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제25-50강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16(시어도어 루스벨트_정치적 위기와 시련)

presentlee 2025. 12. 21. 01:10

  https://youtu.be/7pCO7yJdk8w?si=XkDiWZKlHdYn_lZQ

 

HouseLeadership School

 

Leadership : in Tubulent Times(도리스 컨스 굿윈)

□ 요약(제2-1부 역경과 성장 : 11. 에이브러햄 링컨_미국 대통령으로 당선)


①‘링컨’은 1954년 공적 세계에 다시 들어온 이후 1)새로운 영토에는 노예제도가 확대되지 않는다는 것, 2)노예제도가 이미 존재하는 곳에는 노예제도를 금지하지 않겠다는 공화당의 원칙을 모든 연설에서 피력하였으며, 대통령 후보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서너 달 앞두고, 공화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윌리엄 헨리 수어드’는 노예폐지론자들이 좋아하던 격정적인 표현을 완화하는 방향을 취했고, 공화당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에드워드 베이츠’는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헌법적 권리를 공약하며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음(p220). 반면 ‘링컨’은 일관된 방향을 유지했는데, 공화당의 두 가지 핵심 정강 정책을 고수하며 두 노선의 교차점-공화당 정책에서 극단적인 면들의 완벽한 중도에 있었음(p220). ②‘링컨’의 “극단적 회피”는 계산된 결과가 아니였는데, <시카고 데일리 프레스 앤드 트리뷴>이 지적했듯 “차분한 본성과 결코 균형을 잃지 않는 정신력의 자연스런 결과물”이었음(p220). 전당대회가 가까워지면서 ‘링컨’을 후보로 추천하자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는데, 하지만 ‘링컨’ 자신은 어떤 것도 당연시하지 않았으며,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으려면 일리노이주 대표단의 일방적인 지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링컨’은 일리노이 내의 분열을 해소하려고 애썼음(p221). ③일리노이 북부 지역의 한 정치인에게 “나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지 못하더라도 크게 상처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러나 일리노이 대표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면 적잖게 상처를 받을 것이다. 자네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이 문제에서 나를 도와줄 수 없겠나?”라는 편지를 보냈음(p221). 다행히 전국 전당대회를 열흘 앞두고, 일리노이주 공화당원들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만장일치로 투표하라”고 대표단에게 지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반면, ‘새먼 체이스’는 자신이 당과 오하이오주에 크게 공헌했으니 당연히 오하이오 대표단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 판단하고, 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음(p221). ④시카고 선거 유세에서도 ‘링컨’ 팀만큼 열심히 활동한 경쟁 팀은 없었는데, 개인적으로 정치적 야망을 가진 팀원도 적지 않았지만, ‘헨리 휘트니’가 말했듯이 “대부분은 그의 고결한 도덕적 품성과 순수한 정치적 도덕성을 사랑하는 마음, 즉 애정을 담아 일했다.”(p221). ‘링컨’ 팀의 핵심적인 팀원은 1855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링컨’에게 의원직을 양보받은 전 민주당원 ‘노먼 저드’와 ‘라이먼 트렁불’이었는데, ‘수어드’와 ‘체이스’는 권력의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에서 많은 적을 만든 반면, ‘링컨’은 관대함으로 ‘저드’와 ‘트럼불’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음(p221). ⑤투표가 시작됐을 때 ‘수어드’가 1등을 차지하고, ‘체이스’와 ‘베이츠’가 그 뒤를 따를 것이라 예측됐는데, 하지만 세 번째 투표가 끝났을 때 ‘에이브러햄 링컨’이 후보로 지명되며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으며, 그 이후로 오랫동안 ‘링컨’의 승리 요인에 대한 토론이 있었음(p222). “‘링컨’의 승리보다 ‘수어드’의 패배”에 주목하는 학자가 적지 않았고, 행운을 지적하는 학자도 많았는데, 전당대회가 시카고에서 열렸다는 사실, 즉 일리노이가 주된 전쟁터가 됐다는 사실이 행운이었다는 뜻이며, 우연이 어떤 역할을 했더라도, 궁극적으로 ‘링컨’의 주된 승리 요인은 그의 남다른 ‘리더십’-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하는 능력, 자신의 판단력과 직관력에 대한 확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근면함, 웅변 능력, 차분한 본성과 드높은 야망-이었음(p222). ⑥‘링컨’은 야망을 실현하려고 너그러운 본성을 버리지 않았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대의를 꺾지도 않았는데, 대표단에게 ‘링컨’의 ‘리더십’을 정확히 판단할 만한 기준이 없었을 수 있지만, 그들이 신생 정당을 승리로 인도할 최적임자를 선택했다는 것은 그 이후의 사건들로 입증됐음(p222). 