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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리더십학교]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43(26-스물여섯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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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Leadership School
Leadership : in Tubulent Times(도리스 컨스 굿윈)
□ 요약(제3-4부 리더와 시대 13. 린든 존슨_베트남 전쟁의 시작)
①‘케네디’의 암살 이후 ‘린든 존슨’이 보여준 ‘비젼의 리더십’과는 달리, 국제 정치에 있어서 ‘린든’은 전혀 ‘리더십’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존슨’이 정체된 법안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동안, 취임하고 수주가 지나지 않아 미국이 대대적으로 개입해 전쟁의 흐름을 뒤집지 않으면 남베트남이 공산주의에 굴복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군사 보좌관들의 경고가 잇달았음(p588). ‘존슨’은 국가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에게 “베트남 때문에 정말 성가셔 죽겠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발을 뺄 수도 없고! 정말 나로서는 평생 겪어보지 못한 골칫덩이!라고 투덜댔을 정도였음(p588). ②취임 초기에 ‘존슨’의 군사 보좌관들에게 베트남은 끔찍한 골칫거리였고, ‘존슨’에게는 뒤로 미루고 덮어두고 싶은 문제였는데, 그래서 ‘존슨’이 처음에 바란 것은 문제의 억제였으며, 다시 말해서 국제 문제 해결에 위협이 될 만한 중대한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이었음(p588). 의사결정과정, 즉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과정이 점점 복잡해졌는데, 따라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신에 투철한 ‘리더’이던 ‘존슨’은 자신의 능동적이고 격정적인 기질과 충돌하는 상황에 빠져들었고, 국내 문제에서는 마음껏 발산하며, 오랜 경험에서 기인한 그의 직관과 모순되는 조언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국제 문제에서는 그러지 못했음(p589). ③따라서 소수의 각료와 보좌관을 “가장 똑똑하고 가장 뛰어난 전문가”라 생각하며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는데, 대체로 그들은 일반화된 지식층을 대변하고, 베트남 전쟁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투쟁이라고 생각하는 세대였으며, 따라서 그 전쟁에서 패배하면 공산주의 침략이 도미노처럼 확산되고, 냉전에서 미국은 크게 약화될 것이란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음(p589). ‘존슨’은 국내 문제에 관련해서는 TF를 운영하며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구속되지 않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접근법을 얻었지만, 베트남 전쟁에 관련해서는 정부 내의 반대자는 물론이고, 대학과 싱크탱크의 미국의 국가 안보에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과 미국이 파병을 확대하기 전에 베트남이 포기하면 미국의 패배가 아니라 자유 진영의 후퇴로 해석될 것이란 주장을 무시하고 외면했음(p589). ④베트남 문제에 대한 ‘존슨’의 의사결정은 한마디로 단편적이었으며, 명확한 전략적 의제도 없고, 일관성과 확신도 부족했으며, 1965년 2월 베트콩 게릴라가 미군 고문들의 막사를 습격하자, ‘존슨’은 북베트남의 몇몇 지역을 공습하는 보복 공격을 승인했음(p589). 게다가 공습을 주도한 공군 기지를 보호하겠다는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는데, 그 직후에는 공군 기지를 보호하려고 파병된 해병대를 보호하기 위한 병력을 또 파병했으며, 따라서 4월쯤에는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이 5만 명을 넘었고, 그 병사들의 임무는 더 이상 공군 기지 보호가 아니라, 근처 베트남군이 곤경에 빠지면 전투에 참전해 그들을 돕는 것이었음(p590). 6월경 미군은 베트남군과 협력하거나 독자적으로 군사 작전을 펼칠 수 있었는데, ‘존슨’은 누구에게나 고유값이 있어, 마주 앉아 상대의 눈을 보면 어느 값에 그와 타협할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호찌민과 한 방에 들어가 마주 앉을 수만 있다면, 미군의 힘을 인정하라고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음(p590). ⑤실제로 ‘존슨’은 “전쟁도 필리버스터와 같은 것이어서 처음에는 강력히 저항하지만 점점 힘이 빠지기 마련이므로, 호찌민도 서둘러 끝내려 할 것”이라 말했는데, ‘존슨’은 베트남 전쟁은 두 적대적인 집단 간의 다툼이므로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고수했고, 내란이고 사회 혁명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으며, 또한 조국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는 북베트남인의 의지가 미군에게 지원받는 남베트남인보다 훨씬 굳건하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음(p590). 