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39강 리더십강의-24(리더십의 문화)

presentlee 2024. 9. 22. 00:23

https://youtu.be/HxCkTNBnjpY?si=mtxILzMB9k_vCUac

House Leadership School 

 

리더십강의(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제3부 변혁적 리더십

□ 요약(제8-11장 혁명 리더십 : 리더십의 문화-중국)


①‘루이스’(John W. Lewis)는 중국 공산당의 대표적 특징이 중국을 지배하는 당 엘리트들의 리더십 교리라고 하였은데, 그 교리는 중국의 공산당 ‘리더십’을 단순히 폭압에 의한 대중지배 또는 세뇌를 통한 지지 유도과정으로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폄하되었으며, 중국 혁명의 ‘리더십’은 놀랄만한 실천적 효율성을 보이는 동시에 이론적 기이성을 보여왔는데, 실천적 효율성이란 그 ‘리더십’이 칠억의 인구를 제국주의가 융성하던 시기 이래 하나로 단결시켰던 데에 찾을 수 있으며, 이론적 기이성이란 ‘리더십’이 한편으로는 마르크시즘을 찬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기본적인 혁명 관련원칙들을 깨뜨려왔다는 것임(p400). ②중국 공산당은 조화를 중시하는 가운데 갈등‧투쟁에 대한 정교한 이론들을 만들어 왔으며, 근본적으로 연공(年功)주의와 기회주의를 혐오하는 인물들이 세계 인구의 1/4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되었다는데 성공의 열쇠가 있음(p400). 유럽편향적이던 마르크스와 중국 오지(奧地)의 농민군 리더들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는 레닌이었으며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원칙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서술했는데,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원자재 수요가 점점 증가함에 따라 전세계에 걸쳐서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더욱 줄기차게 경주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식민지 획득 경쟁도 한층 불붙게 된다.” 이 슬로건은 제국주의 경쟁에 뒤따랐으며, 슬로건 뒤를 열강들이 뒤따랐고 식민지 국가의 대중들은 서구의 노동자와 단결해야 했음(p401). ③하지만 이는 민족주의에 불타고 있던 혁명가들에게는 성급한 노선이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말 당시 중국은 아시아의 상처입은 거인처럼 보여왔으며, 20년동안 유럽과는 다른 성격의 개혁과 혁명의 좌절을 겪어왔는데, 러시아는 10년전, 중국도 일본의 무력 앞에 쓴 맛을 보았고, 바야흐로 2천년에 걸친 제국의 체제는 이 군사적 실패,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잠식 그리고 서구 산업기술과 자유주의 사상의 완만한 확산으로 위협받고 있었음(p401). 청조(淸朝)는 산발적인 개혁시도들로 뒤흔들린 적이 있었고, 1908년에는 헌법이 제정되기도 하였으나,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기 보다는 강화하는 기능을 함(p401) ④그 외의 개혁들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그린(Fred Greene)은 이렇게 말하는데, “중국 정부는 이 나라를 통제하고, 폭력을 최소화하며, 필요한 변화를 제도화할 정력적이고 선견지명있는 리더십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p402). 개혁의 고삐를 잡지 못하는 리더십은 민중의 기대를 잔뜩 올려놓으며 체제의 기반을 더욱 흔들어놓는 세력들을 태동시키게 되는데, 3년 동안 청조를 전복시키려는 무장봉기가 큰 것만 일곱 번이나 발생함. 체제 하에서 이렇다 할 정치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하였고 중국의 개혁가들은 국내외에서 황제의 퇴위를 모색해 나가기 시작함. 이들 개혁 리더들 중 가장 돋보이던 사람은 ‘손문’이었는데 1866년 마카오와 광동 근교에서 가난한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나, 하와이의 영국계 미션스쿨에서 교육을 받고, 영국령 홍콩에서 의사훈련, 포르투칼령 마카오에서 개업하면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시작함(p402). ⑤1911년말 한구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그 불길이 남중국 일대로 번졌을 때 손문은 외국에 나가 있었으며, 이에 귀국하여 봉기를 지도하였음. 여섯 살짜리 황제를 꼭대기에 앉혀놓고 있던 구체제는 간단하게 무너져버렸고 1912년 초 손문은 남경(南京)에서 새 공화국의 임시 대총통에 취임함(p402). 청조에 의해 차단되었던 사회‧경제‧정치개혁을 추진할 서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리더십이 중국에 성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는데, 손문은 새 입법부에서 다수당의 위치를 점한 국민당(國民黨)의 영수로서 개혁‧혁명세력의 이론적‧정신적 리더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음(p402). ⑥그러나 레닌이 1917년 이후 보여주었던 조직관리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손문은 이 거대한 나라의 격렬하고 변화무쌍하며, 제멋대로인 정치상황을 통제할 능력이 없어 보였음(p402). 