처음부터 ‘링컨’은 자신에게 패한 후보들과 힘을 합해 공화당을 하나의 조직으로 융합하는 게 급선무라는 걸 알아차렸는데, 이런 목적으로 ‘링컨’은 ‘체이스’에게 친서를 보내 선거 운동에서 “특별한 지원”을 요청했으며, 또 세인트루이스의 ‘베이츠’ 판사에게는 절친한 친구를 보내 자신을 지지하는 공개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했음(p223). ⑦특히 ‘링컨’은 ‘수어드’가 자신을 대신해 전국을 순회하며 전국적으로 활동해주기를 바랐고, 그런 지원을 확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반면 ‘링컨’ 자신은 절제라는 전략을 추구하며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스프링필드에 머물렀음(p223). 그가 말과 글로 발표하는 모든 것이 맥락과 관계없이 취해져 당파적 목적에서 분파주의를 자극한다는 걸 알았기에, 특정한 쟁점에 대해 질문 받은 경우에만 성명서를 발표하고 당론을 지지했는데, ‘링컨’이 주장했듯이, 신중하게 작성된 성명서에는 당시 중요한 쟁점에 대한 그의 의견이 빠짐없이 담겨 있었음(p223). ⑧1860년 가을까지 노예제도로 휘그당이 산산조각 났듯이, 민주당도 그에 못지않은 타격을 입었는데, ‘존 브라운’(John Brown)이 ‘하이퍼 페리’의 병기창을 습격한 사건에 남부인들의 태도가 냉담해졌으며, 남부 진영은 ‘더글러스’의 국민주권주의를 더는 지지하지 않았고, 주민 투표에 상관없이 노예를 새로운 영토에 가져갈 수 있는 권리를 명확히 보호해달라고 연방의회에 요구했으며, 따라서 ‘더글러스’가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자, 남부 출신 민주당원들은 항의하며 전당대회장을 빠져나와 켄터키 상원의원 ‘존 브레킨리지’(John Breckinridge)를 자체 후보로 지명했음(p223). 그런 분열이 있기 전에도 ‘링컨’은 한 친구에게 “공화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50퍼센트 이상”이라 말했지만, 그렇게 당이 쪼개지자 민주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졌다.” 하지만 ‘링컨’은 어떤 것도 운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며 선거 운동에 혼신을 다했음(p223). ⑨‘링컨’은 보잘것없는 이력에 약간의 살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짤막한 자서전을 쓰는 것도 오랫동안 망설인 뒤에야 동의했는데, 경계지에서 힘겹게 보낸 어린 시절을 감상적으로 표현하며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지 않았지만, 통나무집을 짓고 거의 4헥타르에 이르는 목초지를 에워쌌던 가로대 울타리를 떼어내던 기억을 소개했으며, 곧이어 ‘링컨’이 어린 시절에 떼어냈다는 가로대가 집회장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가로대는 ‘링컨’의 상징으로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고, 가로대가 선거 운동원을 위한 메달에 새겨졌고 신문 만평에도 등장했으며, 투표를 독려하는 구호와 노래에도 빠지지 않았음(p224). ‘링컨’은 화려한 행사와 함께 자신에게 선물로 주어진 가로대가 자신이 떼어낸 것이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의 아들이 대체로 그렇듯 임금 노동자였고 가로대를 떼어냈으며, 평저선에서 힘들게 일했다.”라는 걸 인정했는데, 독학하며 힘들게 노력한 삶에 대한 이야기로 ‘링컨’은 “보통 사람을 잘 이해하는 사람”, 요컨대 아메리카 드림을 실현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음(p224). ⑩선거일, 당연한 말이겠지만 ‘링컨’은 불안하고 초조했는데, 투쟁은 그에게 생득적 권리였고, 역경은 그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일리노이의 ‘드윗 클린턴’이 되겠다는 젊은 시절의 꿈이 공공개발 프로젝트의 좌절로 무너졌을 때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음(p224). 연방 하원의원으로 실망스런 시간을 보낸 뒤에는 혹독한 자기평가와 자기의혹의 시기가 있었지만 연방 상원의원에 두 번 도전해 실패한 뒤에는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고, 오히려 반 노예제도 운동에 매진하는 긍정적 계기로 삼았는데, 그의 법률 회사 파트너 ‘윌리엄 헌던’은 “당시 ‘링컨’은 미국을 괴롭히던 중대한 쟁점들과 철저하게 뒤엉켜 쟁점의 일부가 된 상태였다.” 마침내 결과가 발표됐고, 52세 ‘링컨’은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크게 기뻐했음(p225). ⑪그의 승리는 자존감을 높이려던 23세의 청년이 꿈꾸던 것과는 다른 야망의 실현이었으며, ‘링컨’은 “위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여겨졌던 ‘헨리 클레이’에게서 찾아낸 조용한 책임감을 보였음(p225). 그의 말과 글은 줄어들고, 절제되고 신중해졌으며, 확정적 표현을 썼지만, 반생애 전에 청년 회관에서 행한 연설만큼 시학적이었으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냄(p225).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링컨’의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선출 과정을 민주당의 분열과 관련되어 잘 묘사하고 있음. ‘링컨’의 ‘가로대’와 같이 ‘리더십’에서 상징의 중요성 및 역할?


