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야기

[하우스리더십학교]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제12강)

presentlee 2024. 3. 16. 23:01

https://youtu.be/MZqSaC-PnJI?si=t8412YyHUYr5J768


House Leadership School

□ 요약(10-1장 지도자-추종자 패러독스 : 지도자로서의 추종자)

①‘국민’이란 말은 미국 헌법에서 처음으로 사용됨. 미국 독립선언서는 “어떤 형태의 정부든지 특정한,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침해할 경우 국민이 그 정부를 바꾸고 붕괴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명시하였음. ‘링컨’대통령은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없음을 주장함(p236). 그러나, ‘국민’이라는 정해진 실체가 없으며 성, 나이, 계층, 지역,   수입, 교육, 문화관, 민족적 혈통, 종교, 이념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음. ‘제임스 메디슨’은 파당의 잠재적 원인은 ‘인간 본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적고 있으며, 국민들 사이의 갈등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변화의 핵심 요소로 이해됨(p236). ②리더십 연구자들은 화합과 갈등을 분석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게리 윌즈’(Garry Wills)가 말했듯이 지도자들에 대해 자서전, 비망록 등 수천권의 자료가 있지만 ‘추종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누구도 ‘추종자’를 교육시키겠다고 천명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음. 지도자와 추종자의 관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는 복잡해지는데, 정치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만큼 일상적인 것도 없는데, 사업가들은 시장조사를 하고 정치인들은 선거여론조사를 하지만 잠재적인 추종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종잡을 수 없음. 과연 사람들에게 불붙는 마음을 갖게 하고, 그들을 변혁시켜 추종자로 만들려면 무언가 일어나야 함(p237). ③이 격발시키는 행위-연설이나 선언문이나 시위-는 추종자들이 얼마나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일정한 정도의 예상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심지어 지도자-추종자관계의 초기단계-또는 그 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에서도 추종자가 이끌고 지도자가 따라가는 현상이 발생하며, 더 복잡한 것은 성격이 얌전한 관료가 거리의 시위에서 과격파로 돌변하거나, 연설할 때는 변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던 정치가가 협상에서는 ‘거래적 리더십’으로 변신하기도 하는 등 각기 다른 정황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임(p238). ④필자는 이 모든 것을 ‘번즈 패러독스’(Bruns Paradox)라고 부르고 싶은데, 어떤 해법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된다는 의미임. 만약 ‘리더십’과 ‘팔로워십’이 이렇게 서로 얽혀 있고 유동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지도자’와 ‘추종자’를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누구에 대해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지난 30년 동안 심리학자 ‘홀랜더’(E. P. Hollander)는 ‘지도자’가 ‘추종자’들의 인식과 기대와 잠재력에 의존한다는 측면에서 ‘추종자’들에 대한 관심을 높여왔는데, ‘홀랜더’는 “모든 솔선이 지도자로부터 나올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였으며, “추종자들 또한 성공적인 리더십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지도자도 추종자의 입장에서 부름에 응답할 필요가 있다.”라고 보았음. 정치학자 ‘찰스 유크너’(Charles Euchner)는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계몽적이고 책임감 있는 추종자들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수동적인 ‘추종자’들은 “리더십을 어렵게 만든다.”라고 덧붙였음(p238). ⑤필자는 이 패러독스의 해결책은 우선 ‘실현되지 않은 욕구’, ‘표현되지 않은 태도’, ‘잠재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러한 ‘욕구와 관련된 행동을 취할 강력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구분하는데 있다고 봄. 