폭격으로도 고집스런 북베트남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지 못하자, 당황한 ‘존슨’은 자애로운 아메리칸 드림을 베트남에 이식하려고 했는데, 왼손으로는 베트남을 계속 파괴하면서 오른손으로는 남북 베트남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위해 10억 달러 프로젝트를 제안한, 모순된 태도는 눈총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음(p590). ⑥‘존슨’은 뉴딜 정책의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를 압도할 정도의 규모로, 메콩강에 대규모 댐을 건설해 엄청난 양의 전력을 생산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는데, 실제로 힐 카운티를 전력화할 때 축소된 모형으로 그런 미래를 본 적이 있었고, 학교와 도로와 주택을 세우고, 작은 마을에 “경의로운 현대 의술”을 도입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음(p591). 한쪽에서는 베트남식 위대한 사회를 약속하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파괴와 황폐화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인데, 1965년 7월쯤, 지속적인 폭격도 개발의 약속도 북베트남의 남부 침투를 막을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고, ‘존슨’의 최측근 보좌관들은 남베트남이 붕괴의 위험에 직면했다고 경고하며, “패배를 피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파병을 권고했고, ‘존슨’은 다시 그 충고를 받아들였으며, 그리하여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은 50만을 넘겼음(p591). ⑦심지어 보좌관들은 23만 5,000명의 예비군에게 동원령을 내리고, ‘비상사태’(state of emergency)를 선포하라고 촉구했으며, 더 나아가 경제를 전시 상태로 편성해야 한다며 의회에 전쟁 비용을 위한 증세를 요구하고, 국민에게는 미국이 큰 전쟁을 시작했다고 알려야 한다고 ‘존슨’에게 압력을 가했는데, 그해 7월에 내려진 결정보다 ‘리더십’의 실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었음(p591). ‘존슨’은 전쟁을 확대하라는 권고를 받아들였지만, 의회와 국민에게 확정에 따른 비용 상승 가능성을 알리라는 조언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투표권, 이민법 개혁,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위한 입법을 꾸준히 추진하기 위해 의회와 국민에게 베트남전의 필요성이나 그 전쟁 자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결정했음(p591). ⑧훗날 ‘존슨’은 이렇게 회고했는데,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비롯해 어떤 대통령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을 향상시키겠다는 젊은 시절의 꿈에 거의 도달한 것 같았다. 따라서 나는 외교 정책을 날개 밑에 감추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레이디 버드’를 아는 것만큼이나 의회를 잘 알았다. 전쟁에 대한 토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이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의 종말이 시작되는 날이 될 거라는 것도 알았다.”(p592) 하지만 ‘존슨’이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데 사용한 기법들은 베트남 전쟁의 내용과 성격을 미국인에게 감추는 데도 사용되며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더 많은 병력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걸 피하기 위해 ‘존슨’은 예비군을 동원하지 않고, 징집영장 발급을 늘렸고 모병을 확대했음(p592). ⑨5만 명의 추가 파병 소식을 오후의 복잡한 기자회견에 슬쩍 끼워 넣었는데, 의회에 전쟁세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과거에는 입법부를 마비 상태에 빠뜨린 감세 법안을 해결하려고 예산을 깎는 데 주력했다면, 이번에는 증가한 국방비를 감추려고 예산을 교묘하게 조작하고, 그런 결정은 결국 인플레이션을 조장했고, 그가 공들였던 국내 프로그램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음(p592). 베트남 전쟁이 1965년을 넘어 1968년까지 계속되자 국민의 불만이 깊어졌는데, 대학 캠퍼스에서 시작한 시위가 길거리로 확산됐고, 도시마다 시위대가 수만명을 넘었으며, 아칸소 출신 상원의원, ‘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Jame William Fulbright)가 베트남 전정에 대한 공청회를 시작하며 공개 토론을 열었지만, ‘존슨’은 그 토론을 들으려 하지 않았음(p592).
