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25-48강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14(링컨의 변호사시절)

presentlee 2025. 12. 7. 09:03

  https://youtu.be/SVE2s2GpJH8?si=GGsAmaCiXC0q05hi

HouseLeadership School

 

Leadership : in Tubulent Times(도리스 컨스 굿윈)

□ 요약(제2-1부 역경과 성장 : 5. 에이브러햄 링컨_변호사 시절)


①‘링컨’의 2년 하원의원 시절을 위기 가운데 보내고, 그 후 5년 동안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변호사로서 시기를 보람있게 보내며 자기 개발에 힘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의 답은 자신을 가감 없이 들여다보며 냉정하게 자신을 분석하는 자발성에 있었는데, 처음부터 ‘링컨’은 공동체의 기억을 남기는 역사책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람(p195). 그의 생각에 그 운명을 이루어내려면 다양한 부문에서 지속적인 노력과 절제력이 필요했으며, 약점과 결함을 직시하고, 실패를 반성하며, 자신이 지향하는 ‘리더’의 모습을 점검하는 적극성도 필요함(p195). ②이러한 내적 성찰의 시기에 ‘링컨’이 보여준 근면성과 학구열은 젊은 학생이었더라도 주목할 만한 것이었는데, 하물며 마흔에 이른 남자가 그랬으니 더욱더 놀라울 따름이며, ‘링컨’의 열렬한 자기개발은 자신이 선택한 변호사라는 직업을 재점검하고 다시 헌신적으로 전념하면서 시작했지만(p195). 일리노이에 돌아온 뒤 ‘링컨’은 변호사로 다시 일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능력이 뛰어난 변호사가 아니다.”라고 자신을 정확히 평가했으며, 당시 ‘링컨’은 12년 전부터 변호사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고 있었지만 정치에 열중하느라 오랜 공백이 있었고, 그 사이에 변호사 업무가 더욱 복잡해지고 정교해져 변호사로서의 기량이 떨어졌다는 기분도 떨칠 수 없었음(p195). ③변호사에게는 예전보다 더 뛰어난 추론 능력, 성문화된 법조항 뒤에 잠재된 “법 원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필요했는데, ‘윌리엄 허던’은 변호사 업무에 복귀한 ‘링컨’의 모습에서 단호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음(p196). ‘링컨’은 법학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아 법 원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며 법학공부에 전념했는데, ‘헌던’의 표현에 따르면 “그처럼 전심전력으로 학습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문제에 집중하고 전념하면 어떤 것도 그를 간섭하거나 방해할 수 없었다.”(p196) ④‘링컨’의 시대에 판사와 변호사, 증인과 집행관은 매년 봄가을에 8주 동안 함께 유랑 극단처럼 카운티를 옮겨 다니며 드문드문 흩어진 많은 마을과 소도시에서 재판을 열고 사건을 심리했으며, 이 순회 법정의 이동 거리는 약 240킬로미터에 달했음(p196). 법정에서 살인, 폭행, 절도부터 유언 분쟁, 빚의 징수, 특허 다툼까지 수백 건의 사건이 심리됐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법정 드라마를 보려고 멀리에서 모여들었는데, 순회 법정이 도착하면 카운티 소재지는 축제와 장날을 앞둔 것처럼 흥분과 기대로 북적댔고, 유랑 극단까지 많은 손님을 기대하며 소재지를 찾아와 여관에서 밤을 보냈음(p196). ⑤‘링컨’은 이런 흥겨운 분위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링컨’은 순회 재판에 참여하며, 이른바 집중 학습에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고, 순회 재판을 통해 일반적인 변호사 업무의 한계를 넘어서는 학문을 공부할 기회를 얻은 것임(p194). 그는 철학과 천문학, 자연과학과 정치경제, 역사와 문학, 사학과 연극을 공부했는데, 수학적 정리와 증명을 학습하는 데도 힘썼는데, 물론 처음에는 누군가 수학적 개념을 말하면 어떤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럼 그 뜻을 파악할 때까지 그 말을 머릿속에서 굴리고 또 굴렸고, 그는 “피곤해 죽을 지경까지” 수학을 파고들었고, 마침내 “유클리드 기하학을 완전히 익혔다.”라고 자랑스레 주장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섰음(p197). ⑥‘헌던’의 기억에 따르면, 모두가 잠든 뒤에도 ‘링컨’은 침대 머리맡에 촛불을 켜고 몇 시간 동안 책을 읽고 공부하느라 새벽 2시를 넘기기 일쑤였는데, 방을 함께 사용한 사람들이 코고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링컨은 정신적 평정을 유지하고, 추상적인 수학적 명제에 생각을 집중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p197). ‘헌던’은 ‘링컨’의 이런 능력을 수수께끼라 생각하며 경이로워했는데, “그 누구도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링컨’은 동료들보다 밤늦게까지 공부했고,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한 순회 공무원은 “‘링컨’이 난로 옆에 앉아 사색하고 묵상하며 혼잣말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고 회상했음(p197). ⑦낯선 사람이 방에 들어와 ‘링컨’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보았다면, “그가 갑자기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인데, 그러나 순회 재판을 함께 다니던 공무원들은 ‘링컨’을 알았기에 “‘링컨’의 혼잣말을 듣고 웃음을 지었다.”