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25-49강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15(링컨 대통령으로의 첫걸음)

presentlee 2025. 12. 14. 08:57

  https://youtu.be/Kv0fg1jn8D0?si=m3MuPe_TZHXNMizH

 

HouseLeadership School
 
Leadership : in Tubulent Times(도리스 컨스 굿윈)
 
□ 요약(제2-1부 역경과 성장 : 8. 에이브러햄 링컨_노예제도를 둘러싼 갈등)
 
①캔자스-네브라스카법을 기초한 ‘스티븐 더글라스’의 일리노이에서의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연설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위해 토론회를 연기하자고 가볍게 제안하면서 ‘링컨’은 밤늦은 시간의 데이트를 합의한 친구들처럼 청중들과 친근한 관계를 맺었는데, 청중들은 편한 마음으로 되돌아왔고, 오히려 그 수가 늘었음(p207). 횃불로 환히 밝혀진 저녁 토론회는 자정 직전까지 이어지며, 1850년대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를 입증해주었는데, 미국 시골에는 주민들이 함께 즐길 오락거리가 별로 없었기에 마을 사람들과 농민들은 연설회와 정치 토론회를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로 여겼음(p208).  ②웅변 능력이 정치적 성공에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었던 시대이기도 했지만, 군중들도 치밀하게 구성된 연설을 경청하며 완전히 몰입했는데, 피오리아에서도 청중들은 저녁 식사를 위한 짧은 휴식 시간을 제외하면 연설을 듣고 생각하는 데 거의 일곱 시간을 집중해야 했음(p208). 그런 토론이 있은 뒤에는 상반되는 발언들이 거의 모든 신문에 어김없이 보도됐고, 그 후에는 소책자 형태로 멀리 떨어진 마을과 농장까지 전해지며 토론의 열기는 공간적으로 확대되고 시간적으로도 연장됐는데, 이런 환경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고, 웅변 능력만이 아니라 글쓰기 능력까지 갖춘 ‘에이브러햄 링컨’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했으며, ‘링컨’은 쉽게 이해되고 재미있으며 어디에서나 되풀이되는 일상적인 사례를 곁들인 흥미로운 이야기로 군중을 가르치며 감동을 주었음(p208). ③‘링컨’은 타고난 이야기꾼답게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사건, 즉 캔자스-네브라스카법이 야기한 노예제도의 확장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했는데, 이어 군중의 공통된 출발점, 즉 미국의 건국까지 거슬러 올라가 연방 헌법이 채택된 때 “노예제도에 대한 그 시대의 명백한 정신은 원칙적으로 반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노예제도가 초창기에 미국의 사회경제적인 삶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용인한 것”이란 주장을 증명해 나갔음(p208). ‘노예제도’라는 단어가 연방 헌법에 의도적으로 배제됬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고통받는 환자가 과다한 출혈로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종기나 종양을 지체 없이 잘라내지 못하고 감추면서 허락된 시간이 끝나기 전에 절개하겠다고 약속하듯이” 제헌의원들도 그 단어를 감춘 것이라 주장했음(p209). ④‘링컨’의 주장에 따르면, 미주리 협정이 굳건히 지켜졌던 지난 수십 년 동안 노예제도는 줄어드는 추세였는데,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서 천명한 이상으로 되돌아가며, 종기를 절개할 시간이 마침내 목전에 닥친 것이었음(p209). 그러나 협정에 의한 상상의 선이 비상식적인 캔자스-네브래스카법으로 말미암아 폐지되면서 노예제도가 “신성한 권리”로 변했고, 느닷없이 “확대되고 영속화되는 가장 확실한 길에 올라섰다. 한마디로 그 법은 ‘가라, 하나님이 그대를 지켜주리라!’고 노예제도를 독려하는 셈”이었음(p209). ⑤아메리카 합중국을 북부와 남부로 가르며, 북위 36도 30분 위로는 노예제도가 확장되는 걸 막았던 상상의 선을 제거해 난해한 문제가 야기됐다는 걸 증명하려고, ‘링컨’은 노예제도에 닥친 새로운 상황을 영농과 목초지, 울타리와 가축의 세계에 비유해 설명했는데, 인접한 두 농장의 경계를 구분짓는 울타리가 있다고 상상해보라(p209). 한 농부가 자신의 목초지가 바싹 마르자, 굶주린 가축에게 이웃한 목초지의 풀을 뜯게 하려고 갑자기 울타리를 제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웃은 “도둑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라고 항의할 것인데, 농부는 “내가 없앴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내 가축들을 당신의 목초지로 보내 풀을 뜯게 할 의도는 없었다. 그냥 내 가축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나름대로 먹이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라고 대답했음(p209). ⑥이 우화와, 상상의 선을 없앴지만 노예제도를 북부 지역까지 확대할 의도는 없다는 ‘더글러스’의 기만적인 주장 사이의 유사점을 이해하지 못할 청중은 없었으며, ‘링컨’은 군중에게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의 위험성을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주려고 이러한 비유를 사용한 것임(p210). 