□ 요약(제2-2부 역경과 성장 : 1. 시어도어 루스벨트_빛이 내 삶에 사라졌다)


①올버니의 주의회에 참석하고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건강한 첫 딸을 얻었다는 소식, 즉 아버지가 됐다는 반가는 전보를 받았는데, 하지만 곧이어 또 하나의 전보를 받고, 온 몸에서 기운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었으며, ‘루스벨트’는 주의회를 박차고 나와 뉴욕시행 기차에 올라탔음(p227). 뉴욕시에는 아내 ‘앨리스’를 돕고, 첫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려고 모든 가족이 모여 있었는데, 여섯 시간 후, ‘루스벨트’는 비장한 비극에나 있을 법한 악몽 같은 슬픔에 빠져들었음(p227). ②‘시어도어’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생 ‘앨리엇’이 말했는데, “우리 집에 저주가 내린 것 같아. 엄마가 죽어가고 있어. 형수님도!” 자정 무렵, 두 여인은 반혼수 상태에 빠져들었고, 49세이던 어머니 ‘마티’는 여전히 젊어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심한 감기로 여겨졌지만 치명적인 장티푸스로 밝혀진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음(p227). ‘시어도어’는 새벽 3시까지 어머니의 머리맡을 지켰지만, ‘마티’는 결국 그 시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로부터 12시간이 지나지 않아 ‘시어도어’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젊은 아내를 품에 안아야 했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앨리스’의 사인은 급성 신장병이었음(p227). ③임신 때문에 그 증상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며, 그날 밤, 26세의 ‘시어도어’는 일기에 “빛이 내 삶에서 사라졌다.”라고 쓰고는 커다랗게 X자를 그렸으며, 이틀 뒤에는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순수한 시간을 보냈다. 이제부터 내 삶에는 기쁨도 슬픔도 없다.”라고 썼음(p227). 올버지의 주의회는 다음 월요일 저녁까지 휴정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으며, 유명한 주 하원의원에 바치는 애도의 표현으로 “주의회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고, 5번가 장로교회(Five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열린 이중의 장례식에 당 실력자들과 수십 명의 하원의원이 참석하였음(p228). ④6년 전 ‘루스벨트’ 시니어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뉴욕 사교계 인물들과 많은 지인도 있었는데,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옛 가정교사이던 ‘아서 커틀러’의 눈에 “시어도어는 멍하니 넋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p228). 목사도 장례식을 더욱더 슬프게 하는 특별한 상황에 대해 언급할 때는 자제력을 잃고 목소리가 떨렸는데, “한 가족에서 두 분이, 같은 집에서 같은 날에 이 땅을 떠났고 함께 묻히게 됐습니다.” 목사는 오랜 목회에서 그와 같은 경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도 덧붙였음(p228). ⑤메인주를 탐험할 때 안내자 역할을 하며 친구가 된 ‘빌 수얼’의 애도에 대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자기성찰적인 대답에서는 스토아주의 운명론(합리주의나 엄격한 극기와 금욕을 위주로 하는 생활태도, 즉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쾌락과 고통에 동요하지 않으며 의연한 자세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이름)이 읽히는데, “음산하고 사악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충격에 위축되거나 굴복하는 게 좋은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또 일을 중단한다고 충격이 가벼워진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p228). 