초기단계에서 ‘리더십’의 뚜렷한 역할은 지도자들이 ‘주도권’을 잡는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적인 통찰력을 잠재적인 추종자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주목을 받고, 그 이상의 상호작용을 위한 전기를 마련하는 것인데, 교착상태를 깨고 관계를 설정해주기 때문에 첫 번째 행동이 결정적이며 이러한 행동은 창조적임(p239). ⑥주도하는 역할이 지도자의 유일하고 독창적인 역할일까? 이는 상황에 달려있는데, 만약 연설자의 자극으로 군중이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봉기가 혁명적으로 이어져 새로운 체제를 창출하고, 결과적으로 그 일을 이룬 것은 추종자들이나 연설자가 없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아마도 변화하는 여건에 더 잘 들어맞으며 추종자들의 점증하는 기대에 더 잘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이 ‘추종자’들 가운데 떠오를 수 있음. ‘홀랜더’가 주장하는 것처럼 변화의 과정 모든 단계에서 ‘추종자’들의 역할-지도자들이 암시하는 바를 포착하는 것, 그에 대한 반응의 질, 지도자에 대한 지속적 압박-은 결정적인 것이 됨(p239). ⑦‘리더십’과 ‘팔로워십’은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만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나 역사적 인과관계와 맺는 관계라는 핵심적 쟁점의 중심부에 있음(p239).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첫 번째 임기는 이 연계의 중요성과 복잡성을 잘 보여주는데, 1930년대 미국의 ‘리더십’이 공화당의 ‘후버’대통령에서 민주당의 ‘루즈벨트’로 옮겨지는 기념비적 변화를 목도하였음.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비범하게 정치기술이 뛰어난 ‘지도자’ 또는 ‘집단적 리더십’의 출현이었을까? 경제대공황이었을까? 등등. 역사학자들은 1933년 ‘루즈벨트’ 대통령 집권 초기의 100일동안 실시되었던 비상대책으로 ‘뉴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함(p240) ⑧그러나 누가 ‘루즈벨트’를 백악관에 보내었을까? 거의 2,300만 명에 달하는 유권자들이 만약 민주당이 집권하면 “수백 개 도시의 길거리에 잡초만 무성하게 될 것”이라는 ‘후버’ 대통령의 경고를 무시했으며, 그들은 민주당에 상하 양원의 다수 의석까지 부여했고, 1,600만 명의 유권자는 여전히 ‘후버’ 대통령을 지지했으나, 수백만 명의 다른 유권자들은 ‘루즈벨트’를 지지하려고 공화당에 대한 오랜 충성을 포기함(p240). 1933년 3월에서 6월까지의 첫 취임 100일 동안 새 대통령이 신속하게 주도권을 확보하였고, 의회에 제출된 그의 제안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적 색채가 뒤섞인 것이였으며, ‘비상대책법안’은 미국을 대량실업과 빈곤에서 구원할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뉴딜’은 밀물과 썰물 같은 희망과 기대의 파도를 촉발시켜 추종세력이 쇄도하게 만들었지만, 경제회복이 주춤거리자 냉소의 대상으로 변해버림(p240). ⑨‘단체교섭권’을 명시한 ‘국가산업회복법 7조(a)항은 산업노조들에 엄청한 힘을 부여했는데, 미국 광산노조의 ‘존 루이스’(John Louis) 위원장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신이 노조에 가입하기를 원한다.”라는 내용의 포스터를 전국의 모든 탄광 지역에 도배하기도 함.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사나운 얼굴, 포효하는 듯한 연설의 ‘루이스’는 대통령의 리더십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가장 투쟁적인 노동자의 상징이었는데, 그러나 ‘루이스’를 비롯하여 다른 노조의 위원장들은 전국에 걸쳐 다발적인 파업을 확산시키는 데에 ‘리더십’을 발휘했던 노동자들의 추종자가 되기도 함. 사용자와 정부에 대한 노동자들의 폭증하는 요구는 ‘루즈벨트’의 리더십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게 됨(p241). ⑩항의시위는 농장에서도 일어났는데, 생산량을 감소시킴으로써 농부들의 소득을 회복시키고자 입안된 ‘농업조업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의 통과는 그들의 소득보다 희망을 증가시켰을 뿐이었고, 농장의 불만은 ‘로버트 러 폴렛’(Robert La Follette) 상원의원 같은 진보적 지도자들의 야심을 부추겼는데, 그는 공화당에서 탈당하여 대통령과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하고, 미네소타의 농장노동자 단체들은 미네소타 주 민주당과 결별했으며, 전국적으로 급진적 농장 노조는 ‘희소성의 경제학’을 비난했고 “우리가 과잉 생산한 것은 굶주린 배와 발가벗은 등”이라는 주장도 했음(p241). ⑪이러한 모든 것과 관련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 명이 있었는데 상원의원인 ‘휴이 롱’은 루이지애나의 정치보스가 되어 “우리의 부를 나누어 가지자!”라는 단순한 문구로 주목을 받는 인물로, 필라델피아에서는 그가 루즈벨트를 비난하는 것을 들으려고 1만6천명이 몰리기도 함(p242). 가톨릭 신부인 ‘찰스 코플린’은 CBS 네트워크를 통해 4천만 라디오 청취자에게 루즈벨트에 대한 증오심을 전파했으며, ‘타운센트 박사’는 ‘타운센드 연금법’을 창안하는 등 다루기 힘든 인물임(p243)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루즈벨트’와 그 시대의 반대 입장들을 다루면서 지도자-추종자의 모순을 지적하였음. 우리 현실에서 진정한 추종자로서의 실례들이 있는지?
 