(p197). 그런 모습이 외부인에게는 크게 낙담한 모습으로 여겨졌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링컨’이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고 애쓸 때 습관적으로 행하는 독특한 모습-일종의 정신적 노력-이었으며, 그래도 아침 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링컨’은 서둘러 옷을 입고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며, 그날 진행될 사건들을 검토했는데, ‘링컨’은 배심원 앞에서 의뢰인들을 변호하는 데 승승장구한 덕분에 “중부 일리노이에서 가장 재판을 많이 하는 변호사가 됐다.”(p198). ⑧‘링컨’이 성공한 주된 요인은 지극히 복잡한 사건이나 쟁점을 “단순한 단위”로 분해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이었는데, ‘링컨’은 허둥대거나 준비한 원고를 읽지 않고 “잘 훈련된 암기력”에 의존하여 배심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링컨’은 친구들과 대화하듯이 배심원들과 친근하게 대화하는 방식을 좋아했음(p198). 동료 변호사이던 ‘헨리 클레이 휘트니’의 표현을 빌리면 “‘링컨’의 논증은 논리적이고 깊이가 있었음에도 이해하기 쉬운 편”이었고, “주로 평이한 단어로 이루어졌고, 화려하게 꾸미는 경우가 전혀 었었다.” 일리노이 주법원 판사는 ‘링컨’의 변론법을 “그는 자신이 아니라 배심원이 사건을 심리하는 것이라 믿게 만드는 흔치 않은 특이한 재주가 있었다.”고 핵심적으로 정리했음(p198). ⑨폐정되면, 낮에 그렇게 다투던 변호사들이 밤에 여관에서 친구처럼 어울리며, ‘데이비드 데이비스’(David Davis) 판사의 주도하에 같은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했고, 식사가 끝나면 모두가 활활 타오르는 불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었음(p198). ‘링컨’은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지만, 주변에 열 명, 오십 명, 수백 명이 있더라도 끝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로 흠모와 관심을 독차지했는데, ‘헌던’의 평가에 따르면, “흉내 내는 능력과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가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많은 점에서 특별했다. 그는 이야기의 재미를 더하려고 독특한 얼굴 표정과 이목구비도 동원했다. 이야기나 우스갯말의 요점에 도달하면 그의 얼굴에서 진지함이 완전히 사라졌고, 작은 잿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p198) ⑩‘링컨’의 이야기와 재담에 관련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는데, 공통분모는 웃음이 끝난 뒤에도 생각과 반성을 자극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러니 이야기꾼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즐거움을 찾으려던 시골 사람들이 ‘링컨’에게 끌렸던 것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음(p199). 명성이 높아졌지만 ‘링컨’은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개발을 위한 학습을 멈추지 않았는데, 또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를 똑같이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했으며, 진정으로 상대와 공감하며 조금의 꾸밈도 없이 모두를 다정하게 대했음(p199). ⑪그가 23세 상거먼 강둑에 올라 정계 진출을 선언했을 때 뉴 세일럼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도 이런 겸손함 덕분이었는데, 한 동료 변호사는 “재판을 위한 순회 과정에서 ‘링컨’만큼 잘난 체하지 않은 변호사는 없었다. ‘링컨’은 남보다 우월하다고 과시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변호인단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람 앞에서도 우쭐대지 않았다.”고 회고함(p199). 여관 식탁의 자리 배치에는 법정 서열이 반영되었는데, ‘데이비스’ 판사가 상석에 앉았고, 그 주변에 변호사들이 앉았으며, 언젠가 ‘링컨’이 일반 의뢰인들에 둘러싸여 말석에 앉자, 여관 주인이 “잘못 앉으셨습니다. 상석으로 가시지요.”라고 말했는데, 그러나, ‘링컨’은 “내가 저기서 먹는 게 더 편하십니까? 그런게 아니라면 그냥 여기에 앉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음(p199).
● 비평
 필자는 ‘링컨’의 변호사 시절을 잘 요약하며, ‘링컨’이 40의 나이에도 자신의 변호사로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철저했음을 보여줌. 또한,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말로 청중을 이끌고 겸손했음을 잘 나타내었음.
● 토의
 ‘링컨’의 변호사로서의 근면함이 ‘리더’로서 그를 세웠는지? 그 이유는?