● 비평
필자는 ‘린든 존슨’이 베트남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에 대하여 잘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린든’이 베트남전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그가 가진 꿈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능가하는 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였고, 그래서 그가 시행한 위대한 사회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중 베트남전이 부각됨으로 자신의 꿈이 무산될 수 있기 때문임을 잘 밝힘.
● 토의
‘린든 존슨’이 국내 이슈에 대해 보였던 ‘통합적 리더십’이 국제 정치에는 전혀 발휘되지 못하였는데, 이처럼 ‘리더십’이 한계에 봉착하는 원인과 해결은?
□ 요약(제3-4부 리더와 시대 14. 린든 존슨_리더십의 실패)
①‘존슨’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정보 공개를 단계적으로 서서히 확대하자는 자신의 정책을 고수하며 그 정책에 동의하는 사람들로 보좌관들을 줄여갔는데, 그의 ‘리더십’은 지지하는 세력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혼자 책임을 떠안지 않으려고 온갖 곳에서 희생양을 찾으며 언론과 지식인, 극단적인 자유주의자와 외부의 선동가를 비판했으며, 그 사이에도 ‘존슨’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변해버린 베트남전에 대해 국민을 계속 속였음(p593). ‘존슨’이 미국 국민과의 신의를 저버렸다는 명백한 증거는 1968년 초에 드러났는데,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내에서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를 시도한 것이었으며, 급습은 궁극적으로 둔화됐지만, 함락된 도시와 피로 물든 전투 현장이 텔레비전 뉴스로 방영되며, 전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마침내 터널 끝의 빛이 보인다는 존슨 정부의 거듭된 확언이 거짓으로 밝혀졌음(p593). ②배신감이 전국을 뒤덮었고, 미국 국민은 결국 ‘존슨’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이미 의심받기 시작하던 그의 신뢰성은 끝없이 추락했고, 대다수 국민은 ‘존슨’이 그들을 조직적으로 호도했다고 믿기에 이르렀으며, 대통령에 대한 신뢰 상실은 정부와 ‘리더십’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음(p593). 민주 정부의 수준은 ‘리더’가 국민과 공유하는 의문, 즉 “중요한 결정이 국민에게 어떻게 설명되고 규정되는지”에 의해 측정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전쟁에는 일반 국민의 가혹한 희생이 수반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어느 경우보다 전시에는 국민이 정확히 이해하도록 정부의 선택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전해져야 했으며, 결국 어떤 정치인도 방향과 목적의식을 국민과 공유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국민이 정부로부터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모르고, 정부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모른다면, 어떤 정치인도 전쟁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없음(p594). ③전쟁이라는 중대한 시기에 ‘리더’와 ‘국민’은 서로 정직하게 행동하고 협력해야 했고, 그런 점에서 ‘린든 존슨’은 실패했으며, 전쟁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크다는 걸 알게 되자, ‘존슨’은 전쟁의 수렁에서 미국과 그 자신을 끌어낼 방법을 생각했는데, 1969년 3월 31일, 텔레비전에 중계된 연설을 통해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중단함으로써 전쟁의 강도를 일방적으로 줄여가겠다고 선언한 것임(p594). 그 후에는 대통령 출마도 포기하고, 민주당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단호히 선언해 전국을 놀라게 했는데,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면, 출마를 포기한 이유는 “블랙베리만큼 많았다.”(p594) ④그의 정치 이력에서 생명선이던 국민의 애정과 지지를 잃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코앞에 닥친 예비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란 보장도 없었으며, 그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던 지난 선거에서 보여주었던 정치적 자산이 완전히 고갈됐고, 활력과 활기 및 회복탄력성이란 개인적인 자산도 위험한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판단했음(p594). 