중앙과 지방의 리더들이 손문을 괴롭히자 그는 곧 자신의 임시 대총독직을 라이벌에게 내주고 말았으며, 전국에서는 군벌(軍閥)이 할거하고, 남부와 북부간에 대립이 일어나고, 외세의 외교적‧경제적 침입이 밀려들며, 여러 ‘수도’에서 대립정부가 수립되고, 중앙정부의 분열, 농민의 생활고 가중 등의 상황이 계속됨. 손문은 살기 위해 여러 번 피신해야 했으며, 그의 성가(聲價)는 대단했지만, 1921년 대총통에 취임한 광동 신정부의 권역 너머로 혁명적 영향력을 파급시킬 수 없었고, 미국과 그 외 서구 국가들에게 외교적‧재정적 원조를 호소했으나 별 소득이 없자 그는 신생 볼셰비키 러시아에게로 방향을 돌렸음(p403). ⑦정치사(政治史)에 가장 놀랄 만한 리더십 동맹이 이루어 지는데 20세기초 서구국가들의 반혁명공작에 맞서야 했던 러시아는 동방에서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국민당과 연대할 필요가 있었고 이데올로기상으로도 아직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를 마치지 못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공산주의의 실현이 아직 이르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 부함하는 것임(p403). 모스크바는 이 동맹에 거리낄 이유가 없었으며 진정 특이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국제 공산주의 전략이 아니라 러시아가 중국 국민당과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수행했던 일임. 미카엘 보로딘(Michael Borodin)을 포함한 러시아의 고문당은 사분오열되어 있던 국민당에게 당의 구조, 선전수법, 군사조직, 중앙정부 구성 등에 대해 조언해 주었고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본래 동지들 즉 중국공산당의 활동에는 제지를 가함(p403). ⑧1921년에 창립된 중국 공산당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붙었던 민족주의와 국민당에 대한 불만 때문에 결성된 소규모 집단에서 출발한 것임(p403). 그 초기 리더들로 유명한 이대교와 진독수는 모두 북경대학의 교수로 최근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기 시작했던 서구의 지적 전통을 가르쳐오고 있었으며 강력한 교리에 대한 논쟁은 먼저 북경대학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터디그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진독수는 졸업생들을 통하여 다른 도시들에서의 행동을 확산시켰으며, 러시아 첩보원들의 조언과 격려에 힘입어, 12명의 중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921년 7월 상해(上海)에서 제1차 중국 공산당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름(p404). ⑨중국 공산당의 영수 진독수는 중국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역량이 아직까지 미숙하다는 모스크바 입장에 동의하였고 크렘린의 첩보원들이 국민당을 현대화하고 질서정연하게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 가운데 중국 공산당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는데 중국 공산당 자체도 독자노선을 선호하는 쪽과 국민당내 좌익을 강화하기 위해 합작하기를 원하는 쪽으로 갈라져 있었음(p404). 모스크바의 노선이 바뀔 전망은 별로 없었는데 중국의 대전략이 당시 스탈린과 트로츠키간의 대립에 얽혀들어 있었기 때문임(p404). ⑩당초 볼셰비키 리더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공산주의자들이 구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이견이 없었으며, 중국에서 국민당이 힘을 얻을수록 국민당의 좌익 그리고 결국은 중국 공산당이 민족주의자들을 제치고 권력을 잡게 되리라고 그들은 믿었는데, 스탈린은 민족주의자들이란 “마지막까지 이용해먹고, 레몬처럼 쥐어짠 다음 내던져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음(p404). 부하린은 혁명 중국의 수도 광동이 “아시아 식민지 대중의 각성에 앞장설 일종의 붉은 모스크바가 될 수도 있다”고 함. ⑪울람의 기록에 따르면, 크렘린의 전술은 궁극적으로 중국에서 10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으나 그 구상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은 장개석이 그같은 러시아혁명의 도모 의도를 간파하고 성공적인 코르닐로프(Kornilov)가 되기로 결심했던 점임(p405). 그리고 얼마동안 그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는데, ‘스탈린’의 경쟁자들은 국민당이 먼저 크렘린을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지만, ‘트로츠키’ 자신이 기존노선에 대한 회의를 제기하는데 굼떴으며, 중국 공산당은 손문의 죽음과 장개석 영향력 강화가 우경화를 초래할지 두려워함(p405).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중국 내에서 일어난 변화의 과정을 상세하게 살피며, 당시의 정세 가운데 중국의 공산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함. 중국 공산화 특징에 대한 견해?