□ 요약(제2-1부 역경과 성장 : 6. 에이브러햄 링컨_리더십 인식의 변화)


①변호사 업계의 ‘리더’가 된 뒤에는 다음 세대를 위한 멘토의 책임을 떠맡았는데, 동료들은 “‘링컨’은 젊은 변호사들에게 무척 관대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으며, 특히 ‘헨리 휘트니’는 처음 변호인단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링컨’의 다정하고 온화한 대우에 크게 감동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는데, 법원에 첫 출근한 서기에게 가장 먼저 악수를 청하며 취직을 축하해주는 사람은 ‘링컨’이었고, 때로는 ‘링컨’이 유일했음(p200). ‘링컨’은 신임 변호사들에게 “변호사가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기술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했는데, 변호사가 미사여구를 동원한 말솜씨나 설득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며, 고상하고 세련된 말에는 깊은 사색이 더해져야 한다는 충고도 놓치지 않았음(p200). ②‘링컨’의 생각에 올바른 결론은 중노동, 즉 “법에 대한 힘들고 단조로운 사색”의 산물이었는데, 그는 단조롭고 힘든 노동의 과정이 없으면 제아무리 웅변적인 변론도 끌림과 설득력이 없고, “즉석연설도 훈련하고 연습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또 “어떤 직업도 그렇겠지만 변호사의 제1덕목은 근면이다. 오늘 끝낼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도 조언했는데, 성공의 열쇠는 “일, 일, 일”에 있다는 게 ‘링컨’의 지론이었음(p200). 한 동료 변호사의 회고에 따르면, “‘링컨’의 머릿속은 그의 작업장이었다. 그에게는 사무실도 펜도 필요 없었다. 잉크와 종이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내적 성찰로 주된 노동을 해낼 수 있었다.”(p200). ③‘링컨’은 법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고 변호사 업무에 열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본성대로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고 건강을 돌보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의회라는 싸움터에 복귀할 의사가 있다는 뜻을 표명했지만, 원칙 없이 지식을 추구하지 않았고, ‘리더’의 역할과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하는 방향으로 지식을 쌓았음(p201). 이 성찰의 기간에 ‘링컨’이 행한 두 번의 추도 연설에서도 ‘리더십’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데, 한 번은 ‘재커리 테일러’, 다른 한 번은 ‘헨리 클레이’(Henry Clay)를 위한 추도 연설이었음(p201). ④‘링컨’은 첫 추도 연설에서, ‘제커리 테일러’의 ‘군사적 리더십’이 뛰어난 군사 작전과 구분되지 않아 부각되지 않았지만 “‘테일러’는 패배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강인함에 더해 냉정하고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으로 성공했다. ‘테일러’의 남다른 군사적 자질은 흥분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부정성의 결합체였다. ‘테일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고 무서워하지도 않았다.”