게다가 심장마비라는 가족력을 고려하면, “다시 4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끝없는 긴장을 견딜 자신”도 없었는데, 이런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이유를 넘어, ‘존슨’의 눈은 이미 역사의 판단을 향해 있었고, ‘존슨’은 재선 출마를 단념함으로써 논란에 휘말리지 않고,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음(p594). ⑤평화안에 미국의 이익만을 도모한 흔적이 없다면 하노이가 평화안을 신뢰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또 당파성을 초월하면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증세를 강력히 밀어붙일 수 있었고, 특히 2년 동안 의회에 계류돼 있던 또 하나의 시민권법-인종과 피부색, 종교와 국적을 이유로 주택을 판매하거나 임대하는 데 어떤 차별도 허락하지 않는 공정주택법(Fair Housing Act)-을 통과시키는 데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음(p595). 언론의 즉각적인 반응은 ‘존슨’의 염원에 힘을 더해주는 듯했는데, 머리기사들은 “존슨, 최고의 시간”이라 칭찬하며, ‘존슨’의 출마 포기를 “미국 정치사에서 견줄 바가 없는 이타적인 정치 행위”라고 평가했고, ‘존슨’을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던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조차 ‘존슨’의 포기를 “위대한 애국 행위”로 보았음(p595). ⑥북베트남이 협상 테이블에 참여할 의향을 표명했을 때 ‘존슨’의 인기는 치솟았는데, 그로부터 수주가 지나지 않아, 의회는 증세 법안과 공정주택법으로 알려진 1968년 시민권법(Civil Right Act of 1968)을 통과시켰고, 공정주택법이 통과되자, ‘존슨’은 “정의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라고 자랑스레 말했으며, 한 신문기자는 “‘존슨’ 대통령은 마음의 평안이나 영혼의 평안, 어쩌면 둘 모두를 창조해낸 사람처럼 보였고, 그렇게 행동했다.”고 보도했음(p595). 하지만 ‘존슨’의 즐거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는데, 요란하게 시작된 평화회담이 용두사미로 끝나며, 베트남과 미국을 고통에 밀어 넣었던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졌고, ‘린든 존슨’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기의 단층선은 그의 유산을 둘로 가르며, 그가 삶을 마칠 때까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음(p595).
● 비평
필자는 ‘린든 존슨’이 베트남전에 대하여 가졌던 소극적인 태도와 TV에서 베트남전의 실상이 공개됨으로 인하여 국민적 여론이 등을 돌린 것, 그 후 ‘린든’이 대통령 재선을 포기하고 ‘리더십’의 인기가 잠시 상승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있음.
● 토의
위기의 상황 특히 전쟁에 있어서의 ‘리더십’이 갖추어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 전쟁도 ‘리더십’의 정책이 될 수 있는지? 있다면 그 목적과 방향은?
□ 요약(에필로그-죽음과 기억에 대하여 1. 린든 존슨)
①배경과 능력과 기질이 다른 네 청년이 미국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달랐듯, 이들의 삶을 마무리할 즈음 대통령직 이후의 삶에 대한 생각, 죽음과 기억에 대한 생각도 달랐는데,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무척 다르게 끝났지만, 죽음 이후 자신이 남긴 업적으로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지기를 바란 마음은 같았음(p596). 그들이 열망한 명성과 세상에서 인정받으려던 열망은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요즘의 욕망과는 완전히 다른데, 그들은 자신의 업적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집단의 기억에서 지속적인 위치를 인정받느냐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함(p596). ②여기서 다룬 네 ‘리더’ 중 두 명은 대통령 재임 중 사망했는데, ‘에이브러햄 링컨’은 깊은 상처를 입은 국가를 치유하는 데 집중하던 과정에서 암살됐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전쟁을 마무리짓고 복잡한 평화과정을 준비하던 중에 사망했음(p596).