의 집단이 가지고 있던 ‘지적‧정치적 리더십’은 최소한 17세기 영국 사상가들 혹은 18세기 미국인들의 창조적 사고에 버금가는 것이었으며, 단지 거기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는데, 영국과 미국의 헌정론자들은 민중주의체제의 ‘리더십’을 억제하거나 중화하려 하였으나, 유럽의 혁명가들-그 누구보다도 레닌-은 대중을 동원하고 그들을 역사가 천명하고 있는 바의 정치행동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는 ‘리더십’전략을 채택하고 있었음(p380). 지적 배경을 볼 때, 이 유럽 혁명가들은 서구세계에 풍미했던 사조 중 가장 강력했던 것 중 하나에서 출발하였는데, 1867년 독일에서 처음 출판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5년 뒤 그 초기 번역본 중 하나를 러시아에 선보였음(p380). ④역사의 진행과정과 경제발전과정에 대한 분석으로서의 <자본론>은 혁명에의 디딤돌이 되어줄 이론에 목말라 있던 러시아 지식인들-‘플레이노프’(Plekhanov), ‘레닌’, ‘마르토프’(Martov) 그리고 중산층 지식인들-에게는 감수로와 같았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영감(靈鑑)의 성전(聖典), 이론의 원천, 그리고 행동의 지침이 되었는데, 이 위대한 책 역시 모든 다른 성전들처럼 애매모호함을 띠고 있어 마르크스주의 교리를 정치 리더십의 전략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게끔 되었음(p381). ⑤러시아 혁명가들에게 중심이 되었던 문제는 과연 마르크스가(나중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신들에게 전면적인 계급투쟁론만이 아니라 그 근본 교리에서 바로 도출되는 정치 행동전략과 ‘정치 리더십이론’을 부여해 주었는가의 문제임(p381). 마르크스 이론에서 분명했던 것은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노동계급으로부터 ‘생산양식과 생산수단’에 추동되어 일종의 정치운동이 발생, 대규모 대중에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마르크스-엥겔스’는 “유산계급의 집단적 권력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은 유산계급이 구성한 여타 구식 정당들과 차별화되고 대립되는 정당의 형태로 그 자신을 조직화하는 외에는 계급으로서 행동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사회혁명을 달성하고, 궁극적 목표인 계급폐지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하다.”고 함(p381). ⑥그러나 어떤 종류의 정당인가? 중산층 지식인들로 구성된 소규모 엘리트 모임? 자유주의자, 좌파, 혁명세력들의 광범위한 연대? 노동자-농민-지식인의 연합정당? 그리고 만약 어떤 식으로든 지도가 필요하다면 그 정당은 어떻게 지도되어야 하는가? 기층 노동자‧농민에 의해서인가?-외부의 리더들-학생, 지식인, 직업적 혁명가들-에 의해서인가?(p381). ‘마르크스-엥겔스’는 매우 적은-아니면 적어도 상당히 유연한-정당의 역할을 제시해 놓고 있는데, 그들은 소규모 연맹과 조합들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 자신이 때로는 그 같은 단체에 소속되기도 했고 독일사회민주노동당 같은 대중 정당의 출범이나, 영국에서의 노동당의 맹아, 미국의 농민과 노동자의 정치활동, 노동조직들의 국제연합인 제1인터내셔널(1864-1872) 등을 두루 보아 왔음(p382). ⑦그들은 노동자 정당이 여타 정당들과는 달리 급진적인 프로그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정당 조직과 전략에 대해 그다지 뚜렷하고 일관성있는 견해를 갖고 있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중간 수준의 정당의 중앙집권화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으며, 그들은 대체로 노동자층을 기반으로 한 정당을 선호했으나, 정당의 동맹범위나 대상은 그때그때 정치적 환경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보았음(p382). ‘마르크스-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정치조직 보다는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에 더 관심이 있었으며, ‘로산다’(Rossana Rossanda)에 의하면, 그들에게 혁명이란 “물적 조건(계급간의 대립), 그것의 정치반영(권력기관들의 위기), 그리고 계급의식의 성립 등 세가지가 동시에 진행된 결과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p382) 역사의 철칙에 따라 노동자들은 정복되고, 억압되고, 자신들의 일로부터 소외되며, 여타 계급들로부터 고립되었고, ‘혁명의식’은 무엇보다 갈등의 와중에 등장하며, 계급이 다른 계급에 맞서 조직화할 때 이루어짐(p382).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러시아 혁명을 다루면서 ‘레닌’의 ‘리더십’을 살피기 이전에, ‘마르크스주의’의 태동과 그 이론의 주장에 대해서 통찰력있게 설명하고 있음. 이와같이 ‘혁명이론’이 러시아에서 실현되게 된 원인은? 마르크스주의 ‘리더십’의 특성은?