 □ 요약(10-2장 지도자-추종자 패러독스 : 추종자로서의 지도자)
 
①1935년 늦겨울 ‘루즈벨트’의 ‘리더십’은 쇠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칼럼리스트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은 “수 개월의 희망찬 시기를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한번 실망의 시기로 접어들었다.”라고 썼으며, 1935년 연두교서에서 ‘루즈벨트’는 “분명한 목적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으로 유지되는, 진정한 화해의 시대”를 열자고 호소했지만, 뉴딜정책에도 불구하고 수백만명이 실업상태였으며 1935년은 경제공황이 6년째 계속되는 시기였고 대통령의 ‘리더십’을 놓고 롱과 코플린을 비롯한 다른 잠재적 경쟁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음(p244). ②‘루즈벨트’는 혼란스러웠는데 그는 빈곤계층과 실직자들에게 수십억달러를 제공하는 한편 경제 회복을 위해 좌우 양극단의 중도를 택하려고 하였으며, 그는 민주당이 1934년 총선에서 의석을 늘리는 데에 힘을 보탰는데, 그 이유는 ‘집권당은 중간선거에서 의석을 잃는다’는 통념을 깨뜨린 것이기 때문임. 당시 의회는 좌경화되고 있었으며 ‘루즈벨트’와 보수층간 밀월 이후 ‘롱’과 같은 ‘민중주의자’(popuist)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농촌과 거리에서는 루즈벨트에 대항세력이 조직되었음. 이에 놀란 대통령의 동료들은 그가 과감한 리더십을 다시 펼치도록 주문함(p244) ③1912년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태프트’ 대통령에게 했던 것과 같이 ‘롱’이 그에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이는 민주당이 분열하고 1936년 재선에서 ‘루즈벨트’가 패배하리라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백악관 참모들은 서부 지역에서 ‘타운센드’의 운동이 탄력을 받아 확상 중이라고 하였으며, ‘윌슨’의 전기작가는 ‘루즈벨트’에게 미국에 높은 수준의 도덕적 목표를 제시하라고 촉구하였음(p244). 그러나 루즈벨트는 동의하지 않았고, 대중의 심리가 “인간의 약점 때문에 오랜 기간 높은 수준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다.”라고 대답함.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특정한 문제에 대해 단기간에 정열적 열성을 국민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기술을 가진 반면 ‘윌슨’ 대통령은 심원한 도덕적 확신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그는 인정함(p245). ④‘루즈벨트’는 자신이 ‘지속적 리더십’에 관련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는데, 국민들은 “같은 이름을 신문 머리기사에서 되풀이하여 보면 싫증을 느낀다.”라고 하며, “예컨대 지난해 11월 이후로 내가 1933년과 1934년 사이에 했던 것과 같은 정도의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롱과 코플린 같은 새로운 배우들의 연극이 주요한 드라마로부터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단결된 미국의 행동’을 자극할 것이지만 적절한 시기에 할 것이라고 함(p245). ⑤분명 대통령은 그의 정적들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며, 민주당 전국위원회는 1935년 봄의 비밀 여론조사를 통해 롱이 다음 선거에서 600만 표를 얻어 힘의 균형을 이룰 것으로 판단함. ‘코플린’ 역시 같은 조사에서 상당한 ‘지지세’를 보임. ‘루즈벨트’는 소란스럽고 극단적이고 개성 있는 괴상한 반대자들과 직면하여 경고를 받았다기보다 의하해할 뿐이었으며, 그는 모종의 행동을 취해야 함을 깨달았으나 언제 어떻게가 문제였는데, 그는 먼저 ‘거래적 리더십’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시도함. 