장례식을 마치고 이틀 뒤, ‘루스벨트’는 의회로 복귀하며 한 친구에게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다.”라고 하소연했으며, 동료 의원 ‘아이작 헌트’(Issac Hunt)는 “그는 달라진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의 얼굴에는 없었던 슬픔이 어려있었다. 누구도 그에게 그 문제를 거론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에게 동점심을 보이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슬픔을 그의 영혼에만 묻어두려 했다.”고 회고했는데, ‘루스벨트’는 갓 태어난 딸을 돌보는 책임을 맡은 누나 바미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저녁회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일을 할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일에 몰두할수록 일이 더 좋아집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음(p229). ⑥‘루스벨트’는 예부터 항상 정력적으로 일하는 성격이었지만, 이번에도 마음속 슬픔을 잊으려고 입법 활동에 더욱 몰두했으며, 의회의 운영 절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개혁 법안을 끝없이 제출했고, 동료들의 비판에는 귀를 닫아 버렸음(p229). 따라서 그가 가정의 슬픔을 겪은 뒤 노회한 정치인들과 젊은 개혁가들의 선의와 호의로 그에게 주었던 정치적 자산을 잃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회기가 끝나기 전, ‘루스벨트’는 다음 회기에는 올버니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정했으며, 그의 주의원 경력은 그렇게 끝났음(p229). ⑦그러나 ‘루스벨트’에게는 싸워야 하는 또 하나의 성전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그에게 일시적으로 목적의식을 주었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우울감을 더욱 악화시켰음(p229). 6월에 열린 공화당 전국 전당대회에서 ‘루스벨트’는 독립적인 강경한 소수파 리더로서, 개혁가이던 버몬트 상원의원 ‘조지 에드먼드’(George Edmunds)를 대통령 후보로 밀었는데, 한편 당 실력자들은 ‘제임스 G. 블레인’(James Gillespie Blaine)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 했으며, 개혁가들이 ‘블레인’을 남북전쟁 후 도덕적으로 부패한 공화당의 상징으로 점찍은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p229). 
● 비평
 필자는 주의회 하원의원 때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처하였던 매우 어려운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으며, 당시의 분위기 즉, 자신의 어머이와 아내가 동시에 사망하게 된 상황과 그 이후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여 ‘루스벨트’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어려움을 극복해내고 있음(스토아적)을 잘 보여줌.
● 토론
 ‘리더십’이 처한 위기, 특히 상실과 관련되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또한 이런 위기가 ‘리더십’에 주는 영향은?


□ 요약(제2-2부 역경과 성장 : 2. 시어도어 루스벨트_위기 이후의 정치행보)