□ 요약(제8-7장 혁명 리더십 : 레닌)


 ①‘마르크스 이론’에서 계급의식은 자연적이고 내적으로, 객관화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인가, 아니면 의도적인 인위(人爲)로 구성되는 것인가는 분명치 않은데, 이 모호성은 또한 중대한 실질적 중요성을 갖는 정치문제로 연결되며,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의식의 고양과정에서 자체적으로 혁명조직을 수립해서 그것에 의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 외부의 ‘리더’들에 의해 계급의식이 고양되고, 각성되고, 자극을 받아 첨예화되는 쪽이 바람직한가?(p383). 이는 ‘자발성’(spontaneity)의 문제인데, 일부 ‘혁명 리더’들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과정을 외적으로 강화하려고 시도하는 일은 비마르크스적이고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함(p383). ②‘레닌’은 이를 맹렬히 반대했는데, 그는 제2의 혁명전략론을 내놓았으며, 그에 따르면, 모든 나라의 역사는 노동계급이 그 자체의 힘만 갖고 있는 경우에는 혁명역량을 확보할 수 없고 단지 노동조합의 의식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따라서 노동계급운동의 자발적 발전은 노동자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부르주아에 종속됨을 뜻하는 것임(p383). 이 격언은 ‘레닌’의 논문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핵심이 되었는데, 몇 번이나 그는 이 중심 포인트로 되돌아가곤 했으며, 노동자들은 개혁, 노동조합주의, 부르주아측과의 타협 등 즉각적 성과를 볼 수 있는 대안에 유혹당하기 쉬웠음(p383). ③자발성을 인정한다면 공산주의는 완전히 불식되고 말 것인데, 그 결과 변혁적인 사회행동 대신 일종의 기회주의와 하잘 것 없는 개혁만 남게 될 것이며, 이러한 과정은 단연 부르주아측의 입지를 강화해 줄 것이며, ‘레닌’은 “그러므로 우리의 임무, 사회민주주의의 임무는 자발성을 배제하는 것이며, 노동운동을 왜곡하고 자발적인 노동조합 운동을 억제해 부르주아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하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기치로 모여들게 하는 것이다.”(p383). <무엇을 할 것인가?>는 사실 정치 리더십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논문이었으며, 이제껏 쓰여진 ‘리더십’ 저술 중 최고의 영향력을 갖고 마키아벨리에 필적할만한 지적이었음(p383). ④핵심 명제는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다가오는 혁명 동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누가 프롤레타리아를 이끌 것인가?(p383). ‘레닌’은 새로운 사회질서가 대중들 사이에서의 ‘소박한 봉기’에 의해 수립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혐오했으며, “우리의 할아버지들은…그 분들의 지혜로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하시곤 했는데, ‘바보도 애는 만들 수 있지.’ 그리고 오늘날에는 ‘현대식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지혜로 이처럼 말하는데, ‘바보도 새 사회질서를 자발적으로 만들 수 있지.’” ‘레닌’에 의하면 그것은 전혀 대안이 될 수 없었고, ‘혁명 리더십’은 잘 훈련되고, 신뢰를 쌓고, 경험이 풍부한 혁명가들에 의해 영도되는 작고 은밀하며, 고도로 조직화된 정당의 몫이었는데, 그것은 군중 대 ‘리더십’의 문제가 아니라 ‘좋은 리더’ 대 ‘나쁜 리더’의 문제였음(p384). ⑤이 ‘혁명 리더십’의 교범은 날카로운 문제를 일으키는데, 그 문제란 혁명 의식화된 노동자들의 그 동료들간이나 ‘리더’들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들, ‘리더-추종자’관계가 조직되는 제도적 형식에 관한 문제들, ‘정당 리더’들에 대한 통제에 관한 문제들,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과 그 후 그것을 사용하는 것 사이의 문제들임(p384). 이 논문은 명료하게 이해될 수 있는 ‘혁명론’을 제시했기 때문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 이론의 핵심은 갈등에 일정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혁명적 노동계급 요소는 어떤 자연력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지도부가 그들에게 혁명운동의 핵심은 권력투쟁이라는 것, 계급간 적대는 피할 수 없으며, 부르주아 권력과 프롤레타리아 권력간에는 어떤 제3의 길도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비로소 획득되는 것임(p384). ⑥전술 차원에서 ‘레닌’은 동맹이나 연합노선을 버리고 혁명운동의 기반을 최소화하여 그것을 보다 작고, 강하고, 이념적이고, 혁명적이게끔 만들 것을 제안하였는데, 따라서 계급투쟁론에 기반한 그의 ‘프롤레타리아 리더십 이론’은 정치권력론이 된 것임(p384). ‘레닌’의 ‘리더십’ 전략이 역사와 사회갈등에 훌륭히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욕구와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거의 