백악관은 ‘롱’이 약진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미시시피의 악명 높은 선동가인 ‘시어도어 빌보’(Theodore Bilbo) 상원의원과 타협함(p245). ⑥한편, ‘백악관’은 ‘코플린’을 반대하는 카톨릭 지도자자들을 움직였고, ‘코플린’을 로마의 아메리칸대학 총장으로 보내는 방안을 모색하였으나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음. 놀랍게도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루스벨트’는 뒤통수를 얻어맞았는데 대법원이 1935년 5월 27일 만장일치로 국가산업 재건법을 무효화시킨 것임. 며칠 뒤 신중하게 준비된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은 그의 책상에 쌓인 실직 노동자, 파산한 농부 등의 ‘애처로운 호소들’을 인용하며, 그는 국책사업을 무력화시키고 집단적 리더십을 무력화시키는 대법원을 비난함. 그는 대법원의 결정을 헌법의 ‘낡은 달구지’ 같은 아이디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음(p246). ⑦루스벨트는 이번만큼은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는 거의 항상 유권자들에 대한 호소를 통해 반대자들을 능가해 왔음. 그러나 이번에는 보수주의에 대해 이를 갈며 대처했으며 대법원의 결정에 항소할 수도 없는 형국이었는데, 대통령이 볼 때 반대파들은 투표에서 그를 패배시키기 위해 조직화하고 있으며, 대법원은 뉴딜정책과 대통령의 주도권을 지속적으로 뭉개버리려고 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며, 그는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한 상태였음(p246). ‘루즈벨트’는 복잡하고 여러 꺼풀로 싸여 있는 인물이어서 그의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법부의 거부권 행사에 대한 격분에서, 아니면 보호막이 사라진 국민들에 대한 걱정에서, 다음 대선에서의 패배에 대한 두려움에서 뉴딜을 재가동하려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1935년 6월과 9월 사이에 그는 정치적 충격과 사회적 변화의 측면에서 1933년 취임 초기의 100일을 능가하는 창조적 입법과 행정적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임.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 ‘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 일명 Wagner법), ‘지주회사법’, ‘부유세’, 50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한 직업개선행정청 창설 등이 그것이며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 영향과 파급효과는 트루먼, 캐네디, 존슨 대통령을 거치면서 광범위하고도 심도 있게 나타남(p247).
● 비평 및 토의
  필자는 ‘두번째 뉴딜’이 시작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루즈벨트’의 리더십을 잘 보여주고 있음. 이처럼 광범위한 변화가 우리에게도 필요한지?
 