 

□ 요약(제8-12장 혁명 리더십 : 중국-모택동)

 

 ①러시아와 중국 국민당의 불안한 균형은 1926년 무너져내렸는데, 그해 여름, 장개석이 이끄는 민족주의자들은 광동에서 북벌(北伐)을 시작, 양자강 유역 장악, 대도시 한구, 남경, 상해를 손에 넣고, 국민당 좌익은 공산당과 함께 한구를 장악하고 남경에서 양자강을 따라 수백 마일 북쪽의 무한지역을 탈취했으며, 그 과정에서 농민과 노조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냄(p405). 한구의 ‘리더’들이 민족전선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장개석’에게 도전했을 때, 1927년 3월 당시 ‘장개석’은 그의 좌파 전우들에게 화살을 돌렸으며, 모스크바로부터 국민당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훈령이 내려와 있던 터라, 상하이 공산당 숙청은 ‘장개석’에게는 일도 아니었고, 그 리더들 중 다수가 처형당함(p405). ②모스크바로부터 모호한 지침을 받은 상태에서, ‘보르딘’과 다른 러시아 고문들은 한구 체제에서 발을 빼버렸으며, 중국 공산당원들은 중국 내지로 밀려나 수차례의 무익한 반격을 시도했을 뿐임(p405). ‘장개석’은 승리에 빛나는, 다시 하나로 된 국민당의 영수로 우뚝 서게 됨. 그러나 결국 그 성공에 의해 국민당은 패하게 되고, 공산당은 패배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었는데, 바야흐로 국민당과의 연계가 끊어짐으로써 새로운 ‘리더’들이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하였고, 그 중 한 사람이 ‘모택동’이었음(p406). ③‘모택동’은 1893년 호남성(湖南省)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모택동’이 태어날 당시 부농으로의 신분상승을 위해 곡물유통업에 매진하고 있던 차에, 그의 어머니는 문맹(文盲)이었고 ‘모택동’은 불교신자로 자라남(p406). ‘모택동’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는데, 그 같은 다툼의 사실이 나중에 그의 혁명활동의 근거를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에서 찾으려는 접근법을 낳았으며, 또한 그럴 듯한 접근법은 ‘모택동’이 변동이 많았던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또는 그가 여섯 살부터 조금씩, 열세 살부터는 하루종일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것임(p406). ④열여섯 살, 그는 애써 학업을 계속했으며, 서양 고전과 중국 영웅담을 탐독하던 끝에 장사(長沙)의 보통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모택동’은 1918년 가을 북경으로 가서 북경대학에서 일을 보게 되었는데, 이로써 ‘모택동’의 지적 발전에 있어 결정적인 시기가 도래함(p406). 북경에서 그는 이대교, 진독수, 중국 공산당 리더들, 그 외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사상에 접할 수 있었고, 학생들의 불타는 민족주의 경향도 대해볼 수 있었으며, 그는 단지 이대교 밑의 사서보조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북경대 내에서의 기위는 보잘 것 없었고, 무려 여덟 명의 호남성 출신 학생들과 방을 나워 써야 했음(p406). 