그가 배심원들에게 “사건을 심리하는 주역은 그들이지 자신이 아니라고 믿게 하려고 노력하던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링컨’의 설명에 청중은 신법이 어떤 문제를 야기했는지 깨닫게 됐고, ‘링컨’은 파격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으며,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은 폐지돼야 했고, 미주리 협정을 되살려야 했음(p210). ⑦독립 선언문에도 명시했듯이, ‘링컨’은 “자치권이라는 원칙은 옳은 것, 앞으로도 영원히 옳은 것이라 선언하면서, ‘더글러스’의 제안대로 자치권이 노예제도에 확대해 적용되면 그 뜻이 왜곡된다고 덧붙였는데, 연방 헌법이 제정될 때 노예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영토에 노예제도를 허락하면 아메리카 합중국의 역사를 끌어온 “양보와 타협의 정신”과 전면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라며, “노예제도를 우리 선조들이 규정한 위치로 되돌려 놓으십시다.”라고 호소했음(p210). ‘링컨’의 타협안도 노예폐지론자들의 신조는 아니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의 신조는 봉쇄었고, ‘링컨’은 캔자스-네브래스카법에 반론을 제기하며 “자신은 남부인에게 어떤 편견도 없음”을 분명히 밝혔고, “우리가 남부인과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도 노예제도에 대해 남부인처럼 생각할 것이다. 예컨대 지금 노예제도가 남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남부인도 노예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노예제도가 우리 지역에 존재한다면 우리도 노예제도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p211). ⑧뛰어난 공감 능력으로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지역에서 노예제도를 없애기 어렵다는 걸 이해했지만, 또 그 딜레마를 쉽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고백하는 겸양을 발휘했지만, 미주리 협정에 의한 경계선의 폐지는 폭력적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고, 폭력적 행위가 번복되지 않으면 미합중국의 분리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음(p211). “우리가 직면한 선택은 우리 모두가 함께해야 할 선택이다.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 존속된다면, 그리하여 노예제도가 확산된다면, 미국의 희망이 소멸되고, 미국의 존재가 전 세계에 뜻하는 모든 것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을 합한다면 우리는 미합중국을 구하고, 더 나아가 구할 가치가 있는 것을 구하고 영원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p211). ⑨<스프링필드 저널>은 “광장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링컨’이 연설을 끝내자, 청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끊이지 않는 환호로 진실의 영광스런 승리를 인정해주었다.”라고 보도했으며, 당시 기록에 따르면, ‘링컨’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심오한 논증을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 있게 전개했는데, 통찰력 있게 노예제도라는 쟁점을 파고들며, 청중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려 애썼음(p211). ‘링컨’은 진실하고 명료하며, 확신에 찬 열정적인 이야기로 청중을 설득하고,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았으며, 한 기자가 보도했듯이 “링컨을 사로잡은 영감이 청중까지 사로잡고”, “그의 연설은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청중의 마음에 전달됐다. 내 경험에 따르면, 우레와 같은 박수로 연설을 시작하지만 청중의 마음을 전혀 돌려놓지 못하는 유명한 변가가 많았는데, 그러나 ‘링컨’은 달랐으며, 그 자신이 확신에 차 연설한 까닭에 청중에게도 확신을 심어 주었다.”(p212) ⑩오래전부터 ‘링컨’의 연설을 들어온 사람들도 깜짝 놀랐는데,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저 친구가 언제 노예제도의 역사를 저렇게 완벽하게 공부했지?”라고 물었으며, 연방 하원에서 참담한 시간을 겪고, 기대한 고위직에 임명되지 못한 이후 오랫동안 자신을 되돌아보며 깊이 생각하고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였음(p212). 자기의혹에 빠진 시련의 시간에 ‘링컨’은 더욱 노련했고, 개인적으로 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성장을 이루어냈는데, 다시는 자기만이 정의롭다고 우쭐대지 않았고, 복수하려는 마음에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려는 수단으로 상대를 조롱하거나 풍자하지 않았음(p212).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링컨’의 ‘더들라스’와의 연설의 대결에서의 승리를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당시 ‘링컨’의 연설의 논리적 전개 및 비유와, 연설 이 후의 관중들의 분위기 및 그 의미에 대해 통찰력 있게 다루었음. 호소력있는 연설의 필수 요소는?
 