①‘루스벨트’가 어머니와 아내를 잃고 우울감 가운데 정치행보를 이어가면서 6월에 열린 공화당 전국 전당대회에서 ‘루스벨트’는 ‘조지 에드먼드’를 후보로 밀고, 공화당의 다른 실력자들은 ‘제임스 G. 블레인’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 했으며, ‘루스벨트’는 ‘블레인’의 지지를 거부해 당 실력자들에게 “악의에 찬 혹독한 미움”을 받았지만, 개혁적인 공화원들에게는 폭넓은 호응을 얻었음(p229). 훗날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찰스 에번스 휴스’(Chales Evans Hughes)는 “특히 젊은 당원들에게 ‘루스벨트’는 정치에서 고결하고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구현한 존재”로 여겨졌다며 “모두의 기분을 상쾌하고 즐겁게 해주는 멋진 산들바람 같았다.”고 회고하였음(p230). ②하지만 ‘루스벨트’의 개혁적 열정은 좌절되고 말았는데, 개표가 끝났을 때 결국 당의 주류가 압도적으로 승리하며, ‘블레인’이 완승을 거두었으며, ‘루스벨트’는 누이 ‘바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완패였습니다. 내 생각에는 ‘블레인’이 최악인데 말입니다. 공직자로 일하기에 ‘블레인’은 정직과 신의에 문제가 많습니다.”라고 말하였음(p230). 그래도 “당의 전반적인 지성을 확인한 것”은 그가 거둔 성과였는데, 공화당 원로로 ‘루스벨트’의 투쟁에 가담한 개혁가, ‘조지 윌리엄 커티스’(George William Curtis)는 “나는 공화당 창당에 기여했다. 이번 사태로 공화당의 사망을 목격하게 될까 두렵다.”고 한탄했으며, ‘블레인’이 후보로 결정되자 많은 공화당원이 탈당했는데, 그들은 이른바 지주파로서 “머그웜프”(Mugwump-당파에 초연한 사람, 당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말함)를 자처하며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음(p230). ③자주파는 ‘루스벨트’가 자신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루스벨트’는 전당대회장을 떠날 때 분노에 찬 목소리로 한 기자에게 “‘블레인’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 후보가 올곧은 사람이라면 그를 진심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음(p230). 하지만 수주가 지난 뒤, 그는 입장을 번복하며 자신은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공화당원, 즉 정당 정치를 신봉하는 열성 당원이라고 발표했고, 과거에 당과 함께했듯이, 앞으로도 당과 함께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는 뜻이었는데, 그는 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싶지 않았던지 “전당대회의 결과를 따르겠다.”고 결정했고, 동료 개혁가들은 ‘루스벨트’의 변심에 망연자실했고, 그전까지 ‘루스벨트’를 지원하던 개혁적인 신문들도 그때부터 그를 대의의 반역자라 비난했음(p231). ④<보스턴 글로브>는 “시어도어, 야망을 경계하라. 그대만큼 촉망 받던 많은 젊은 정치인이 그런 잘못으로 몰락했다.”고 경고했는데, ‘루스벨트’는 처음에 당의 노선에 반대하며 당의 실력자들을 화나게 했다가, 원래의 입장을 뒤집고 ‘블레인’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여 자주파들을 격분하게 했으며, ‘루스벨트’는 뉴욕의 한 기자에게 “나는 정치를 계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말했음(p231). 또 친구이던 매사추세츠주 주의원, ‘헨리 캐벗 로지’(Henry Cabot Lodge)에게는 “정치적 문제에서 의견을 번복한 게 무엇보다 아쉽다.”고 인정했고, 누이 ‘바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정치적 토론에 참여할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사라졌으요. 앞으로 많은 시간이 지나야 정치에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절망했음(p231).  ⑤개인적인 삶을 괴롭히던 불행한 재앙과 스스로 자초한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날 필요성을 절감한 ‘루스벨트’는 전해에 구입해둔 다코다의 배드랜드(Badlands)로 향했으며,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기자에게 “남은 여름과 초가을 다코다의 목장에서 지낼 것이다. 그 후에도 무엇을 할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라고 말했는데, 개혁가들은 여전히 배신감을 가라앉히지 않았으며, <이브닝 포스트>는 “목장은 물론 세상의 어떤 은신처도 ‘블레인’과 같은 사람을 지지한 사람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빈정거렸고, ‘루스벨트’는 “소에게 낙인이나 찍는 게 선거를 잊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라며 서글프게 대꾸했음(p232). 서부 경계지에서의 체류가 시작됐고, 훗날 ‘루스벨트’는 그 기간을 삶에서 “교육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생각하게 됐는데, 20년 후,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기간을 포함해 삶의 어느 시기를 가장 기억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루스벨트’는 “목장에서 살던 때, 즉 자연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의 곁에서 지냈던 때”라고 답했음(p232).  ⑥그 기간 동안 그가 가장 지속적으로 추진한 최고의 프로젝트는 무엇보다 치유와 성장 및 자기 혁신을 위한 노력이었는데, 그 시기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목장 노동자의 사냥여행(Hunting Trips of a Ranchman)>, <목장 생활과 사냥길(Ranch life and the Hunting Trail)>, <서부 정복(The Winning of the West)>의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으며, 목장 운영을 위해 직원 넷을 선택할 때 ‘루스벨트’가 보여준 특징은 훗날 보좌관을 선발할 때도 고스란히 드러났음(p232). 1883년 가을, ‘루스벨트’는 보름 동안 ‘빌 메리필드’와 ‘실베인 페리스’를 데리고 사냥을 다녔는데, 그 때의 경험만을 근거로 그들에게 4만 달러-아버지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돈의 3분의 1-을 맡기며 1,000두의 소를 구입해 돌보는 일을 맡기기로 결정했으며, 또 목장 운영에서 그를 도와줄 사람으로는 메인주를 여행할 때 안내해 준 ‘빌 수얼’과 그의 조카 ‘월 다우’를 선택했음(p233). ⑦누구도 예전에 목장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지만 그런 사실은 ‘루스벨트’의 결정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루스벨트’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수얼’과 ‘다우’의 성격을 읽어낸 뒤, 새로운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의 일정한 몫을 그들에게 보장했지만 손실은 전적으로 자신이 감당할 것이라고 약속했음(p233). 또한 목장에서 지낼 집을 함께 설계하고 짓자고 그들을 불러들이기도 했는데, 훗날 ‘수얼’은 “그는 결정을 내리는 데 머뭇거림이 없었다.”며 “어떤 사람에게 명예를 중시하는 면을 포착하면 그를 믿고 썯다.”라고 말했음(p233). ⑧‘수얼’의 회상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다코타 목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 “무척 우울하고,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아름답지만 황막한 평원이던 배드랜드의 풍경은 ‘루스벨트’의 적막한 내면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다. 극소수에게 그랬듯이 ‘루스벨트’는 ‘수얼’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고,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한 기분이고, 살아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다.”라고 고백했는데, 그때 ‘수얼’은 ‘루스벨트’에게 딸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고 말했으며, ‘루스벨트’는 “누이가 자기보다 딸을 훨씬 더 잘 보살필 것”이라며 “내가 없으면 딸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반박했음(p233). ‘앨리스’가 죽고 나서 몇 주 동안 탈진할 지경까지 일에 몰입했듯이, ‘루스벨트’는 배드랜드에서도 노련한 카우보이에게도 위험하고 힘든 일을 자처하며 자신을 가차 없이 몰아붙였는데, 흥분과 두려움을 통해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을 되찾으려는 듯한 안간힘으로 보였음(p234). ⑨‘루스벨트’는 하루에 16시간씩 말을 탔고, 기복이 심한 지형에서도 전속력으로 달렸는데, 검은꼬리사슴, 가지뿔영양과 말코손바닥사슴, 들소를 사냥했고, 소에 낙인을 찍고 시장으로 몰고 가는 5주간의 광적인 소몰이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루스벨트’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카우보이로 살아갔음(p234). “카우보이 역할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 진짜 카우보이였다.” 목장 일과 카우보이들과 나누는 동료애, 지속적인 글쓰기로 그는 잡생각을 떨쳐냈고, 마침내 밤에도 그럭저럭 숙면을 취할 수 있었는데, 그의 표현을 빌리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잡념이 끼어들 틈이 거의 없다.”(p234). ⑩한때 루스벨트를 우상화하던 동부의 젊은 개혁가들은 그가 서부에서 이렇게 살아간다는 걸 전혀 몰랐으며, ‘찰스 에븐스 휴스’는 “찬란한 기회를 열며 눈부시게 이력을 쌓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그것도 처절히 실패한 끝에 사라졌다고 생각할 뿐이었다.”며 “그는 정계를 완전히 떠났다. 그가 더 이상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사라졌고, 심지까지 잘려나간 촛불과 같은 신세였다. 언젠가 우리를 인도하는 빛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라고 덧붙였음(p234).
● 비평 및 토론
  필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고통과 아픔을 겪고, 정치적으로도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를 번복하는 등 수난을 겪으면서 정치적 나락으로 떨어진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음. 이와 같이 ‘리더십’이 겪는 수난과 정치적 위기 속에서 시어도어가 ‘배드필드’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과정이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