그가 호적에게 한마디 질문을 던졌을 때, 이 유명한 실용주의 철학자는 한낱 사서보조 따위에게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고 함(p407). ⑤‘모택동’은 학생회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 스터디그룹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 후 얼마 안되어 북경을 휩쓸고 있던 혁명열기에 사로잡혔으며, 1920년 그는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는데, 그러나 어떤 종류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가?(p407). 중국의 혁명가들은, 러시아혁명을 이끌었던 혁명가들보다 훨씬 더, ‘후진(後進) 농업‧식민국가에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수적으로나 혁명의식으로나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며, 러시아에서처럼 중국에 사회적 변혁을 일으킨다는 어마어마한 과제를 놓고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농민 그리고 특별히 그들 사이의 ‘리더십’ 관계의 역할에 대하여 줄기차게 논의가 계속되었음(p407). ⑥여기서 다시한번 ‘레닌’이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그가 이론상 기회주의적 입장을 취하여 ‘혁명단계’와 ‘계급’문제에 대한 견해는 수시로 바꾸면서 ‘혁명 리더십’과 규율잡힌 조직의 필요성은 일관되게 강조했기 때문임(p407). ‘모택동’으로 말하자면 ‘슈퍼 레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1920년대 초에 그의 혁명원칙은 공식 당론이 되었는데,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혁명경력이 공산주의 그룹 내에서 그의 영향력을 갈수록 높여가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는 분명 국민당과 합작하라는 모스크바의 지침을 따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음(p407). ⑦1924년, ‘모택동’은 건강상의 이유로 ‘호남성’으로 귀향했는데, 그 건강이란 신체의 건강 뿐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가 ‘혁명 리더’로 발돋움할 두 번째 계기가 되었는데, 그는 고향 마을에서 보낸 농민생활을 뼈아프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아직 그에게 농민은 ‘혁명 리더십’차원이 아니라 ‘혁명 지원세력’차원으로 인식되던 중이었음(p407). 그러나 그는 호남성 농민들이 외국의 중국 침탈과 자신들 스스로의 고난에 대해 떨쳐 일어서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호남성 농민운동 조사보고’에서 그는 “아주 짧은 시간에 중국의 중‧남‧북부의 수억 농민들이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떨쳐 일어날 것이다...그들은 지금 그들을 묶고 있는 그 어떤 질곡(桎梏)도 깨쳐버리고 해방의 길을 달려가리라...모든 혁명당과 혁명 동지들이 그들 앞에 서서 받아들여질지 내쳐질지를 선택당하게 되리라. 그들의 선두에 서서 그들을 이끌 것인가?...그들을 손가락질하며 헐뜯을 것인가? 그들을 적대시할 것인가? 모든 중국인들은 삼자택일 해야 한다.”(p408)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모택동’의 성장배경과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경위 및 농민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을 통해 공산주의 혁명가로 커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음. ‘리더십’의 관점에서 그의 혁명적 기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 요약(제8-13장 혁명 리더십 : 중국-모택동Ⅱ)

 