고 진단했음(p201). ‘헨리 클레이’를 위한 1852년의 추도 연설은 훨씬 개인적인 색채를 띠었는데, 켄터키 출신이던 ‘헨리 클레이’는 ‘링컨’의 중요한 정신적 멘토였음(p201). ⑤‘헨리 클레이’는 독학으로 자수성가한 변호사로 30대 초반에 하원의장을 역임했고, 오랫동안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세 번이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는데, ‘클레이’는 ‘링컨’에게 젊은 시절부터 본받아야 할 본보기와 다를 바 없었고, 심지어 ‘링컨’은 ‘헨리 클레이’가 렉싱턴에 있던 ‘메리 토드’의 집에서 자주 식사하며 ‘토드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고 생각할 정도였음(p201). 장문의 추도 연설에서 ‘링컨’은 세 가지 유형의 ‘리더십’ 특성을 언급하며, ‘클레이’가 그런 ‘리더십’을 발휘해 미국인들을 “오랜 마법”에 빠뜨렸다고 말했는데, ‘링컨’이 ‘클레이’의 ‘리더십’에서 찾아낸 세 자질은 웅변능력과 분별력, 의지력 이었음(p201). ⑥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클레이’의 웅변 능력은 단어와 문장의 정교한 배열보다, 성실함과 철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그러나 분별력 없는 웅변은 아무런 쓸모가 없고, 분별력과 웅변 능력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없는 ‘리더십’은 실패하기 마련이었음(p202). ‘링컨’의 생각에, 이런 ‘리더십’ 자질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 닥친 시련의 순간들도 ‘클레이’를 “위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링컨’은 “미국을 뒤흔들었던 많은 중대한 문제, 특히 노예제도와 관련된 문제에서 ‘클레이’는 10년을 넘어 20년 동안 쌍방이 적대감을 억누르고 타협점을 찾도록 유도했다. ‘클레이’는 북부와 남부의 극단적인 의견에 몇 번이고 반대했다.”며 “그는 무엇을 하더라도 국가 전체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고 결론지었음(p202). ⑦미국 건국 초기부터 남부와 북부가 분열된 근원이었던 노예제 문제는 영토가 확장될 때마다 다시 타올랐는데, 루이지애나 구입(Louisiana Purchase)으로 획득한 광활한 영토의 미주리가 ‘노예주’로 허락 받으려고 “의회의 문을 두드렸을 때”, 북부와 남부 사이의 험악한 갈등은 여지없이 뒤따랐음(p202). ‘클레이’의 ‘리더십’으로 1820년 미주리 협정(Missouri Compromise)으로 타협점을 찾으며, 극단으로 치닫던 갈등이 멈추었는데, 이 협정에 따라 미주리는 주의 자격을 얻었고, 메인주는 자유주로 인정받았으며, 또 자유주와 노예주를 구분하는 상상의 선이 그어져 훗날 확장되는 영토가 그 선의 북쪽에 위치하면 자유주로, 남쪽에 위치하면 노예주로 편입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그 이후 멕시코-미국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30년 동안 평온한 상태가 이어졌음(p202)
● 비평
 필자는 ‘링컨’이 지인의 추도식에서의 했던 연설들을 통하여 그의 ‘리더십’에 대한 관점이 성숙하여진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헨리 클레이’에 대한 연설에서 ‘링컨’은 ‘클레이’가 남부와 북부의 극단적 대립을 막는 역할을 강조하였음.
● 토론
 ‘링컨’의 노예제에 대한 연설 등을 통해 ‘리더십’의 발견되어지는 변화는?