□ 요약(10-3장 지도자-추종자 패러독스 : 프랭클린 루즈벨트)
 
①‘루즈벨트’는 과감하고도 ‘창조적 리더십’을 선보였는데, 신민중주의자들은 여전히 1936년의 집권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으며, 그들이 필요한 것은 그들 간의 사소한 갈등을 초월하여 외관상 루스벨트의 리더십에 등을 돌린 것으로 보이는 수백만 명의 미국인을 추종자로 규합할 수 있는 인물이었음. 1935년 늦여름 ‘휴이 롱’이 그러한 인물로 부각되었는데 9월 그는 배턴루지에서 젊은 의사의 총격을 받고 사망함. 그의 선동적 대리인이었던 ‘제럴드 스미스’(Gerald Smith)가 즉작 ‘부의 공유’ 운동을 이어 받음(p247). ‘롱’의 죽임 이후 지역 조직들은 회원들을 충원하여 투표거부운동을 펼쳤으며 도시와 시골은 이들의 운동으로 폭발함. ‘루이스’의 산업 노조들은 정치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수십 개에 달하는 괴상한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감. 그러나 누가 이들을 연합시킬까? 사람들을 충원하고 지명하고 후보자들을 선출할 능력이 있는 ‘리더십’만이 할 수 있었음(p248). ②‘코플린’, ‘타운센드’, ‘롱과 스미스’ 세력들은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지만, 지도자들이 너무 경쟁적이어서 그들 중의 한 명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데 동의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1936년 여름에 그들은 농토 몰수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할 법안 통과를 위해 일념으로 싸운, 중립적이고 색깔 없는 노스다코타 출신의 ‘윌리엄 렘키’(William Lemke)의원을 선택함. ‘루즈벨트’는 적대자들을 무시하는 체하였지만, 늘 그랬듯이 그들의 모든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었으며, 1936년 7월의 여론조사 결과 ‘루즈벨트’의 지지율이 최저점을 기록하며 50%를 밑돌게 되자 참모들은 즉각적인 행동을 촉구하였음(p248). ③그러나, ‘루즈벨트’는 소리없이 자신의 지지층인 과거의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을 비롯하여 진보주의자들, 노동자 옹호단체들, 흑인들, 남부 민중주의자들, 빈곤한 농부들, 여성들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선거연합을 구성하고, 정치적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뛰어난 감각으로 ‘루즈벨트’는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하는 9월말 이전까지 기다렸다가 일순간 신중함과 타협은 사라지고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었는데, ‘메디스스퀘어가든’에서 행했던 열렬한 연설이 그의 ‘십자군’을 매료시킴. 그는 “조직화된 금전에 의한 정부는 조직된 폭도에 의한 정부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루즈벨트’는 “미국 역사상 한 후보에게 이들 세력처럼 단합하여 대항한 적은 없었으며, 그들은 나에 대한 증오로 뭉쳐 있고, 따라서 나는 저들의 증오에 맞서겠다.”라고 함. 투표 결과 투표율 78%, 공산주의자 후보 ‘얼 브라우더’(Earl Browder) 8만 171표, 사회주의자 ‘노먼 토머스’(Norman Thomas) 18만 7,833표, 연합당의 ‘렘키’ 89만 2,267표, 공화당의 ‘앨프 랜던’(Alf Landon) 1,668만 4,231표, 민주당의 ‘루스벨트’ 2,775만 7,333표였음. 연합당을 구성한 신민중주의자들은 겨우 2%를 득표할 뿐이었음(p249). ④‘루스벨트’가 그의 ‘정치적 리더십’에 가장 심각한 위협을 극복한 방법은 ‘롱’의 암살과 같은 우연적인 일이었는데, 그는 선거인단 사이에서 결정적 세력균형을 장악할 수 있었던 전국적인 신민중주의의 지도자였기 때문임(p249). ‘루스벨트’의 승리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그가 더 많은 정치적 자산을 가진 뛰어난 정치가였다는 것인데, 그는 1936년까지 엄청나게 확대된 언론 및 홍보기구를 포함한 대통령 직책상의 모든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였음. ‘루스벨트’ 자신이 “편집자 같은 뉴스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기자들은 말하였는데, 그는 ‘노변담화’(fireside chat)로 정치적 예술작품을 만들었음. 한편, 더 중요한 자산은 민주당으로부터의 지원이었는데, 1930년대 당시 양대 정당은 가공할 만한 득표조직이었고, 새로운 연합당 등은 유권자들을 실제로 투표장에 나오게 하는 선거구위원회 위원장이 가지는 인프라와 기술이 결여된 상태였음(p250). ⑤그러나, 대통령선거 1년 전 ‘루스벨트’가 신민중주자들의 봉기에 직면했을 때 이 중의 어떤 것으로도 충분해 보이지 않았는데 거기에 제2의 뉴딜이 더해졌음. 신민중주의자들은 ‘리더십’에 대해 말할 수 있었으나, 대통령은 행동할 수 있었으며,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이 가진 현실적이고 고동치는 필요에 대답했음. 