□ 요약(제2-1부 역경과 성장 : 9. 에이브러햄 링컨_상원의원을 향한 시도)
 
①철학자 ‘랠프 월도 에머슨’은 소크라테스와 피타고라스의 금언에 대해 언급하며, “대담하고 창의적인 표현만큼 인간을 특징짓는 것은 없다. 중요한 진실을 창의적인 형태로 완벽하게 풀어내면 사람들의 주의를 끌며 오랫동안 기억된다.”며 “그런 식으로 웅변하면 명성을 얻고 유명해진다.”고 했는데, 이 기다림의 시간에 ‘링컨’은 언어를 활용하는 법을 공부했고, 다양한 이야기를 수집했으며, 개인적 신념도 더욱 공고해졌음(p212). 그렇게 ‘링컨’은 개인과 ‘리더’로서의 평판이 달라지는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수필가 ‘발터 벤야민’은 “위대한 이야기꾼은 언제나 민중에 뿌리를 둔다. 삶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에서 자료를 끌어 모아, 조언과 교훈과 지침으로 삼을 만한 이야기를 꾸민다.”라고 말하며, “이런 이야기꾼이야말로 스승이고 현자이며, 현실적인 삶에 적용되는 조언이야말로 지혜”라고 덧붙였는데,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함향한 ‘리더십’의 본질은 이런 것이었음(p213). ②‘링컨’을 초기부터 알았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링컨’이 달라졌다고 말했는데, 지역 정치인과 시골 변호사에서 오늘날 ‘에이브러햄 링컨’이란 이름에 담긴 안물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으며, 이 내적 성찰의 시기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게 분명하게 눈에 보였고, 외모와 몸가짐, 연설능력, 사색의 깊이에서 달라진 변화는 그 후로도 지속되었음(p213).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링컨’은 공적인 삶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원대한 목적을 되찾았고, 그 목적은 개인적인 야망보다 훨씬 큰 것이어서, ‘링컨’은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그 목적을 고수했음(p213). ③‘링컨’에게 대통력직을 향한 두 번의 큰 도약은 얄궂게도 두 번의 실패였는데, ‘링컨’은 일리노이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이 되려고 1855년과 1858년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1855년 ‘링컨’은 도덕적 원칙에 개인적 야망을 깨끗이 양보하며,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동료 후보가 캔자스-네브라스카법을 지지하는 후보에게 승리하도록 지원하며 자신의 패배를 위로했음(p213). 그해 1월 100명의 주의원이 새로운 상원의원 후보를 선정하려고 모였을 때, 캔자스-네브라스카법을 반대하던 47명의 휘그당 의원에게 ‘링컨’은 당연히 “첫 선택지”였는데, 한편 ‘스티브 더글러스’를 지지하는 민주당 의원은 41명 이었으며, 따라서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 통과된 후 민주당을 탈당한 5명의 독자적인 의원이 결정권을 쥔 셈이었음(p214). ④시카고 출신의 ‘노먼 저드’(Norman Judd)가 이끈 그 소수파는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 라이먼 트럼불(Lyman Trumbull)을 상원의원으로 밀었고, 교착 상태가 밤까지 계속 되자, ‘더글러스’의 민주당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링컨’은 ‘트럼불’에게 표를 몰아주자고 휘그당 지지자들을 설득했으며, ‘링컨’의 지지자들은 “47표가 5표에 꺾이는 부당성”을 지적하며 안타까워했지만, ‘링컨’의 지시를 따랐음(p214). 