□ 요약(제2-1부 역경과 성장 : 7. 에이브러햄 링컨_노예제도에 대한 접근)


①1820년 미주리 협정으로 북부와 남부의 타협점이 이루어진 이후 30년 동안 평온한 상태가 이어졌으나, 조지아주 하원의원 ‘로버트 톰스’(Robert Tombs)는 많은 남부인을 대신해 “전 국민의 피와 땀으로 함께 획득한 영토,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에서 우리를 몰아내려 한다면 나는 합중국을 분리하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라고 공언했음(p203). ‘링컨’이 추도 연설에서 말했듯, 미국은 다시 ‘헨리 클레이’에게 도움을 청했고, 당시 73세이던 노령의 상원의원은 이번에도 아메리카 합중국을 그대로 유지하는 타협안을 끌어냈는데, 1850년 협정(Compromise of 1850)에 따라,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인정받았으며 유타와 뉴멕시코는 노예제도의 적용에 어떤 제약도 받지 않았음(p203). ②또 컬럼비아 특별구에서는 노예 거래가 종식됐는데, 의회는 기존의 도망 노예법을 강화하는 책임을 떠안았고, 연방 관리는 시민을 징발해 자유주에서 도망 노예를 추적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클레이’는 이처럼 두 번의 중대한 타협을 이끌어 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었고, 많은 미국인이 그랬듯 ‘링컨’도 ‘클레이’를 “위대한 중재자”(Great Pacificator)로 평가했음(p203). 1850년 협정으로 위기가 끝나는 듯했지만, 도망 노예법에 한층 가혹한 조항이 더해지자 북부에서 노예폐지론자들의 분노가 격화됐는데, 더구나 노예 소유자들이 보스톤과 뉴욕에 정착한 도망 노예들을 체포해 돌려받으려고 시도하자 폭력적인 소동이 벌어짐(p203). ③‘링컨’도 도망 노예법을 강화한 조항에 경악했지만, 그는 나름대로 해결책을 생각해내어 참담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었는데, ‘링컨’은 해결책으로 “아메리카 합중국에 헌신하면, 어떤 것도 유도할 수 없는 수준까지 우리가 양보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음(p203). ‘윌리엄 헌던’은 당시 노예폐지론자를 자처하며, “시대적 요구가 급박하던 때 보수적 입장을 견지한 ‘링컨’”에게 크게 실망했으며, 노예제도는 순회 재판에서도 주된 화제가 되었고, 변호사들은 여러 신문의 보도 방향을 두고 논쟁을 벌였음(p204). ④일반적으로 북부의 신문들은 노예제도를 반대한 반면, 남부의 신문들은 노예제도를 찬성했는데, 양극단이 원래의 의견을 고수하며 서로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낸 까닭에 중도 의견은 입도 벙끗할 수 없었으며, 한 동료 변호사는 ‘링컨’에게 “우리가 모두 노예폐지론자가 되거나 민주당원이 돼야 하는 때가 오고 있다.”고 한탄했으며, 1850년 협정은 4년으로 수명을 다했음(p204). ‘링컨’은 순회 재판 중에, 연방 의회가 오랜 토론 끝에 캔자스-네브래스카법(Kansas-Nebraska Act)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당시 2선 상원의원이었고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민주당 지도자, 일리노이 출신의 ‘스티븐 더글러스’(Stephen Douglas)가 고안한 캔자스-네브라스카법안은 새롭게 추가된 영토, 캔자스나 네브라스카에 정착하는 사람들에게 아메리카 합중국에 편입될 때 노예주나 자유주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이었음(p204). ⑤그 법안 내용을 핵심에서 벗어나 단순하게 해석하면, 노예제도가 ‘국민주권주의’(popular sovereignty)로 남부의 울타리를 벗어나 확산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30년 동안 평온한 상태를 보장해주던 미주리 협정은 단숨에 지워졌으며, ‘링컨’이 소망하고 믿었듯, 노예제도가 완전히 소멸될 가능성은 사라졌음(p205). ‘링컨’은 새로운 법의 의미와 영향 및 중대성을 즉시 알아챘는데, 이제 노예들의 상황이 “고착되어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될 여지가 없게 되었다.” ‘링컨’은 그 법안에 대한 의견을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전에 주립 도서관에 파묻혀, 연방 헌법이 제정되던 당시 노예제도에 대한 토론과 쟁점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분석했음(p205). ⑥‘헌던’의 표현을 빌리면, ‘링컨’은 그렇게 연구하며 노예제도의 “안팎과 위아래”를 알아냈는데, 어린 시절 ‘링컨’은 “어떤 개념을 사냥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완전히 잡을 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때 ‘링컨’은 사냥을 시작한 것이었고, 뒤쫓던 것-노예제도라는 쟁점이 미국의 역사에 끼어들고 당시의 교착 상태까지 악화된 과정-을 잡을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음(p205). ‘링컨’이 그 시기에 단편적으로 끼적인 기록을 보면,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을 기본적인 단위로 압축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는데, “A가 당연한 권리로 B를 노예화할 수 있다는 걸 확정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B가 동일한 방식으로 논증해 A를 노예화할 수 있다고 증명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럼 A는 백인이고 B는 흑인이라고 말한 텐가, 피부색이 기준이라면 엷은 색은 짙은 색을 노예로 삼을 권리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조심하라. 