정치학자 ‘마리오 에이나우디’(Mario Einaudi)는 “루스벨트는 서로 갈등을 빚는 혼란스러운 시각들과 이해관계 속에서 창조적인 예술가의 기질과 상상력을 가지고” 행동했다고 평가함(p250). ‘사회보장법’은 1935년 의회에서 통과되기 오래전에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의사, 병원, 사회사업가, 간호사, 보험회사, 노동자, 산업게-뿐만 아니라 한 관계자가 말했듯이. 그 문제에 대해 ‘무엇이든지 글로 쓴 적이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루스벨트’가 지지를 호소하면서 만들었음(p251). ⑥많은 ‘신민중주의자’들은 뉴딜정책의 추종자로 시작했으며, 뉴딜정책의 초기 ‘실험’이 실패함으로 상처받고 좌절한 사람들 속에 자신들의 추종세력이 있음을 발견하자 ‘루스벨트’와 결별하고 자신들이 지도자가 되었으며, 2차 뉴딜정책과 함께 ‘루스벨트’는 그의 이전 추종자들을 따르기로 방침을 바꾸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그는 가지지 못한 자, 뒤처진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들의 필요를 반영하는 광범위한 정책들로 지지를 만들어 내었음(p251). ⑦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로부터 우리는 ‘리더십’과 ‘팔로워십’에 대해 어떤 점을 배울 수 있을 까? 즉 ‘상황’의 힘을 깨달을 수 있는데,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위기의 시기였던 1932년에도 ‘루스벨트’는 구민주당 내의 전통적 보수유권자들을 달래야만 했고, 따라서 그의 선거운동은 신경제 및 사회개혁과 함께 경제적인 정부 살림, 균형예산, 통화 건전성 등에 대한 지지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실제로 그는 민주당내 파벌 구성원들을 중재할 수 있는 ‘거래적 리더십’을 제고하였으며, 몇 년이 지나서 ‘루스벨트’가 자신의 추종세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된 뒤에는 ‘변혁적 리더십’을 제고했음. 그는 ‘뉴딜연합’을 조직했으나 그의 정책에 의해 힘을 얻은 일부 추종자들, 특히 노동자들은 역으로 ‘루스벨트’에게 압력을 넣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들이 되었음(p251). ⑧‘루스벨트’는 상황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 상황이 ‘행위력’(agency)에 굴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으며,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유권자를 재구성하고 추종자들을 재편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였는데 그는 단순히 여론을 따르지만은 않았고 계속되는 연설을 통해 그 욕구들을 정부에 대한 타당한 요구로 정당화 했으며 1935년 변혁적 입법으로 경제적․사회적 욕구에 대답함으로 여론을 지배함. 또한 그는 ‘혁신’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입증하였으며 1935년 100일동안 쏟아져나온 그의 제한이 미국을 매혹시켰고, 국면 전환의 전기를 포착하고, 수백만 명의 새로운 추종자들을 대상으로 한 창의적 정책으로 승리의 계기를 잡을 수 있었음(p252). ⑨뉴딜 기간 동안 지도자-추종자 간 상호작용의 복잡성에 대한 몇 가지 시각을 가지게 되는데, 처음에는 공화당에 대항하여, 다음에는 신인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추종자들을 동원한 ‘루스벨트’에게 이것은 간단한 싸움이 아니었으며, 각 진영은 단계마다 상호교통하며 이합집산하는 지도자 및 추종자 군단을 옹위하고 있었으며, 단계를 따라 기대가 고양되고 좌절되며, 동원과 소외, 저항과 지지로 점철되기도 했음(p252). 지도자-추종자에 대하여서 요약하면 1)기존체제나 구조의 ‘계승자’인 후버의 공화당, 2)‘혁신자들’, ‘선구자들’로서 기존 체제에 영향을 주는 대안적 리더십인 루스벨트와 뉴딜세력, 3)‘반대자들’로 혁신자들의 변화를 거부하는 ‘신인민주의자들’, 4)‘협력자들’로 혁신자나 반대자들에 반응하는 ‘민주당, 신인민주의자들 지지 유권자들’, 5)‘연합구축자들’로 선구자, 반대자 사이 연합 만들려는 루스벨트의 1936년 선거대연합, 6)‘분열자들’로 원리 구성에서 떨어져나온 반뉴딜 민주당원, 자유주의 공화당원, 7)‘수동적인 세력’으로서 1936년 활성화된 기권자들, 8)‘고립자들’로 다른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를 공유하지만 정치구조에서 멀어진 자들 등임
● 비평 및 토론
  필자는 ‘지도자’가 ‘추종자’가 되고, ‘추종자’가 ‘지도자’가 되는 과정을 ‘루스벨트’와 ‘뉴딜’에 처음에는 지지하였다가 떨어져나온 ‘신민중주의자’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잘 보여주며, 그것을 지도자-추종자의 성격 별로 잘 구분하여 가설을 제시하였음. 이와같이, ‘지도자’와 ‘추종자’간의 다양한 관계의 형성과 변화가 현실 정치 상황 속에서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 적용점은?

역사를바꾸는리더십(제임스맥그리거번스)_24하우스(이현재)_10장_지도자추종자패러독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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