 ①‘모택동’에 의하면, 이들 농민들은 ‘혁명 리더십’을 조직하고 실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으며, 농민들이 지나치게 과격해졌던  걸까? 글쎄? “혁명이란 손님을 만찬에 초대하거나, 수필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꽃꽂이를 하거나 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p408). ‘모택동’은 유교적 예의염치를(서양형식의 존중의식도) 물리쳐버렸으며, ‘혁명’은 혁명으로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지배를 깨부수는 폭력적 행동인 것임. 혁명전위대로서의 농민, 이것은 분명 정통 마르크시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모택동’도 혁명에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히 했지만 그 자신이 직접 이 문제에 휘말려들어야 했음(p408). ②농민 봉기가 있기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은 수년 동안의 패배와 실망의 세월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는데, 1927년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장개석의 기습공격과 무장 혁명투장을 요구하는 ‘스탈린’의 지령이 있은 후, ‘모택동’은 호남성에서 추수(秋收)폭동 지휘에 나섰으며, 폭동에 실패한 그는 비판받고 호남성에서 축출되었음(p408). ‘모택동’과 그의 친우 주덕은 동쪽으로 유랑하다가 강서(江西)성의 고립된 산악지대에서 합류해 새 본거지를 만들었으며, 여기서 ‘모택동’은 주덕을 총사령관으로 삼고는 정당 리더십, 선전과 선동, 자아비판, 농민 동원 등의 수법을 익혀 나갈 수 있었는데, “이러한”것들은 나중에 보다 넓은 무대에서 긴요히 쓰일 것이었음(p409). ③하지만 이 연습은 너무 짧았는데, 승승장구하던 국민당을 이끄는 ‘장개석’이 바야흐로 일련의 ‘초공전’을 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모택동’의 홍군(紅軍)은 국민당측의 포위망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12만 명의 누더기 차림의 남녀가 그 유명한 ‘대장정’을 하여 섬서(陝西)성까지 무사히 피신하였음(p409). 이 장정이 끝날 무렵에는 12만 명이 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고 하며, ‘모택동’은 이로써 중국 공산주의의 불패(不敗)의 ‘리더’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음. ‘모택동’은 섬서성에서 그의 혁명집권을 위한 궁극적 보루를 수립했고, 또 권력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유연전술을 실시하는 탁월성을 보였음(p409). ④정통 마르크스주의 교리는 토지의 사회화와 농업의 집단적 경영을 못박고 있지만, ‘모택동’은 그 대신 세제개선과 토지개혁을 내걸었으며, 그 교리는 ‘모험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나, ‘모택동’은 사실 모험주의로 재미를 보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유명한 ‘장개석’ 납치 사건 즉 서안(西安)사건에 관여했기 때문임(p409). 그 교리는 또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전위로 정하고 있었으나, ‘모택동’은 오직 농민을 기반으로만 움직였으며, 정통교리에 의하면 부르주아, 농민, 프롤레타리아가 함께 근본적 변혁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했지만, 연안(延安)의 공산주의자들은 계급간 행동통일을 기하는 통일전선전략을 수립하였음(p409). ⑤공산당이 통일전선전략을 취하게 된 데는 1930년대 일본의 침략이 가까운 원인이 되었지만, 교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애초에 공산당이 그처럼 애국심과 민족주의에 불탈 필요가 없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모택동’ 지도 하의 중국 공산당은 자영농, 지주, 기업인들을 두루 포괄하는 온건책을 철저히 썼기 때문에, 일부 미국인들뿐 아니라 많은 중국인들도 그들이 기본적으로 ‘농민개혁가들’이라고 보았을 정도였음(p410).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숨가쁜 상황들-일본 침략의 확대, 진주만 사건 이후 영‧미의 국민당과의 전시동맹 성립, 일본에 대한 방어전 실패,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전후의 일전을 위해 힘을 비축하는 전략 채택, 국민당의 정치개혁 완전 실패, 중국의 내란을 방지하려는 미국의 시도 좌절, ‘장개석’의 공산당 토벌 총력전과 1947년경 초기의 성공, 그후 공산당 측의 반격과 농민봉기, 국민당 지배하의 도시들에 대한 압박, 그리고 결국 혁명당의 도시 장악-에 의한 일련의 사태들은 마치 1차대전에서의 사태전개가 볼셰비키의 정권 장악을 도운 것처럼 ‘모택동’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여갔음(p410). ⑥중국 공산당은 신속하게 대만을 제외한 전국에서 그들의 통제력을 확보했으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으며, ‘모택동’은 계속해서 그가 정권을 잡고 또 행사하는 데 있어 특징적이었던 정치적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 해갔으나, 만일 실용주의만이 관건이었다면 그의 라이벌들이 그의 자리를 빼앗았을 테지만 그의 ‘리더십’은 대지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었음(p410). 