그 결과 ‘트럼불’이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는데, ‘링컨’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침내 고통이 끝났다.”라고 울분을 삼켰지만, “내 자신의 패배로 인한 고통보다 민주당 후보의 패배가 주는 기쁨이 더 컸다.”고 덧붙였음(p214). ⑤1858년 ‘링컨’은 공화당 후보로 다시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했는데, 공화당은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을 반대하는 사람들-노예제도를 반대하는 휘그당원들, 민주당에서 탈당한 사람들, 자유토지당원들, 노예폐지론자-로 구성된 신생 정당이었음(p214). 일리노이주에서 그 이질적인 정당을 규합하고 이끌어온 ‘리더’답게 ‘에이브러햄 링컨’은 현직 상원의원인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러스’에 대적할 공화당 후보로 지명됐는데, 많은 선거 운동원은 ‘링컨’이 3년 전의 선거에서 보여준 관대함, 즉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민주당 후보에게 승리를 양보하며 기꺼이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링컨’의 승리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준비가 돼 있었음(p215). ⑥후보 지명을 받아들이는 ‘링컨’의 연설에서 온유한 학습과 설득으로 추종자들을 끌어가겠다는 전반적인 청사진이 읽혔는데,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순한 성명을 발표하며 ‘링컨’은 청중과 함께 문제를 고심하고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모색해가는 선거 유세에 돌입했음(p215). ‘링컨’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인용해 “내부에서 분쟁하는 집은 서지 못하리라!”고 경고하며 미합중국을 붕괴의 위험에 빠진 집에 비유했는데, 요컨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미주리 협정을 폐지하고, 미합중국이란 건전한 구조에 압력을 가하며 위협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며, 섬뜩하게도 미국을 무너지는 집에 비유했지만 ‘링컨’의 연설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논조였음(p215). ⑦그는 공화당원들에게 노예제도의 확장을 방지하는 법을 회복해 미국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호소했는데, 노예제도가 다시 소멸 과정에 들어서면,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고결한 집에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이 다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선언했음(p215)
● 비평
 필자는 ‘링컨’이 자신이 일리노이주에서 주의원들의 더 많은 표를 확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를 반대한 민주당 후보를 상원의원으로 선출시키기 위해 자신의 표를 몰아준 이야기를 통해 대의적 가치를 중요시한 ‘리더십’을 잘 보여줌.
● 토론
 소신과 철학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리더십’ 모습을 통한 교훈은?
 
□ 요약(제2-1부 역경과 성장 : 10. 에이브러햄 링컨_대통령직을 향한 시작)
 