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린든 존슨’은 대통령직을 무사히 끝내고, 그 이후의 삶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권력을 되찾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삶을 마감하는 날에도 그는 1920년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정도였음(p597). ③반면 애석하게도 ‘린든 존슨’은 능동적인 ‘리더’로 활약할 자신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걸 알았으며, 그에게 남겨진 4년은 달콤하기보다 씁쓸한 시간이었고, ‘도리스 컨스 굿윈’(저자)는 그의 곁에서 그 시간을 지켜보았는데, 백악관을 떠나기 전 수개월 동안, ‘린든 존슨’은 저자에게 텍사스에 들어가 상근하며, 그가 회고록을 쓰고 오스틴에 대통령 기념 도서관을 짓는 걸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몇 번이고 물었음(p597). 저자는 하버드에 복귀해 강의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기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그래서 시간제로 도와주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존슨’은 단호히 “안 돼. 상근하지 않으면 안 돼.”라고 대답했는데, 백악관에서의 마지막 날, ‘존슨’이 저자를 집무실로 불러, “도와주면 좋겠네. 자네가 원하는 대로 시간제로 말일세. 주말과 방학에 도와주면 고맙겠군.” 이번에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했음(p597). ④‘존슨’은 고맙다며 “하버드에서 몸조심하게. 그곳 친구들이 자네를 공격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들이 ‘린든 존슨’을 미워한다고, 자네까지 나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라고 덧붙였으며, 저자가 돌아서자, ‘존슨’은 저자를 불러 세우고는 덧붙여 말했는데, “자네가 더 이상 정상에 있지 않을 때는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을 걸세. 그런 것이 세상 속성이니까. 그래서 자네가 나를 위해 해주는 일을 죽을때까지 잊지 않을 거네.”(p598). 그 후 저자는 하버드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강의를 쉬는 때와 여름 방학에는 오스틴과 ‘존슨’의 목장에서 보냈으며, 물론 ‘존슨’이 회고록을 쓰는 과정을 돕던 옛 보좌관들과 연설문 작성자들이 있었고, 저자는 그런 팀의 일원이 됐음(p598). ⑤저자는 시민권과 의회와 관련한 부분을 맡았는데, 그들은 함께 일하며 자료를 철저히 점검했고, 회고록의 주인공인 대통령과 대화하기 전에 물어야 할 질문들도 준비했으며 베트남 전쟁이 화재에 오르면 ‘존슨’은 어김없이 경직됐고, 서류을 들척이며 힘겹게 말을 꺼냈음(p598). 목소리도 굳어져 거의 귓속말처럼 낮아졌는데, ‘프랭클린 루스벨트’나 ‘해리 트루먼’과 달리, ‘존슨’은 “자신이 올바른 결정을 내렸는지 카펫을 닳게 하며 쓸데없이 걱정하는 사람”이었고, 언젠가 ‘존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저자에게 말했는데, “‘트루먼’은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네. ‘내가 그렇게 했어야 했나? 맞아, 그렇게 했어야 했어!’ 그랬네, ‘트루먼’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결정했다는 걸 알았고, 더는 그 결정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았지. 뒤돌아보지 않았어. 나도 그런 성격을 조금이라도 가졌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내려진 결정을 뒤돌아보며, 그 과정을 되짚고,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것보다 나쁜 습관은 없으니까. 이런 습관이 나를 미치게 하네.” 거의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에 대한 아쉬움은 매일 그의 가슴을 후벼 팠음(p598). ⑥한편 국내 문제를 두고 의회와 협력하던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가면 ‘존슨’의 활기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고, ‘존슨’은 책상에서 일어나 성큼 성큼 걸으며, 흉내 내는 재주와 이야기꾼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는데, 예컨대 ‘해리 버드’와 ‘리처드 러셀’, ‘휴버트 험프리’와 ‘에버렛 더크슨’ 등을 흉내 내며 예산과 시민권에 관련된 대화를 실감나게 되살려냈음(p599). 