모든 온건한 ‘개혁 리더’들과 사회혁명론자들처럼 ‘레닌’역시 자신이 대중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개혁가’들은 독재로부터 해방이라는 소극적 목표에 치중하였으나, ‘레닌파 혁명가’들은 작업환경 개선과 같은 사회경제적 자유의 중요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이 혁명추진을 위한 수단적 목표에 대해서는 명쾌하고 솔직했던 반면 궁극적 목표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했다는 것은 이후 수십 년간 레닌주의 정당을 괴롭히는 문제로 남게 됨(p385). ⑦역사는 권력을 획득한 정치사상가들과 ‘리더’들의 업적을 늘리고, 극화하고, 경전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역사는 승리자의 보조자들과 주된 적들을 부각시키는데, 부수적인 성격의 움직임은 무시해버리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 산발적인 운동들, 제3, 4, 5당 등을 구성하는 수많은 정치적 이합집산과 집단 등을 도외시하며, 마르크스 이론을 계승하는 정통성 문제에   있어, 레닌주의 정당의 최대 라이벌은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 있어 ‘레닌’의 ‘리더십’과 전략에 맞섰던 사회민주당이었음(p385). 1895년 20여 마르크스  주의 단체들은 ‘레닌’과 ‘마르토프’, 그리고 몇몇의 지도 아래 ‘노동계급해방투쟁연합’을 결성하였으며, 3년 뒤 경찰의 수사망에서 간신히 벗어난 몇몇 단체들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을 창립했는데, 그들은 보통선거에 의한 의회 구성과 언론‧출판의 자유를 자신들의 임시목표로, 토지를 포함한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소유를 궁국적인 목표로 하는 당헌을 제정함(p385). ⑧하루 여덟 시간 노동제나 농업개혁 같은 구체적 목표나, 자본주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같은 종말론적 목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정당은 많은 러시아 혁명가들의 특성이었던 실천적인 뚜렷함과 이론적인 모호함을 나타내 보였고, ‘레닌’은 이 정당의 창당대회에 불참했지만 활동에는 계속 관여했는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 내에서 끓어올랐던 모든 갈등은 1903년 제2차 당대회가 개최되어을 때 마침내 폭발하는 듯하였음(p386). 이 대회는 벨기에 경찰들과 접전하는 가운데 런던으로 옮겨져 속개되었음, 약 50명의 대의원들 중 단 네 명만이 ‘진짜’ 노동자였으며, ‘레닌’은 바로 그 대회에 참석해 대회를 노선과 전략을 두고 양분하는 주역이 되었으며, 이제 ‘연합’대회는 반목과 갈등으로 찢어졌고, 당은 두 갈래로 갈라짐(p386). ⑨당장 불거진 문제는  ‘이스크라’(Iskra)지에 대한 편집권 문제였는데, 혁명전략의 표명과 관련한 이견(利見)이 그 배경이 되었으며, ‘멘셰비키’들은 마르크스주의 사관에 입각, 독제체제가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 전복된 다음 ‘상당 기간을 거친 뒤’ 진정한 혁명인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게 된다고 믿고 있었고, 부르주아적 개혁과 시민권 양양의 시기에 노동자들은 숫자나 실력 면에서 성장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임(p386). 그러나 ‘레닌’은 전적으로 반대했는데, 그는 사회주의 혁명은 무장봉기와 내란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이지 노동조합과 자유주의자들간의 협력으로 성취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었음(p386). ⑩노선상의 모호함과 갈등의 와중에 ‘리더십’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주의’가 튀어나왔는데, ‘레닌’에게 중차대한 문제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의 보조적 상태에서 활동할 때-보조적 역할이란 독재에 대한 공격력에서는 막강하지만 정치적 의미는 떨어지는 것이다-혁명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는가, 아니면 노동계급이 민중혁명의 핵으로 활동해야 할 것인가”였고, 그는 멘셰비키에 대하여 “함께 투쟁하기에는 믿음직스럽지만 지도역을 맡길 수는 없다”고 폄하함(p387). 일부 지역에서는 양분된 사회민주당이 ‘사회혁명파’에 의해 분열되었는데, 그들은 ‘국가 사회주의’가 ‘국가 자본주의’보다 낳을 게 없다고 비난함(p387).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레닌’의 활동과 함께 당시 러시아의 사회주의의 다양한 분파들을 상세하게 다루면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대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 또한, ‘레닌’을 통하여 ‘혁명 리더십’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특성들을 그의 성격적   측면들을 부곽시키면서 나타내고 있음. 러시아에서의 자유주의의 실패 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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