중국 공산주의와 그 자신의 ‘리더십’ 성공에 있어서, ‘모택동’의 결정적인 결행은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했던 부분을 과감히 제껴버리고 혁명의 주동력으로 농민을 설정했다는 것임(p410). ⑦그러한 아이디어가 그 자신의 창안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공산주의자 여부를 떠나서 중국에는 이미 수천 년 동안 “농촌으로 돌아가라”고 부르짖어온 정치가들이 수없이 많았고, 어쨌든지 마르크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도시문화의 산물이며, 중국은 기본적으로 농촌사회였던 것임(p410). ‘모택동’은 선전과 조직 면에서 그의 라이벌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혁혁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어느 정도 농민보다 윗계급이었던 그는 소년의 몸으로 들판에서 일도 해 보았고, 그의 경험과 혁명교리를 조합해냄으로써 더욱 수월하게 농촌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는 농민의 불만과 혁명역량을 분석하기 위해 농민을 철저하게 연구하였음(p411). ⑧‘모택동’은 항상 ‘구체적인 문제들’-식량, 토지, 소작제, 여성의 억압 등-과 그것들이 개인의 성향 및 정치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염두해두고 있었으며, 농민이 혁명의 보조전력이 될 수 있었던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왔지만, ‘모택동’은 그들에게서 또한 ‘혁명 리더십’의 원천을 발견하였음(p411). 비범한 정치 리더의 가장 높은 차원의 자질 중의 하나가 잠재적 추종자들의 욕구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같은 욕구의 충족, 연계방식까지 파악하는 것이라고 하면, ‘모택동’의 경험, 지각, 그리고 분석은 농민을 동원하고 지도하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음(p411) ⑨‘모택동’은 중국의 사회정치적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이 ‘리더십’과 권력 사이에서 갖는 관계의 잠재적 역량과 불가피성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는 갈등의 희생자인 동시에 갈등의 수혜자이기도 했고, 갈등의 대전략가이기도 하였음(p411). 그는 갈등분석과 갈등권리의 차원을 넘어 ‘정치리더십’의 전략을 한껏 발휘했는데, 소년 ‘모택동’은 집안에서 아버지와의 충돌을 피해 달아났다가 그의 촌티나는 행동거지와 누더기 옷 때문에 상류층 교우들의 적의와 마주했음. 그는 별 존재가 못 되었고 지성인들이 앞장서는 혁명운동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대접받지도 못했음(p411). ⑩‘모택동’은 내전 와중에서 쓰라림을 맛보았는데, 그는 많은 동지를 잃어야 했고, 첫 아내와 여동생은 1930년 국민당에 의해 처형당했음. 적들에게 처형당한 그들의 동료와 추종자들은 셀 수도 없었으며, 그 역시 수없이 많은 지주들과 그가 볼 때에 반혁명분자들을 처형했거나 그 원인을 제공하였음(p412). 그의 가장 초기 저작 중 하나에서는 “정신을 도야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가혹히 단련해야 한다. 육체가 혹독히 단련되면 정신의 도야는 자연히 이루어진다. 훈련은 혹독하고 거칠어야 한다.”고 하여 체육교육을 다루었으며, 그는 역사적인 대전(大戰)과 영웅담들을 거론하며 “이 모든 것들은 잔혹하고 거친 것들이며, 우아함은 일체 배제된 것들이다”라고 주장함(p412). ⑫‘모택동’의 완성된 갈등론은 극히 노골적이고 명료한 것이어서, ‘레닌’의 그것보다 더 심대한 심리적‧철학적 기반을 가졌으며, ‘모택동’의 갈등론은 모든 것에 이원성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하는데, 이 이원성은 동(動)과 정(靜), 신(新)과 구(舊), 협력과 갈등, 생(生)과 사(死), 현재와 미래, 순수와 비순수, 음(陰)과 양(陽)처럼 기본적으로 대립되는 것들임(p412). 이처럼 이원성은 개인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며 물질적인 면에서 생산력과 계급관계가 연관되는 한 사회의 계급구조로 나타남(p412).
● 비평
  필자는 ‘모택동’을 통한 중국 공산당의 중국을 점령하는 과정을 통찰력있게 그려내고 있으며, 특히 그의 사상과 관련하여 이원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파고드는 예리함을 보여주고 있음
● 토의
  ‘모택동’이 취한 유연성과 이원성을 ‘리더십’의 입장에서 분석해 본다면? 

리더십강의(제임스맥그리거번스)_24하우스(이현재)_리더십의문화(중국).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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