얼굴 표정과 과장된 몸짓까지 더해져서 그야말로 연극 공연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그렇게 사기가 올라가면 ‘존슨’은 대통령에 취임한 초창기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되찾는 듯했으며, 저자는 자신이 맡은 두 부분의 초고에서 ‘존슨’에게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직접 인용하며, 그의 자연스런 말투와 폭넓은 통찰력은 물론 흉내 내는 능력과 외설스런 유머까지 드러내고 싶었음(p599). ⑦하지만 ‘존슨’은 초고를 꼼꼼히 읽고 난 뒤에 “이렇게 낼 수는 없어. 그래도 대통령의 회고록인데, 시골뜨기 무지렁이 정치인이 아니라, 점잖고 존경받는 정치인처럼 보여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고, 그의 자연스런 말투와 이야기가 품위 있는 회고록에 적합하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설득되지 않았으며, 결국 편집 과정에서 잘려나간 그의 자연스런 말투, 기상천외한 비유, 기민하게 돌아가는 두뇌 회전력은, ‘존슨’이 백악관에서 사적으로 전화할 때 몰래 남긴 녹음이 세상에 공개되며 드러나게 됐음(p599). ‘존슨’은 회고록 작성에 완전히 몰두하지는 않았는데, 그는 역사의 심판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조작됐다는 생각을 거듭해서 피력했고, “모든 역사학자가 하버드 사람이다. 공평하지 않다. 후버는 아이오와주 웨스트브랜치에서 태어난 까닭에 하버드 인간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린든 존슨’도 텍사스 스톤월 출신이어서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p600) ⑧이런 푸념은 일반적인 자기 연민을 넘어섰고, 그가 바라던 것이 대통령이란 직책은 아니었다는 것을 뜻했는데, 그가 회고록 출판 프로젝트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삶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한다는 생각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으며, 회고록을 끝내면, 그의 오랜 공직 생활과 그의 유용성도 끝났다는 뜻이었음(p600). 그래서 그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는데,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차라리 회고록 작성을 포기하고,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에 내 에너지를 쏟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내 목장을 관리하는 일에!”(p600). ⑨그 사이에 ‘존슨’의 외모도 눈에 띄게 변했는데,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칼이 사라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목깃을 덮는 긴 백발의 곱슬머리로 변해갔으며, 짙은 색 정장과 반질거리는 신사화도 반소매 셔츠와 작업화로 변했음(p600). ‘레이디 버드’가 “우리 심장의 고향”이라 불렀던 집에는 편안한 분위기가 감돌았는데, 그들은 아담한 부엌이나, 미국 중산층의 많은 가정이 그렇듯 접시에 음식을 담아 아늑한 거실 텔레비전 앞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했으며, 하지만 얼핏 봐도 전통적인 중산층 가정은 아니었고, 거대한 통신망을 갖춘 덕분에 ‘존슨’은 세계 전역에서 정보를 받는 즉시 전달할 수 있었음(p600). ⑩휴대폰이 등장하기 전의 시대였던 까닭에, 수영장에는 전화기가 특수 뗏목에 띄워져 있었는데, 그는 화장실에 앉아서도, 심지어 자동차로 이동하거나 모터보트를 항해할 때도 전화를 이용할 수 있었으며, 그의 침실에는 세 개의 화면으로 구성된 텔레비전이 붙박이로 설치돼 있어 세 방송을 동시에 시청할 수 있었고, 게다가 전략적으로 설치된 13개의 확성기를 통해 필요하면 ‘존슨’의 목소리가 목장 곳곳에 전달됐음(p601). ‘존슨’은 아침 일찍 직접 차를 몰고 목장을 돌아다니며 일터를 점검하고 일꾼들에게 지시를 내렸는데, 저자는 ‘존슨’의 아침 시찰에 때때로 동행했으며, 백악관과 목장은 권력의 크기에서 무척 달랐기에, ‘존슨’이 목장 일꾼들에게 지시할 때의 절박함에는 연민이 느껴졌고, 심지어 희극적으로 여겨지기도 했음(p601).
● 비평
필자는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책을 마무리하면서, 필자가 겪은 ‘린든 존슨’의 회고록 작성 과정과, ‘린든’의 말년에 회고록을 쓰며 목장에서 보냈던 모습 들을 잘 다루고 있으며, 아울러 베트남 전에 대해서는 ‘린든’이 많은 아쉬움과 후회를 하고 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임.
● 토론
지속적 기억으로 남고자 하는 ‘리더십’의 열망이 가지는 효과와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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