이 법칙에 따라 당신은 길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그의 피부색이 당신보다 엷다면 말이다! 정말 피부색이 기준이라고 생각하는가? 백인이 흑인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까닭에 흑인을 노예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인가?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조심해야 한다. 이 법칙에 따르더라도 당신은 길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그가 당신보다 지적으로 우월할 수 있을 테니까!”(p206). ⑦이 짤막한 기록은 단순한 논리의 전개가 아니었는데, A와 B는 적대적인 두 관점을 의인화한 것이었으며, 각각의 논리 전개는 주장과 설득으로 구성된 작은 드라마였고, 그때까지 ‘링컨’의 마음속에만 복잡하게 전개되던 논증과 논쟁의 핵심이었음(p206).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링컨’의 산발적인 생각들은 오랜 경쟁자이던 ‘스티븐 더글라스’의 논쟁과 논증에서 극적으로 펼쳐졌는데, ‘링컨’과 ‘더글러스’는 약 20년 전 ‘조슈아 스피드’의 잡화점에서 밤마다 논쟁할 때 만났던 사이였으며, 훗날 ‘링컨’은 이렇게 말했는데, “그때 우리는 둘 다 젊었다. 둘 모두 야망이 컸다. 내 야망도 그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까지 야망의 경쟁에서 나는 실패자, 완전한 실패자였고, 그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졌으니 말이다.”(p206). ⑧1854년 가을, ‘더글라스’는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을 변호하려고 일리노이에 돌아왔는데, 그 법으로 북부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빈발한 때문이었고, 일리노이에서도 적대적인 반발에 직면한 터라, ‘더글러스’는 일련의 공개 토론을 벌여 ‘자치권’(self-government)이라는 불가침 원칙을 적극 주장할 작정이었음(p206). 스프링필드의 주 공진회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작은 언쟁을 벌였고, 곧이어 피오리아의 공개 토론장에서 본격적인 논쟁을 벌였는데, ‘더글러스’는 “네 마리의 멋진 백마가 끄는 마차에 앉아 개선 행렬의 선두에서 악단을 앞세우고” 일리노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피오리아에 들어왔지만, ‘링컨’은 자정이 지난 뒤에 소리 소문 없이 들어왔음(p204). ⑨이튿날 오후 조금 넘자, 엄청난 군중이 광장에 모여들었는데, 의자에 앉은 사람도 있었고, 잔디밭에 편히 앉은 사람도 많았으며, 두 사람의 토론을 들으려고 멀리에서 달려온 농부도 수백명에 달했음(p207). 법원 발코니에서, 작지만 다부진 체구의 ‘작은 거인’(Little Giant) ‘더들러스’는 재킷까지 벗고 기백이 넘치는 권투 선수처럼, 세 시간 동안 몰아친 연설로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링컨’의 차례가 됐을 때는 이미 저녁 5시가 지난뒤였는데, “여러분이 제 말도 끝까지 들어주면 고맙겠습니다. 저도 ‘더글러스’만큼 오랜 시간 연설할 겁니다. 그럼 저녁 8시가 넘겠지요.”(p207) ⑩저녁 식사 시간을 훌쩍 넘길 수 있다는 뜻이었는데, 그래서 ‘링컨’은 모두에게 휴식을 취하며 즐겁게 식사를 한 뒤, 시원한 저녁 7시에 다시 모이자고 제안했고, 또 자신의 연설이 끝난 뒤 ‘더글러스’에게 반박할 기회를 주겠다고도 공언했음(p207). ‘링컨’은 “그렇게 해야 ‘더글러스’ 지지자들이 돌아가지 않고, ‘더글러스’가 내 가죽을 벗기를 소리를 들으려고 끝까지 토론장에 남아 있을 테니 아무런 사심도 없는 이타적인 제안은 아니다.”라고도 인정했는데, ‘링컨’은 군중을 돌아보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고, 한 참석자의 기억에 따르면 “곧바로 환호성이 울리고 모자들이 공중에 던져졌다. 물론 다른 식으로 동의한다는 표현도 있었다.”(p207)
● 비평 및 토론
  필자는 1850년의 미주리 협약이 파기되고,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이 등장하면서 ‘자치권’이란 이름으로 노예제도가 고착화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한 ‘스티브 더글러스’와 ‘링컨’ 간의 첨예한 논쟁의 시작을 사실적으로 묘사함. 군중을 이끄는 ‘링컨’의 ‘리더십’을 통해 배울 점은?

 

혼돈의시대리더십(도리스컨스굿윈)_25하우스(이현재)_링컨_변호사시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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