①‘에이브러햄 링컨’이 두 번째로 연방상원의원 후보에 출마했을 때는 바야흐로 모든 것이 역사적인 ‘링컨-더글러스 토론’으로 수렴되고 있었으며, 일곱 번에 걸친 대면 토론은 수만 명의 청중을 끌어들였고, 전국의 유수한 신문에 전문이 게재되며 수천만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았음(p215). 1860년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더글러스’가 지역지와 전국지 기자들을 토론장에 끌어당긴 덕분에, 당시 일리노이에서밖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링컨’도 덩달아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동부의 한 정치인은 일리노이 지역지 기자에게 “당신 주에서 ‘더글러스’와 입씨름하고 있는 그 사람이 대체 누구요? 내 생각에 우리나라 역사상 국가적인 문제에 그처럼 설득력 있게 연설한 사람이 없었소. 노예제도에 대한 지식도 상당히 깊고, 논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고, 연설 방식도 독특해서 흉내 내기 힘들던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라고 물었음(p214). ②유권자들이 투표소로 향하기 시작한 11월, ‘링컨’의 인가에 힘입어 공화당 후보들이 주 전체 투표에서 과반을 차지했는데, 하지만 불공정하고 낡은 재분배제도(미국의 경우, 상원의원은 각 주별로 2명씩 100명을 뽑고, 하원의원은 각 주의 인구수에 비례하여 총 435명을 뽑는데, 10년마다 인구 조사를 실시해 주별 하원의원 수를 재분배하여 하원의원 선거구를 다시 확정하며, 주의회를 장악한 정당이 소속 정당 후보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획정하는 게리멘더링(gerrymandering)현상이 존재함)에 의해 민주당이 다시 주의회에서 다수당이 됐고, 민주당은 지체 없이 ‘스티븐 더글러스’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재선출했음(p216). ‘링컨’의 개인적인 열망은 또다시 꺾였지만 ‘링컨’은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였으며, 며칠 후, ‘링컨’은 지지자들에게 수십 통의 위로 편지를 보냈는데, 그가 지지지들에게 위로를 받지 않고, 거꾸로 그가 지지자들을 위로했다는 게 색달랐음(p216). ③‘링컨’은 친구이던 의사, 앤슨 헨리(Anson Henry)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선거에 참가할 수 있어 정말 기뻤네. 덕분에 이 시대에 지속적인 중대한 문제에 대해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많은 의견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라고 말했음(p216). 또 어떤 친구가 실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기분이 좋아질 거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이 곧 시작될 테니까. 우리가 다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네.”라고 약속했는데, ‘링컨’이 보여준 침착하고 평온한 자세는 지지자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링컨’ 자신도 무척 진지했고, 그 패배를 일시적인 패배라 믿었음(p217). ④‘링컨’은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되고, 그 제도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돼야 한다고 믿었는데, 상원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이브닝 포스트>는 사설에서 “이번 세대에 선거 운동을 통해 ‘링컨’만큼 유명해진 사람은 없다.”라고 썼음(p217). ‘리더십’에 대한 ‘링컨’의 지식도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고 깊어졌는데, 하지만 한 친구가 그에게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링컨’은 고개를 저으며 ‘윌리엄 헨리 수어드’, ‘새먼 체이스’(Saimon Chase) 등 “훨씬 더 유명한 인물”이 많다고 말했음(p217). ⑤‘링컨’은 그들을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운동을 현재 상황까지 끌어온 주역”이라고 표현했는데, ‘수어드’는 최연소 뉴욕 주지사를 지낸 뒤 상원에 진출했고, 열정적인 연설로 북부 자유주의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으며, 또 미국에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가장 유명한 정치인으로 손꼽혔음(p217). 한편 ‘체이스’는 당시 최초의 공화당 출신 오하이오 주지사로, 상원에서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을 반대하는 투쟁을 선두에서 이끌었는데, 공화당 창립자 중 한명이기도 했으며, ‘에드워드 베이츠’(Edward Bates)는 버지니아 출신이었지만 미주리로 이주한 뒤 노예제도 반대 운동에 참여한 존경받는 판사였고, 북부 전역의 보수주의자들과 중서부의 남쪽 주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음(p218). ⑥‘링컨’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지명권을 얻으려고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링컨’에게는 열렬한 야망만큼이나 날카로운 정치적 본능이 있었고, 그래서 세 명의 유명한 상대를 꺾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려면 굽히지 않는 단호함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절묘하게 결합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파악했음(p218). ‘링컨’은 주제넘게 출마 선언을 서두르지 않았고, 신중하게 때를 기다리며 당의 입장을 대신해서만 발언하여 수만 당원의 마음을 얻었는데, 캔자스, 미주리, 오하이오부터 뉴욕,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까지 북부 전역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수없이 시행한 연설에서 ‘링컨’은 공화당원들에게 사소한 차이는 제쳐두고, 새로운 당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치자고 호소했음(p218). ⑦또 고향인 일리노이주 밖에서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첫 선택지’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스스로 다수의 차선이 되는 전략을 구사했는데, 경쟁자들을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첫사랑을 포기해야만 하는 분위기”로 몰아가는 걸 목표로 삼았음(p218). 전국적인 명성을 구축하자 ‘링컨’의 마음속에 대통령 후보로 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커져갔는데, 후보 가능성을 점치는 의견에는 여전히 익살스럽고 회의적인 눈길을 던졌지만, 경쟁자로 올라선 자신의 모습을 시각화한 지 오래였으며, 그가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기 전에 예상 후보에 대한 전망이 크게 뒤집힌 것은 분명했음(p218). ⑧‘링컨’도 훗날 인정했지만, “대통령이란 벌레가 언제부터 자극하기 시작했고,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기에 결국 후보가 되겠다고 나섰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성공 가능성이 점점 구체화되자 ‘링컨’은 한층 더 노력했고, 경쟁자들이 혀를 내두를 전도로 선거운동에 몰입했음(p219). ‘수어드’는 대통령 후보권은 따 놓은 당상이라 확신하고 전당대회 전까지 8개월 동안 유럽 전역을 여행했지만, ‘링컨’은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고 조사하며 연설문을 다듬고 또 다듬었는데, ‘링컨’은 주립 도서관의 한 구석을 차지하거나, 유세를 앞둔 지역에서 뒷방이나 작은 방에 숨어 누에고치처럼 웅크리고 앉아 혼자 연설문을 작성했음(p219). ⑨‘링컨’은 혼자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며 연설문을 작성하는 데 몰두했는데, 때때로 절친한 친구들에게 피드백을 받았지만, 유세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공천을 받기 위해 정확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전적으로 자신의 통찰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음(p219). 이런 집요한 노력은 뉴욕의 쿠퍼 유니언 대학에서 더할 나위 없이 큰 보상을 얻었는데, 대학의 강연 요청을 ‘새먼 체이스’는 거절했지만 ‘링컨’은 흔쾌히 받아들였으며, ‘수어드’의 고향 주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링컨’은 연방 헌법에 처음 서명한 39인이 노예제도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조사하고, 그들이 남긴 글과 성명서를 면밀히 읽고 분석한 끝에 절대 다수가 노예제도를 “결코 확대되지 않아야 할 해악, 현재 우리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납하고 유지할 수밖에 없는 해악”으로 규정했다는 것을 알아냈음(p220). ⑩‘링컨’의 주장에 따르면, 공화당원이 진정한 보수주의자였고, 공화당이 건국 아버지들의 다짐과 의도에 가장 가까운 정당이었는데, 한편 남부에서는 중재자로서 접근하며, 전국을 갈가리 찢어놓은 폭력적인 사건들-남부 출신 의원이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찰스 섬너’를 공격한 사건, 흑인은 시민이 아니라고 판결한 ‘드레드 스콧’ 사건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결정, 하퍼즈 페리의 병기창을 습격한 노예폐지론자 ‘존 브라운’-에 냉정하고 신중하게 대응하기를 요구했음(p220). 기록과 논리에 근거한 논증과 온건한 어조 뒤에 감추어진 진실한 열정에 상대적으로 급진한 청중도 크게 흔들렸는데, ‘링컨’이 1854년 공적인 세계에 다시 들어온 이후 행한 모든 대중 연설에서 공화당의 정강이던 두 가지 주된 원칙이 빠짐없이 읽혔으며, 하나는 새로운 영토에는 노예제도가 확대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예제도가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음(p220).
● 비평 및 토론
  필자는 ‘링컨’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대통령 후보로 물망에 오른 ‘윌리엄 헨리 수어드’나 ‘새먼 체이스’를 언급하며, 노예제도와 당시 대통령 직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잘 밝히며, ‘링컨’은 고유의 성실함으로 이 부분의 연설을 준비하였음을 잘 보여줌. 대통령직 관련 현 우리 이슈는?

혼돈의시대리더십(도리스컨스굿윈)_25하우스(이현재)_링컨_대통령직을향한첫걸음.hwp
0.0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